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금치 한단에 대한 추억 / 이경림 (시인)
열 세살 때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이야기다. 지금은 아주 번화한 서울의 요지가 되었지만 그 때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빈촌이었던 연세대 부근 쌍굴다리 뒤에 우리 가족이 세들어 살던 집이 있었다. 나는 안동에서 중학교 일학년에 다니다가 모든 것에 실패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던 것인데 그런 상황이다 보니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 두끼 정도만 먹고 살았는데 그 것도 언제나 죽이었다. 엄마는 커가는 우리들의 영양이 걱정되어서인지 그래도 콩나물이나 시금치, 근대같은 나물들을 넣고 죽을 끓이셨다. 어느날 엄마는 돈 오십환을 주시며 창천동시장에 가서 시금치 한 단을 사오라고 하셨다. 시장에서 나는 삼십환인가 하는 시금치 한단을 샀는데 채소가게 주인이 백환을 낸 줄 알고 칠십환을 거슬러 주었다.
지금이나 그 때나 돈에 대한 관념이 허술한 나는 세어 보지도 않고 한 참을 걸어 쌍굴다리를 다 지나 와서야 그 사실을 알았고 도로 돌아갈까? 하고 생각하다가 내일 아침꺼리 걱정을 하던 엄마가 머리에 떠올라 머뭇거리며 그 돈을 가지고 집으로 갔다. 그리고 짐짓 밝은 소리로
'엄마, 나 시금치 공짜로 샀다, 그러니까 그 돈으로 쌀 한봉지 사!'
하고 칠십환을 내놓으며 경위를 설명했다. 그러나 순간 나는 그렇게 참담한 엄마의 표정을 본적이 없었다. 엄마는
' 너 이 돈 가지고 오며 수지맞았다고 생각했니?'
하고 조용히 물으셨다. 나는 하도 심각한 엄마의 표정에 질려
'그렇지는 않지만 엄마, 이걸로 내일 아침 꺼리 사고 나중에 돈 생기면 갖다주면 되잖아'
하며 변명을 했다.엄마는 저녁지을 생각도 않고 말없이 한참을 부엌바닥에 앉아 있었다. 돌아 앉아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엄마가 우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 하셨다.
'얘야, 내일 아침 한 끼는 이 돈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는 평생 시금치 도둑이 된다는 걸 왜 모르니? 배고픈 것과 도둑이 되는 것 중 너는 어떤 쪽을 택하겠니? 그 양반 집에 들어가기 전에 빨리 이 돈 돌려 드리고 오너라.'
조용했지만 너무나 단호한 엄마의 목소리에 눌려 나는 도로 그 길고 컴컴한 쌍굴다리를 지나 시금치 장사에게 가서 돈을 돌려 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시금치 한 단은 내 생의 가치기준이 되었고 나약한 것같았지만 단호했던 엄마를 향한 두려움과 존경의 상징이 되었다.
요즈음 가끔 나는 시나브로 사라져가는 이 시대의 그'시금치 한단'의 메타포를 생각하며 씁쓸해 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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