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앵두, 어떤 녀석이 가져 갔지? | |||||||||||||||||||
[오마이뉴스 2005-05-19 14:49] | |||||||||||||||||||
"우리 엄마가 심심할 때 묵으라고 그랬어요. 어제 우리 앵두 엄청 많이 땄어요. 나는 43개 묵고 우리 형은 37개나 묵었어요…어쩌고저쩌고…미주알 고주알…."
제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 준 어른이 고마웠는지 꼬맹이가 비닐봉지에 고사리 손을 쑥 집어넣더니 앵두 한 줌을 나에게 주었다. 에게게… 고작 다섯 개. 한 입에 털어 넣어도 시원찮을 개수다. 하지만 감지덕지 하는 척 받았다. 전날 나 역시 싱싱한 물앵두를 배터지게 먹었기 때문이다.
지난 일요일, 고춧대 세우러 엄마를 따라 텃밭으로 가다가 문득 앵두나무와 마주쳤다. 난 텃밭으로 가는 그 언덕에 앵두나무가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런데 붉은 앵두로 치장한 나뭇가지 하나가 보란듯이 팔을 뻗어 길을 막았기에 비로소 그곳에 앵두나무가 있었음을 알았다. "물앵두다. 따다가 우리 새끼들 갖다 줘라."
내가 걸음을 멈춘 채 입을 쩍 벌리고 나무를 쳐다보자, 앞서가던 엄마가 돌아보며 말하셨다. 물앵두. 듣고 보니 그랬다. 터질 듯 팽팽한 얇은 껍질 속에 선홍색 감로수가 투명하게 보였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수많은 열매들은 금방이라도 후두둑 소리내며 떨어질 것 같았다.
언덕 위 물앵두나무는 그렇게 불현듯 날 맞이하였다. 가지 사이사이, 잎 사이사이 작은 얼굴 내민 앙증맞은 열매들이 내 손에 닿을 듯 가까웠지만 '얼씨구 좋다'하고 따먹기가 망설여졌다. 제들끼리 얼굴을 부비고 있는 열매들이 봄꽃보다 예뻐 보였기 때문이다.
물앵두 하나를 손으로 집어 닦을 것도 없이 냉큼 입 속으로 넣었다. 단맛과 상큼한 맛이 향기와 어우러져 기분 좋게 입 속에 퍼졌다. 나는 게으른 수탉처럼 나무 밑을 어슬렁거리며 물앵두를 주워 먹었다. 풀 섶에 숨었지만 그 영롱한 빛깔까지 감출 수 없는 물앵두.
올해 첫 과실을 내가 드신 셈이다. 사람 손에 길들여지지 않은, 햇빛에 살 오르고 바람결에 물 올라 저 혼자 열매 맺은 작은 물앵두를 내가 맛본 것이다. 맛과 향기와 빛깔로 유혹하는 그 많은 먹거리를 어떻게 지나칠 수 있나.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후에 고추밭 일을 다 하고 나 홀로 앵두나무를 탔다.
싱싱한 과실을 따서 그 자리에서 바로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총각 때 처녀들과 밀양 딸기밭에 간 이후 실로 오랜만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따다보니 엄마 몫으로 반 바가지, 내 새끼들 몫으로 한 바가지나 땄다. 하지만 시골집을 나설 때, 엄마는 어느새 당신 몫으로 남겨 둔 물앵두를 다른 먹거리들과 함께 내 짐에 넣으셨다.
"맛이 어떠냐?" "참, 좋아요." "어떤 맛 같으냐?" "…." 아들은 쉽사리 그 맛을 표현하지 못했다. 나는 한순간 시적 감흥이 솟았다. 그래서 아이들이 되묻지도 않았는데 그것을 '첫사랑 입맞춤'같은 맛이라고 말해 주었다. 엉겁결에 던진 말이지만 약간 쑥스러웠다. 하지만 사춘기를 눈앞에 둔 아들 녀석이 과장되게 '쾍쾍' 헛구역질을 하는 시늉으로 웃기는 바람에 그 의미가 시들해졌다.
오늘도 제법 바빴다. 아침에 꼬맹이가 건네준 앵두가 퇴근할 때 떠올랐다. 그래서 교사용 책상 이쪽 저쪽을 둘러봤는데 앵두가 없어졌다. 분명히 책상 위 물 컵에 담아 두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앵두가 그 고운 빛깔로 꼬마들을 유혹한 것이 분명하다. 작은 물앵두가 동네처녀들뿐만 아니라 중늙은이와 코흘리개까지 꼼짝 못하게 하는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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