수필(신문칼럼)

풍경이 있는 에세이- 기차 / 손택수 시인

시인 최주식 2010. 1. 24. 20:04

풍경이 있는 에세이- 기차 / 손택수 시인


  보라! 여기 기차 칸의 직선들은 절묘하다. 객실과 통로, 또 기차 안과 바깥 풍경을 이중 경계 짓고 있다. 기차는 그 안팎의 경계선을 품고 경계를 가르면서 달리고 있다. 동해남부선을 타고.

 

1 여행에의 초대장


  기차는 사람의 근육 신경을 자극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기차는 여행에의 초대장이다. 근육 속에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는 열량들을 남김없이 소진해버리고 싶은 유혹을 견딜 수 없게 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 기차만 지나가면 그렇게 손을 흔들며 뛰어갔는지 모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기차 꽁무니가 사라질 때까지 매번 한번도 이기지 못한 경주를 하게 하였는지 모른다.


  기차가 오지 않을 땐, 무료해진 아이들을 따라 철로에 귀를 대고 기차가 어디쯤 오고 있나를 가늠해 보곤 하였다. 그런 일에 능숙한 철로변 아이들은 오분 뒤면 온다, 틀림없어, 하고 장담을 하였다. 한술 더 떠 기차가 지금 어느 마을을 지나고 있다는 둥, 마을을 지나느라 속력을 늦추고 있다는 둥, 나로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들을 엮어내기도 하였다. 그런 아이들의 말은 대개가 오차범위 안에서 맞아떨어졌다. 기차가 지나가는 걸 보고 시계를 맞추던 아이들, 그들의 재주는 참 신통방통한 것이었다.


  나는 요즘도 가끔씩 선로를 보면 그때처럼 귀를 기울여 보고 싶어진다. 내 눈엔 보이지는 않지만, 저 멀리서 누군가가 기적을 울리며 달려오고 있을 것만 같아서다. 산 너머 기차의 진동음처럼 누군가의 아련한 음성이, 두 줄기 더듬이를 타고 내 안의 허름한 역사를 향해 오고 있을 것만 같아서다.

2   뒤돌아보고 앞으로 간다


  기차는 뒤를 돌아볼 줄 안다. 뒤를 돌아보는 힘으로, 앞으로 나아갈 줄 안다. 경사가 급한 산마루를 오르기 위하여, 지나간 풍경들을 소처럼 여물여물 찬찬히 되새김질하며 후진을 한다는 스위치백 열차. 모든 기차가 강원도에 있는 그 스위치백은 아니지만, 기차는 앞만 보고 숨가쁘게 달려온 사람들에게 뒤를 돌아볼 줄 아는 미덕을 가르친다.


 '나, 다시 돌아갈래',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거의 절규처럼 외치는 영화 주인공의 대사가 굳이 아니더라도(이창동 감독,'박하사탕'),기차는 근본적으로 회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 지향점이 한 인간의 시원일 수도 있고, 연둣빛의 첫사랑일 수도 있고, 아름다웠던 한 시대일 수도 있다. 너와 내가 거기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던, 둘만의 내밀한 공간일 수도 있다.


 기차가 지닌 낭만적인 뉘앙스는 많은 부분 그런 추억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추억은 몸 담고 있는 일상을 외면하고 싶은 자의 단순한 퇴영성을 넘어서서, 현실과 보다 더 생생하게 만나고 싶은 자의 적극적 회귀라는 의미를 갖는다. 설령 그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기획이라 하더라도, 기차는 폭주하는 문명에 실려 점점 더 부박해져 가는 현존을 반성케하는 촉매로서 작용한다. 그러니 누가 기차를 근대성과 식민성의 상징물로만 몰아붙일 수 있겠는가. 기차는 차라리 근대의 산물이면서도 근대를 반성하는 낭만적 아이러니에 가깝다.


  그러나 기차를 타고 여행길에 오른다는 건, 그러한 반성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여행을 하나의 화해상태로 받아들이게 한다. 기차와 대지는 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행자의 풍요로운 시선을 위해 협력한다. 산협에 뚫린 터널과 강을 건너가는 철교, 측백나무 잎이 한가롭게 하늘거리고 있는 시골역, 하늘에 막 새를 뿌려놓고 있는 들판과 잘 익은 빗방울을 아삭아삭 깨물고 있는 풀 숲-.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창문 밖의 풍경도 풍경이지만, 기차 안의 사람들이 연출해내는 장면 역시 다채롭긴 마찬가지다. 통로 사이를 오가며 아이를 재우는 어미가 있고, 어디까지 가시냐며 통성명을 하고 맥주캔을 부딪는 사람들이 있고, 예나 지금이나 기차여행에선 빠질 수 없는 칠성사이다와 삶은 달걀이 있다.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창문턱에 지긋이 턱을 괴고 덜컹거리는 기차의 흔들림을 음미하는 사람도 있다.

창문 안쪽의 풍경은 창문 바깥으로, 창문 바깥의 풍경은 창문 안쪽으로 스며들어 서로를 증폭시킨다. 증폭된 풍경은 내면에 고유한 리듬을 만들어내면서, 안팎으로 깊어지고 넓어진 자아를 경험케 한다. '세계는 보여지기를 바라고 있다.' 몽상의 철학자 바슐라르의 말이었던가.


3    인간을 향한 청춘의 꿈


  기차는 또한 불의 몽상가다. 기차가 지나가면, 두 줄기 레일 속에 잠들어 있던 불이 비로소 눈을 뜬다. 철로 굳어지기 직전까지, 쇳물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다가 식어버린 불꽃이, 무쇠바퀴와 레일이 부딪히는 힘으로 꽃몽오리를 활짝 터뜨린다.


  불꽃, 그것은 내가 잃어버린 낭만적 열정의 다른 이름이다. 세상의 고뇌란 고뇌는 혼자서 다 떠맡은 듯,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싶었던 청춘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기차는 스무살 청년이 거닐던 서해의 어느 외진 바닷가와, 검은 물이 콸콸거리던 사북의 탄광촌과, 밤부엉이 소리 구슬프게 들려오던 간이역, 우그러진 주전자 물이 팔팔 끓어오르던 대합실로 나를 데리고 간다.


  눈이 복사뼈를 덮은 어느 겨울인가, 막차를 놓치고, 여비를 아끼느라 조개탄 난로 곁에서 등걸잠을 청하던 대합실, 창밖에는 눈이 날리고 있었다. 가끔씩 먼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만이 고적하게 들려오고, 적설량을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들이 희미해져 가는 의식을 일깨우듯 죽비치는 소리를 내며 꺾어지고 있었다.


  과연 그때 내가 놓친 기차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기다리던 기차는 무엇이었을까. 대합실 문틈을 비집고 드는 겨울 바람과 식어버린 난롯불 곁에서, 나는 다만 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했던 것 같다. 다시는 찾지 않겠다, 등을 돌린 사람들의 체온을 아쉬워하며, 살갗과 살갗의 마찰에 의해 뜨거워지고 싶었던 것 같다.


  기차- 내가 놓친 청춘의 꿈은 결국 인간을 향한 꿈이었다. 격렬하게 타오르다가 사그라든 불꽃을 피우며 달려가고 싶은 물질의 꿈이었다. 오는 주말엔 동해남부선이나 경전선이라도 타고 어디 가까운 간이역이라도 찾아봐야겠다.


부산일보[2003/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