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문칼럼)

당집 죽은 대나무의 기억 / 이성복 (시인)

시인 최주식 2010. 1. 25. 23:08

당집 죽은 대나무의 기억 / 이성복 (시인)

  누런 흙빛으로 바래 먼지와 매연을 뒤집어쓰고 사각사각 마른 잎새를 흔드는 죽은 대나무, 근래 몇 년 동안 육체적으로나 정신 적으로나 시로부터 멀리 떠나 있던 사람에게 시는 정확히 그 오갈 데 없는 대나무의 올곧고 깡마른 몸체로 다가온다. 한때 그는 그 붉은 벽돌 이층 양옥, 시의 집에 세 들어 살았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시 혹은 죽은 대나무는 버려졌다. 그렇다고 그의 무관심이 시를 죽였던 것은 아니다. 당집의 대나무처럼 시는 애초부터 죽어 있었다. 하기야 당집을 찾는 절박한 사람들 눈에 그 대나무가 죽은 대나무로 비칠 리 없듯이, 시를 믿는 사람들에게 시의 죽음은 있을 수 없는 사건에 속하는 것이리라.

  분명한 것은 그에게 시는 글 쓰는 사람, 혹은 글 읽는 사람들의 ‘절박함’과 ‘믿음’이라는 두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에서 자라나는 희귀한 식물이라는 점이다. 유사한 희귀식물들의 예는 삶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지만, 시라는 식물의 특성은 한 번도 ‘죽은’ 언어 문자의 영역을 넘어서 자랄 수 없다는 데 있다. 죽어서 비로소 꽃피는 나무, 혹은 우리 사랑하는 이들의 주검에 돋아날 저승꽃,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어느 시대도 시를 죽일 수는 없다. 시는 애초부터 죽어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시의 생명은 사후적(事後的)이며 사후적(死後的)이다. 시는 시가 죽었다는 생각들 이전부터 죽어 있었으며, 시가 죽었다는 생각들 이후 에도 죽어 있을 것이다.

  오늘날 시는 죽었는가, 죽었다면 누가 시를 죽였는가 등속의 질문들이 잇따르는 것은 애초에 시를 살아 있는 어떤 것으로 전제하는 데서 출발한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 물음들은 특정 사회 속에서의 시의 위의, 문화의 여러 영역들 사이에서의 시의 위치 등을 염두에 두고 하는 질문들이리라. 그러나 유독 그에게 그 질문들이 공손하게 들리는 것은 죽음이 곧 시의 본질이라는 뿌리 깊은 생각에서이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여, 만약 시가 극진히 대접받고 숭배 받는 시대가 있다면, 그 시대의 시는 루비와 사파이어로 장식한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모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와 시의 위의는 최초의 형극으로 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데 있다.


  애초에 모든 형극은 최초의 형극이었다. 그가 돌아보건 아니건 형극은 거기 있었고, 그가 살아 있건 아니건 형극은 그의 몫이 었다. 매순간 그의 삶은 형극으로부터의 도피였고, 시는 마지못해 돌아본 형극 앞에서의 순간적인 죽음이었다. 그는 결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이미 보았고, 자기와 남을 괴롭히면서 끝까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거듭 보아야 했다. 어쩌면 그것은 병적인 자 기 학대나 타인을 볼모로 하는 악취미의 한 형태로 여겨질 만하리라. 마치 자기가 짜놓은 여드름 기름기를 오래 바라보거나 자기 손바닥으로 모은 방귀 냄새를 정신없이 맡고 있는 사내의 우스꽝스런 행동처럼. 그렇다, 언제부턴가 시는 그의 환부였다. 문제 는 보다 근본적으로 그 환부가 삶 자신의 것이라는 점에 있다. 

얼마 전부터 떠오른 생각이지만 그에게 시는 가래침 같은 것이었다. 먼지와 매연, 미세한 세균들을 덮어싸고 입 밖으로 올라온 침, 스스로 더러워짐으로써 제 구실을 다 하는…… 시가 우리 삶의 더러운 것들을 기억하고 스스로 더러운 기억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은 삶 자체가 병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시가 삶이라는 병을 치유할 것으로 믿지는 않는다. 그가 확인하는 것은 다만 시는 끊임없이 삶을 소독 혹은 정화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병은 더 깊어지지도, 나아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시의 역할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시의 역할은 삶의 병을 유지시키는 데 있다.

  본질적으로 시는 그에게 헛구역질 같은 것이었다. 토할 수도 없고, 억눌러 삼킬 수도 없는 삶, 시는 칼이었고 칼에 베이는 생 무 흰 섬유질이었다. 시는 헛도는 플라스틱 병마개 같은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미세한 금이 가 있다. 그러나 다시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시라는 병마개가 헛돌기에 삶은 영원히 닫히지 않는 것이다. 결코 만날 수 없는 시와 삶 사이의 그 미세한 거리, 무한히 가냘픈 빛이 새어들어 가는 그 거리만큼이 그에게 희망으로 남았다. 그 희망 때문에 시의 헛구역질은 임박한 출산의 전조로 여겨지는 것일까. 혹시라도 어미 소의 배에서 갓 나온 송아지가 앞발로 땅을 딛고 일어서는 순간의 힘이 시에게는 남아 있을까 .


  한마디로 말해 문자언어에서 형극은 분별지로서 형극 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는 불립문자를 믿지 않는다. 삶이라는 형극은 문자언어와 동시에 포착되며 문자언어에 의해서 구성된다. 문자언어가 나아간 마지막 경계가 삶의 경계이다. 따라서 삶의 경계를 살피는 일을 그 역할로 떠맡는 시는 문자언어로써 문자언어의 경계를 헤아려야 하는 불가능에 도달한다. 도대체 제 눈으로 제 눈을 보는 일이 가능한가. 왼손이 왼손을 때리는 일이 가능한가. 그런 점에서 애초부터 모든 시는 실패한 시에 불과하다. 비유컨대 시는 팬티 입고 똥 누는 일이나 마찬가지로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불가능하다 해서 그만둘 수 없다 는 데 있다.

  그에게 삶은 가능성의 희망까지도 아우른 불가능의 총체이다. 그는 먹고 자고 옷 입고 공부하고 성교한다. 그가 하는 일은 모 두 삶이 그를 통해서 하는 일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삶의 파도는 한순간 그를 통해 지나가지만, 그는 파도가 아니다. 파도의 한순간일 뿐이다. 혹은 삶은 매스게임이 펼쳐지는 운동장에서 차례차례 몸져누웠다가 일어나는 소녀들의 몸을 타고 지나가는 흐름 같은 것이거나, 요즘 가수들이 추는 춤처럼 한쪽 손가락 끝에서 어깨를 타고 목을 넘어 다른 쪽 손가락까지 가는 흐름 같은 것이다. 그 파동은 그를 만나고, 그를 통해, 그를 버리고 지나가지만 그가 없이는 결코 이어질 수 없다. 

 그 냉혹한 사실에 비하면 우리 시대에 시는 죽었는가,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시는 우리를 구할 것인가 등의 질문이 그에게는 일종의 호들갑이나 응석으로 여겨진다. 왜 우리는 애초부터 언어를 통해서는 언어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일까. 어째서 언어에 이용되면서도 언어를 사용한다고 굳게 믿는 것일까. 어쩌면 이같은 맹목이야말로 삶의 파동 이 우리를 지나갈 수 있는 최적 조건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삶이 맹목적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 자신이 맹목적일 뿐이다. 삶 은 한 번도 맹목적이거나, 맹목적이지 않은 적이 없다. 우리가 삶에 눈을 달아주거나 달아주지 않거나 까지도 삶과는 무관한 일일 것이다. 

문제는 ‘믿음’에 있다. 그 점에서 시는 그에게 신앙촌이나 통일교, 옴진리교나 크게 다르지 않다. 끝내 환상이 현실일 수 있다는, 현실이어야 하고, 현실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막무가내의 믿음. “아이, 부끄러워” 하면서 치마를 들어 눈을 가리는 여자아이나, 팬티까지 오는 짧은 치마를 입고 앉아 억지로 치마끝을 끌어내리려 애쓰는 처녀들의 몸짓처럼 시에 대한 믿음은 이미 자기모순에 예정되어 있다. 시 또한 ‘절박함’과 ‘믿음’에 뿌리를 내린 다른 희귀식물들과 마찬가지로 막무가내의 믿음이 돌이킬 수 없는 절박함에 미세한 틈새를 만들어주기를 기다리거나 이미 만들었다고 안도하는 것이 아닐까. 눈병 걸린 자만이 볼 수 있는 헛꽃.

  다시 문제는 ‘믿음’에 있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확인할 수 없는 사실들을 믿을 뿐이다. 확인에 의해 믿음이 부서질지라도 믿음은 언제나 확인 앞에 있다. 삶의 반복체계 너머를 확인할 수 없는 한 믿음은 그 반복체계와 동시에, 함께 있다. 그러므로 삶 과 믿음이라는 영원한 배필은 다시금 독과 약, 떠남과 만남, 어지러움과 다스림 등의 쌍으로 무한히 복제 생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껏 그의 논의는 애초의 출발점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 삶이 끝내 고칠 수 없는 반복의 체계인 한, 삶에 대한 그의 사유는 제자리걸음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제자리걸음은 다시금 그의 믿음 속에서 의미 있는 반복, 즉 ‘변주’로 여겨질 수 있다.

  반복은 철면피하다. 그러나 변주는 살아 있다. 변주는 죽음의 질서인 평행선을 갈라놓는 빗금 같은 것이다. 이제나 저제나 반복은 하나이지만 변주는 병든 눈에 나타나는 헛꽃처럼 순간순간 달라진다. 천변만화의 꽃들이 헛것이라 해서 이쁘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가. 노래 가사의 흉내를 내자면 누가 반복을 아름답다 했는가. 어떤 사물도, 어떤 존재도 이미지의 변주 없이 나타날 수 없다. 이를테면 변주는 그것 없이는 반복의 체계 전체가 드러나 보일 수 없는 ‘푸르른 틈새’ 같은 것이다. 당연히 틈새에서 올라오는 빛은 하늘과 땅의 푸른빛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반복이 없는 변주가 있을까. 언제나 생은 죽음 다음에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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