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동(弘恩洞) 참새 / 윤모촌
뜰에서 쌀가마니를 퍼 옮기다가 쌀톨을 흘렸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멀리서 참새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여남은 놈이 담장 위에 한 줄로 앉더니 저희끼리 지껄이기만 하고 땅으로 내려앉으려 하지를 않는다. 날만 새면 창문 앞 전선에 와 앉아서 나와는 마주 보는 사이인데도, 고놈들은 내 눈을 기기만 하고 곁을 주려 하지를 않는다. 약삭빠른 자를 가리켜, 참새알 굴레씌워 걸방으로 멘다 한다. 이를 테면 신문에 내는 부고에 자녀가 외국에 나가 있는 국명을 표시하는 것도 그런 예이다. 친구로 사귀어도 자녀들과는 안면도 없이 지내는 세태 속에서, 해외거주 자녀이름을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광고를 한다. 부하직원의 사정은 외면하면서도, 상사의 가족 생일까지 수첩에 적어가지고 다니는 이도 있다. 명함에 '특선작가'라고 박아가지고 다니는 일, 박사학위를 가짜로 받는 일,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문학상을 타겠다고 나서는 것 따위는 참새알 걸머메고도 남는 꾀다. 윤모촌 수필가 Ⅰ. 약력
한참 듣고 있자니까, 고놈들의 지껄이는 소리가 여느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한 놈이 유독 '짹짹'하면, 저쪽 끝의 놈이 '쪼쪼'하고 묘한 소리로 응답을 한다. 포식거리가 생겼지만 경계하라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연신 나를 내려다보다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치면, 포로롱 날아갔다 이내 되돌아와서 또 야릇한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내려앉아 먹자커니, 안된다커니 하는 모양이다.
고놈들의 눈치를 채고 짐짓 안보는 체하며 가마니를 털고 나서, 마당에 흩어진 쌀톨을 그대로 두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반쯤 열어 놓은 창틀에 눈만 내밀고 내다봤더니, 그제서야 내려앉아 쪼아먹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쪼아먹는 품이 더없이 얄미웠다. 한 번 쪼고는 머리를 들어보고, 또 한 번 쪼고는 고개를 든다. 그러다가 내 눈매가 흔들리는 듯하자 일제히 담장 위로 날아오른다. 모이가 다 없어질 때까지, 쳐다보는 법이 없는 닭과는 너무도 다르다.
그 꾀에 혀를 차면서, 다시 창 밑으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조심스레 머리를 들었을 땐, 고놈들은 앞서보다도 더 민첩하게 담장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나서 아까와는 또 다른 목소리로, 까불대던 몸짓도 빳빳해져 가지고, 고개를 고추든 두 놈이 주고받는다. 한층 경계하라는 모양이었다.
하는 양이 가소로워 다시 움츠리고 앉아 지켜보았다. 이번엔 더 동안이 떠서 내려앉기 시작했으나, 내가 머리를 쳐들었을 땐 담장 위가 아닌 아주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더 버틸 수가 없어 얼마 후 나가봤을 땐 깨끗이 주워먹고 간 뒤였다.
어느 날 창가에 와 노는 놈들을 보면서 혼자 웃음을 금치 못했다. 앞집 굴뚝가에서 노는 탓으로, 고놈들의 몸뚱이가 굴뚝새처럼 돼 있는 것이다. 제놈들이 약은 체는 해도 목욕은 못하는구나 하였다.
겨울, 포동포동 살 오른 놈을 보고 참새를 잡아먹던 시절을 떠올렸다. 눈 내린 겨울 아침, 여물(쇠먹이)을 썰고 나면 나락이 떨어진다. 사방이 눈에 쌓인 고놈들이 그것을 그대로 지나칠 리 없다. 함빡 내려앉는 곳에 채반이나 맷방석을 고이고, 고임대에 새끼줄을 매서 문구멍으로 끌어들인다. 눈치 빠른 놈이라 해도 덫속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못 배긴다. 이때 방안에서 줄을 나꿔채는 촌동(村童)들의 계교엔, 놈들의 꾀인들 도리가 없다. 그런데, 어쩌다 걸려들지 않는 놈이 있어 다시 덫을 놓아보지만, 그때는 이미 이쪽이 어리석은 꼴이 된다.
참새의 꾀에는 옛사람도 혀를 찼다. 큰 놈은 꾀가 많아 아예 잡을 수가 없고, 잡히는 놈은 먹이를 탐내는 새끼참새라고 했다. 먹는 데만 눈을 파는 새끼참새를 비유해서, 공자(孔子)도 후손에게 훈계를 한 글이 보인다. 새끼참새의 속성을 잘 관찰한 교훈이다.
참새는 외양부터 그렇고, 짖는 소리나 몸짓 등에 어수룩한 데라고는 없다. 내 집 곁에서 살면서도, 그토록 눈을 길 수가 없는데, 그러면서도 놈들은 인가(人家)를 멀리 떨어져 살려고는 하지 않는다.
내가 사는 홍은동 일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회의 복판이 되고 말았다. 조금만 벗어나도 살기 좋은 시골이건만, 무얼 바라고 고놈들은 서울 복판에 눌러 사는지 알 수가 없다. 어쩌다 서울에서 살게 된 나처럼, 놈들도 별수 없이 그렇게 됐다는 말인지. 날개를 가지고도 공해 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꼴을 보면, 옮겨만 앉아도 부동산 재미를 보던 세월에, 주변없이 한군데서 15년 동안을 붙박혀 사는 나나 다를 게 없다. 약은 체하면서 살고는 있지만, 고놈이나 나나 헛약은 게 분명하다.
(1980. 4.)
1923년 8월. 휴전선 속 군사분계선 북쪽으로 들어간 경기도(京畿道) 연천군(漣川郡) 왕징면(旺澄面) 기곡리(基谷里) 637번지에서, 아버지 윤상영(尹相榮) 어머니 해주(海州) 최(崔)씨 사이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남. 본명 윤갑병(尹甲炳).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외지로 나돌아, 향교(鄕校)의 直員:지금의 전교(典校)를 지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람.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제(日帝)의 침략전이 가열되어 전쟁터로 끌려가거나 탄광 노무자로 징용당해야 했음.
1944년 연천공립농업실수학교를 나와 경기도 고양군의 국민학교에 취직, 징용을 피함.
1945년 8월. 광복을 맞으나, 분단의 38선으로 이산의 한(恨)이 시작됨.
1946년 12월. 미군정(美軍政)하 좌우익 갈등 속에서, 바른말 한다는 죄로 재판도 없이 구금되었다 풀려나, 부천군으로 이동됨.
1947년 7월. 고향을 찾아 사선(死線)인 38선을 세 번째로 넘었다가 북쪽 경비병에게 잡혀 20일 간 전곡(全谷) 내무서에 구속되었다 풀려남.
1950년 12월. 6·25전쟁에 중공군이 개입. 이에 따라 국민방위군 대원이 되어, 서울서 마산까지 천리길을 걸어 내려감..
1954년. 피난지 대전지역에서 떠돌며, 왕골수예품공장, 농촌의 농삿일, 양계장, 정미소 등에서 노동을 함. 호서 문학회 회원.
1955년 10월. 충북 청원군의 국민학교로 복직.
1958년 5월. 교육언론에 군교육청의 교과서 공급비리를 논한 죄로 영동군 산골로 유배됨.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패로, 교육현장에까지 부정선거가 노골화하던 때임.
1959년 3월. 소설가 정구창(鄭求昌)의 소개로 아내 조정복(趙廷福)을 만나, 함석헌(咸錫憲) 선생 주례로 결혼을 함. 아내의 나이 25세, 본인은 36세. 2남 2녀를 둠.
1961년 6월. 출판사를 그만 두고, 교육잡지를 펴내는 교직단체로 옮김. 특별법인이 된 교직단체(대한교원공제회)의 관리과 책임자로 일함.
1972년. 공화당 시절 정치권력을 업고 들어온 이사장의 비리와 맞서다 관리 과장직에서 쫒겨남.
1978년. 느타리버섯 재배를 시험삼아 해봄.
1979년 1월. 한국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에 「오음실주인(梧陰室主人)」 당선. 이후 수필집 『정신과로 가야할 사람』 『서울뻐꾸기』, 선집 『산마을에 오는 비』 등을 펴냄.
1999년 5월 문고판 선집 "오음실 주인"(선우미디어)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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