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문칼럼)

앵두

시인 최주식 2010. 1. 25. 23:19

내 앵두, 어떤 녀석이 가져 갔지?
[오마이뉴스 2005-05-19 14:49]
[오마이뉴스 최형식 기자]
▲ 언덕 위에 물앵두 나무
ⓒ2005 최형식
 월요일 아침, 학교일지를 쓰고 있는데 우리 반 꼬맹이가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덜렁덜렁 들어왔다. 나는 단박에 그 내용물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앵두구나!"하였더니 꼬맹이는 쫄랑쫄랑 내 곁으로 와서 비닐봉지를 치켜들어 보이며 자랑하였다.

"우리 엄마가 심심할 때 묵으라고 그랬어요. 어제 우리 앵두 엄청 많이 땄어요. 나는 43개 묵고 우리 형은 37개나 묵었어요…어쩌고저쩌고…미주알 고주알…."

제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 준 어른이 고마웠는지 꼬맹이가 비닐봉지에 고사리 손을 쑥 집어넣더니 앵두 한 줌을 나에게 주었다. 에게게… 고작 다섯 개. 한 입에 털어 넣어도 시원찮을 개수다. 하지만 감지덕지 하는 척 받았다. 전날 나 역시 싱싱한 물앵두를 배터지게 먹었기 때문이다.

 지난 일요일, 고춧대 세우러 엄마를 따라 텃밭으로 가다가 문득 앵두나무와 마주쳤다. 난 텃밭으로 가는 그 언덕에 앵두나무가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런데 붉은 앵두로 치장한 나뭇가지 하나가 보란듯이 팔을 뻗어 길을 막았기에 비로소 그곳에 앵두나무가 있었음을 알았다.

"물앵두다. 따다가 우리 새끼들 갖다 줘라."

 내가 걸음을 멈춘 채 입을 쩍 벌리고 나무를 쳐다보자, 앞서가던 엄마가 돌아보며 말하셨다. 물앵두. 듣고 보니 그랬다. 터질 듯 팽팽한 얇은 껍질 속에 선홍색 감로수가 투명하게 보였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수많은 열매들은 금방이라도 후두둑 소리내며 떨어질 것 같았다.

 언덕 위 물앵두나무는 그렇게 불현듯 날 맞이하였다. 가지 사이사이, 잎 사이사이 작은 얼굴 내민 앙증맞은 열매들이 내 손에 닿을 듯 가까웠지만 '얼씨구 좋다'하고 따먹기가 망설여졌다. 제들끼리 얼굴을 부비고 있는 열매들이 봄꽃보다 예뻐 보였기 때문이다.

 

 
▲ 풀섶에 물앵두 하나
ⓒ2005 최형식
중참 때, 그 앵두나무 밑을 지나다보니 풀밭 여기저기 작은 물앵두가 숨어 반짝거렸다. 봄 햇살 그대로 담은 빛깔과 산들대는 봄바람을 그대로 머금은 것처럼 신선해 보였다. 땅에 떨어진 앵두도 이렇게 가슴 콩닥거리게 하는데 하물며 열여섯 처녀 가슴이야 오죽 할까.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하는 노랫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물앵두 하나를 손으로 집어 닦을 것도 없이 냉큼 입 속으로 넣었다. 단맛과 상큼한 맛이 향기와 어우러져 기분 좋게 입 속에 퍼졌다. 나는 게으른 수탉처럼 나무 밑을 어슬렁거리며 물앵두를 주워 먹었다. 풀 섶에 숨었지만 그 영롱한 빛깔까지 감출 수 없는 물앵두.

올해 첫 과실을 내가 드신 셈이다. 사람 손에 길들여지지 않은, 햇빛에 살 오르고 바람결에 물 올라 저 혼자 열매 맺은 작은 물앵두를 내가 맛본 것이다. 맛과 향기와 빛깔로 유혹하는 그 많은 먹거리를 어떻게 지나칠 수 있나.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후에 고추밭 일을 다 하고 나 홀로 앵두나무를 탔다.

싱싱한 과실을 따서 그 자리에서 바로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총각 때 처녀들과 밀양 딸기밭에 간 이후 실로 오랜만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따다보니 엄마 몫으로 반 바가지, 내 새끼들 몫으로 한 바가지나 땄다. 하지만 시골집을 나설 때, 엄마는 어느새 당신 몫으로 남겨 둔 물앵두를 다른 먹거리들과 함께 내 짐에 넣으셨다.

 

 
▲ 주연 물앵두, 조연 물앵두 이파리
ⓒ2005 최형식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이들과 함께 아내가 씻어 내놓은 물앵두 접시에 둘러앉았다. 눈요기만으로도 황홀한 그것이 참 예뻐서 한 입에 덥석 먹어버리기는 아깝다는 듯 모두 앵두꼭지를 쥐고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오물거리는 아들놈 입술을 흐뭇하게 보며 내가 물었다.

"맛이 어떠냐?"

"참, 좋아요."

"어떤 맛 같으냐?"

"…."

아들은 쉽사리 그 맛을 표현하지 못했다. 나는 한순간 시적 감흥이 솟았다. 그래서 아이들이 되묻지도 않았는데 그것을 '첫사랑 입맞춤'같은 맛이라고 말해 주었다. 엉겁결에 던진 말이지만 약간 쑥스러웠다. 하지만 사춘기를 눈앞에 둔 아들 녀석이 과장되게 '쾍쾍' 헛구역질을 하는 시늉으로 웃기는 바람에 그 의미가 시들해졌다.

 오늘도 제법 바빴다. 아침에 꼬맹이가 건네준 앵두가 퇴근할 때 떠올랐다. 그래서 교사용 책상 이쪽 저쪽을 둘러봤는데 앵두가 없어졌다. 분명히 책상 위 물 컵에 담아 두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앵두가 그 고운 빛깔로 꼬마들을 유혹한 것이 분명하다. 작은 물앵두가 동네처녀들뿐만 아니라 중늙은이와 코흘리개까지 꼼짝 못하게 하는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최형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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