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벌레 환상 / 김백겸

시인 최주식 2010. 1. 28. 22:04

벌레 환상 / 김백겸
 
세금고지서가 배달되었다
인쇄된 벌레들이 내 지갑을 갉아먹었다
시집이 저자의 사인과 함께 배달되었다
책 속에서 대오를 정비한 벌레들이 내 사유와 감정을 뜯어먹었다
이메일에 연구소의 공지사항과 현안문제가 배달되었다
전기를 먹은 벌레들이 눈으로 기어 들어와
뇌 속 신경회로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몸이 벌레의 횡포에 반역을 일으켰다
벌레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거부하고 벌레의 관심을 경멸했다
벌레의 도움 없이 홀로 살아갈 자유를 꿈꾸었다
벌레가 없는 사막으로 들어가 하늘과 땅의 기운으로
몸을 부양하고자 했다
벌레보다 현명한 지혜와 깨달음으로
벌레의 도움 없이 바벨탑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벌레가 이룩한 기표의 제국, 문명의 감옥에서는
벌레들이 설치한 감시카메라가 하늘의 별처럼 총총했다

벌레들이 권력과 성과 명예의 이름을 보여주었다
벌레들이 불멸의 진리를 보여주기도 했다
벌레들이 빛나는 금강벌레가 되어
환상의 새끼를 낳고 또 낳았다

 

캄캄한 어둠에서 일어나니 내 어머니는 바로 벌레
시간의 자궁에서 탯줄을 끊었을 때
배고파 떠나갈 듯 울던 내 정신에 젖꼭지를 물린 존재는 바로 벌레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내 눈을 들여다보고 문화의 요람으로
데리고 간 팔은 바로 벌레
죽어야만 벌레로부터 벗어난다고 가르쳐준 것도 바로 벌레
 

 시집 <비밀정원> 2008. 천년의시작

 

 

 

   

 

           김백겸 시인


대전 출생.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비를 주제로 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산 하나> <북소리> <비밀 방>, 무크 <시와인식> <비밀정원>
<화요문학> 주간.
계간 <문학마당> <시선> 편집자문위원.
한국작가회의 대전.충남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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