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계단은 잠들지 않는다 외 2편 / 최을원

시인 최주식 2010. 1. 28. 21:49

계단은 잠들지 않는다 외 2편 / 최을원

 


계단은 늘 허기진다 겹겹이 접었던 각진 살의를 반쯤 펼친 채
누군가의 발목을 노리는 저 많은 이빨들
오르가즘을 달려 오르는 가속의 덩어리, 옥상을 지나
난간을 넘어 허공에 던져버리는 거, 던져지는 거
누군가는 순식간에 발목이 잘렸다
언젠가는 한 가족이 몽땅 실려 갔다
사회면마다 계단이 물어뜯은 흔적들, 고시원의
계단엔 주인 잃은 신발들이 지천이다
계단은 어느 곳에도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깊은 山門에도, 웅장한 교회당에도 계단은 자란다 룸살롱
여자의 젖가슴 사이를 지나간다 하여
계단은 아름답다 경건하다 계단을 잃어버린 자들이
복권 판매소 앞이나 경마장 같은 광장 주변을 서성일 때
보험사들의 빌딩은 나날이 키를 키운다
절대의 성실함으로, 무자비한 집요함으로
추락의 마지막 순간까지를 사정의 쾌감으로 바꿔 버리는
그것, 폭식의 밤은 깊다
먹이감들은 바쁘게 몰려들고, 지친 사람들이
자신의 해골을 들고 아득한 계단을 오르는 취몽에 들 때도
도시의 곳곳
화려할수록 어둠 속에 더 깊이 숨어, 번득이는 눈빛,
짐승처럼 은밀히 숨 고르는 소리들     

 

환승(換乘) / 최을원


야산을 오르다 보니 파묘한 자리가 있다
잡풀들이 자라고 개망초꽃, 들국화 몇 송이 피어 있다
들어가 눕자 송장나비들이 자리를 비켜준다
아늑하다이 좋은 곳을 두고 망자는 어디 갔을까
죽어서도 끊임없이 옮겨 다녀야 하는가보다
하늘에는 무덤들이 둥둥 떠간다 쫓겨가고 있다
죄다 서쪽으로만 간다
팔다리를 쫙 펴니, 딱 맞다 이렇게 딱 맞는 곳은
한 번도 없었다 들고 있던 소주병을 밖으로 던지니
매미들은 더 큰 곡소리로 울어대고
새 주인을 아는 양 나비들이 날아든다
머리에 얼굴에, 어떤 놈은 잠 속까지 따라 온다
길들의 가지들이 뚝뚝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몸이 공중부양하는 거 같다 깜박, 깨어나면 낯선 곳,
나도 나를 모르는 아주 낯선 시간대에
거짓말처럼 닿아 있을지 모른다
누군가 저벅저벅, 취생몽사의 이마를 밟으며 곁을 지나친다

 
소파, 부재에 관한 보고 / 최을원

 

사내의 집은 소파다 소파에서 출근해서 소파로 퇴근한다
휴일, 그는 낯선 도시의 발도장이다
대문 앞에는 도장자국 투성이다
동네를 몇 바퀴 더 소주병처럼 굴러 다녀야 출근부가 접힌다
소파는 밤새 사막이요 광장이요 자궁이다
취한 꿈속에서 늘 사막의 여우를 만나지만
여우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다
어젯밤 그는 가로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빛에 갇힌 물음표들, 그 작은 날개의 파닥거림이
그는 퍼뜻 무서워졌고, 소파를 떠올렸고
가능한 멀리 달아나야 한다고 믿었다
오늘도 소파에서 일어난 그는 새벽을 나선다
헛구역질하는 골목도 그를 눈치 채지 못한다
엄마 여기 누가 자, 외쳤던 어린 딸도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그 집에는 그녀도 없다 없는 그녀가 식탁을 차리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 친구 또는 애인을 만나거나
그 소파에서 케이블채널을 돌린다 그 여자는 영화광이다
한 편을 끝까지 감상한 적은 없다 가끔씩 깨어
아무도 없네 두리번거리다 다시 잠든다
거대한 강낭콩 줄기가 소파를 뚫고 지붕을 뚫고
끝없이 하늘 오르는 장면이 자주 상연되는 꿈속엔
넓은 잎새의 초록이 싱그럽다
오늘은 맑은 날, 그녀는 모텔을 되돌아 본다
그녀는 영원을 믿지 않는다 가고 싶다
꼭 한 번만 돌아가고 싶다 무심코 중얼거리자
맑은 하늘 빼곡이 초록의 잎새가 드리워 진다
건물들의 윤곽이 탁 풀리자, 그녀는 깔깔깔 웃는다

 

그 집은 오늘도 부재다
아이들은 혼자 먹는 밥에 다들 익숙하다
거실의 어둠 속에 소파가 떠있다
없는 집에서 없는 사람들을 기다린다
누가 좀 저 불을 켜주었으면, 소파 혼자 간절히 생각하는
창밖
어긋난 별들이 영원의 궤도를 도는 중이다

 

 


                                                                              최을원 시인

 

                                           경북 예천 출생

                                           성균관대학교 국문과 졸업

                                           2002년 <문학사상> 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