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문칼럼)

[ESSAY] 나의 겨울연가(戀歌)

시인 최주식 2010. 1. 23. 19:50
최영미 시인

 

[ESSAY] 나의 겨울연가(戀歌)

"나는 한번 시작하면 1박2일로 운다.
추억할 남자가 없는 내 청춘이 불쌍해 나는 울었다.
나는 첫사랑이 없다.
처음이 없으니 마지막 사랑도 없을 것이다."

올겨울은 정말 특별했다. 우리 생애에 다시 이런 푸짐한 눈을 구경할까? 예전에는 궂은 날씨가 귀찮아, 빙판에 넘어질까 무서워 외출을 자제했는데 올해는 아이처럼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괜히 약속도 없는데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고 돌아다녔다. 중풍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신 아버지를 잊고, 나의 추운 현실을 잊고 하얀 풍경에 묻혀 잠시 나는 행복했다.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에서 눈을 마중하니 더욱 애틋했다. 몇년 전 지루한 휴일이 이어지던 어느 날 비디오 가게에서 '겨울연가' 전편을 세트로 빌려 보았다. 마지막회가 끝날 때까지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혼절하다시피 드라마에 폭 빠졌다. 고등학교 교정에 사랑을 노래한 사라 티즈데일의(Sarah Teasdale)의 시가 울려 퍼지는 장면에서 나의 울음보가 터졌다. 나는 자주 울지 않지만, 한번 시작하면 1박2일로 운다. 젊은이들의 풋풋한 연애를 수채화처럼 그린 영상을 보며 언뜻 아무도 생각나지 않았다. 추억할 남자가 없는 내 청춘이 불쌍해 나는 울었다. 나는 첫사랑이 없다, 처음이 없으니 마지막 사랑도 없을 것이다, 예감하며 서러웠다. 서투르더라도 어긋나서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도 없으면서 나는 연애시를 여러 편 썼다. 나의 억울한 속을 전화로 하소연하자 두 아이의 엄마이자 유부녀인 친구는 나를 달래며 말했다.

"왜 없겠어? 머릿속을 잘 뒤져봐. 하나쯤 나올 테니."

과연, 그녀의 말대로 찬찬히 뒤져보니 누군가 있었다. 문제는 그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 아니 셋인가? 여고 시절에 짝사랑한 독어 선생님. 대학 2학년 겨울에 잠깐 만나고 헤어진 N. 그리고 나를 춘천으로 데려간 그가 줄줄이 딸려 나왔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나의 첫사랑인지, 나도 모르겠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나의 비공식적인 첫사랑. 그는 내가 다니던 선일여고 1학년을 가르치던 유일한 총각 선생님이었다.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택한 문과반 아이들 거의 전부가 그를 좋아했다. 그가 교실 문을 처음 열고 들어온 날 우리는 장대처럼 높은 키에 놀라 탄성을 터뜨렸다. 190㎝에 가까운 큰 키에 마른 체격, 안경 너머로 싱글벙글 순박하게 웃으며 그는 우리를 바라보지 않았다. 눈이 높게 달렸으니 앉은 학생들을 내려다보기가 힘들었으리. 그의 시선은 교실의 천장을 지나 맞은편 벽의 가장 높은 지점에서 불안하게 서성거렸다. 곧 그는 우리에게 수줍게 실토했다. 수업 중에 여학생들을 절대로 바라보지 말라고, 여학교에 처음 부임하는 그에게 선배들이 충고했다나. 그래서 그에게 독어를 배우는 1년 동안 우리는 허공을 응시하는 꺽다리 선생에 익숙해졌다.

수업 중에 그는 교과 과정과 관계없는 문학 이야기가 잦았고, 우리의 교양을 시험하는 질문들을 불쑥 던지곤 했다. "여러분 중에 독일 작가 스무 명을 댈 수 있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내가 아는 이름들을 꼽아보다 자신이 없어서 나는 손을 들지 않았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의 대화 상대가 되기 위해 나는 책을 아주 많이 읽었다. 그가 지나가는 말로 언급하는 소설가와 시인의 이름을 종이에 적어 두었다가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다. 그 덕분에 나는 헤르만 헤세를 졸업하고, 하인리히 뵐처럼 보다 고상한 작가들을 섭렵했다. 여고 1년생인 내 수준에 맞지 않는 교양 서적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입문'을 탐독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닌지. 그가 독일어로 가르쳐준 'Am Brunnen vor dem Tore'로 시작하는 슈베르트의 가곡은 음치인 내가 지금도 즐겨 부르는 유일한 외국 노래이다. 먼 훗날 내가 파리의 노천카페에서 독일 여배우 한나 쉬굴라 앞에서 폼 잡고 선창할 기회가 올 줄 알고 그렇게 열심히 배웠던가. 아이들이 얼마나 그를 따랐는지 학기말에 독어 시험을 보면 한 반에 만점이 스무명이 넘었다.

2학년이 되면 그는 우리를 떠날 것이다. 1학년의 마지막 수업일, 헤어지기가 싫어 눈물이 글썽한 우리에게 그는 약속했다. 너희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겨울에 다시 만나자며 그는 때와 장소를 미리 정해주었다. 대학생이 되던 첫해, 첫눈 오는 날에 종로2가 고려당에서였다. 독어 선생과의 집단 데이트 장소인 빵집에 나는 나가지 않았다. 내가 대학 신입생이던 1980년은 너무도 길고 어두웠기에. 그해 여름이 가기 전에 나는 그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었다. 게다가 첫눈 오는 날의 정의도 부정확했다. 부슬부슬 눈발이 흩날리는 날인지, 본격적인 눈이 쌓이는 날인지. 그런데 사랑이 뭔지 알고 싶지도 않은 중년에 내가 무슨 철 지난 타령이람!

낭만적인 감상에 오래 잠겨 있기에는 춘천은 너무 추웠다. 폭설이 내린 다음날 서울에서의 문학 강연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수도관이 얼어 세탁기가 돌아가지 않았다. 뜨거운 물을 수도꼭지에 붓고 헤어 드라이기를 돌려 호스를 녹였다. 올해 장편 소설 하나를 쓸 생각이다. 소설을 쓰기 전에 얼어 죽으면 안 되니, 정신을 차려야지. 아침마다 일어나 보일러와 수도를 점검한다. 나의 공식적인 첫사랑은, 얼음이 녹은 뒤의 봄날을 기약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