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천재 동백꽃 외 3편 / 김영남
눈 내려 쌓이니
여기 동백꽃에는 상처가 보인다
띄엄띄엄하고 선명한
그런데 이 상처들은 유정란일까
품고 있으니 금세 부화를 시작한다
상처의 내용과 결과도 다 껍질을 깨고 나온다
거기에서 내 외할아버지가 걸어나온다
보름밤에 끌려나간 외할아버지 맨발의 상처가
땅에 눈 소복이 쌓이니 보인다
대밭에 풍랑이 일면 또 그 상처들이
쓰리고 아프게 시달리는 것도
그러다가 눈 위에 툭 툭 떨어지는 것도
자, 이제 난 꽹과리채를 잡아라
저 동백꽃 수효만큼 붉은 쇳소리도
여기 눈 위에다 어지럽게 남겨보자
<시와 상상, 2008년 봄호>
앵강만 일출 / 김영남
파도가 내게 들어와
꽉 조인 나사를 하나씩 빼내기 시작하네요
빼서 멀리 던져버리고 구석마다 기름을 칠해주네요
생각도 잘 돌아가 난 금세 명랑해지고
고맙다고
앵강만을 한번 쓰다듬어보네요
밤늦게까지 민박집에서 함께 놀다가
새벽녘 다랭이논에 나가
모내기 하는 앵강만을
데려와 씻겨 벗겨 눕혀보네요
그러면 곧 거친 숨을 몰아쉬고
뒤척뒤척하다가 일어나
날 음탕하게 깨워놓기도 하고
철부덕철부덕하는 소리들을 창밖에다 쌓기도 하고
혼자 감당할 수 없어 나는
아침 일찍 앵강만에게
내 친구 한 명을 더 소개시켜주겠다고 약속해보네요
그랬더니 그녀가 얼굴을 갑자기 붉혀오네요
그녀의 부끄러움으로
바다도, 다랭이마을 골목도 먼 훗날까지 행복해지고
<시와상상, 2008 봄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瓷象嵌雲鶴文梅甁) / 김영남
저 병의 학을 타고
올라가보면 알리라
배를 띄워보면
부상하지 않으면 너의 불량이고
흔들리지 않으면 나의 불량이다
칠량 대구의 하늘이니
더 이상 돌아가 안길 고향도 없고나
친구여, 우리 모두 그런 기슭으로 한번 올라가보자
그런데 청자란 얼마나 깊은 남도의 하늘이고
상감이란 또 얼마나 외로운 강진의 들길이더냐
눈 감으면 산, 또 산
재 넘으면 골짜기 마다 자욱한 가마 연기
이제 나는 몇 도의 환원염으로
저 사당리 대숲에 이는 풍랑을 반영해볼 것인가
품을 이야기는 양각인가, 음각인가
정수사에 들러 도공들 위패를 쓰다듬고
봉대산 위에서 내려다본 마량항
비색이란
여기 바다와 함께 깊은 목청 다듬어 온
강진만이 건네는 귓속말이네
무명 도공 아낙들이 닦아세운 푸른 밤이네
< 시로 여는 세상, 2008년 봄호>
벼랑 위 소나무 내게 끌어들여 / 김영남
저 절벽은
저비용 고효율 홍보전략이다
갈매기와의 제휴마케팅!
나는 지금 고급 메타포를 배우고 있다
절벽 경영학과 함께
그런데 좋은 메타포란 얼마나 높은 곳의 새알이며
잘 못 짚으면 또 얼마나 위험한 낭떠러지냐
경영학에 메타포가 융합되니
섬은 정말 장엄하다. 위태롭기까지 한
제스처가 숨어있다
나도 괴춤에서 해오라기 한 마리를 꺼내
머리 위에 올려놓고 움직이는 제스처로 서 본다
그러나 나의 제스처는 왜 이리 뭉툭한 호소력일까
갈매기들도 못 본체하며 날아가버린다
여기 벼랑에선 해오라기가 한계생산체감물이다
물질하는 가마우지 앞세워 새로운 자세 닦다보니
바다가 더 넓고 깊게 다가온다
세상도 늦게까지 황홀한 메타포에 젖는다
그렇구나, 여기에선 또 가마우지기가 한계생산체증물이다
나는 경제학까지 공부하면서 꿈꾸고 또 꿈꾼다
저 절벽이면서 절벽 아닌 것들과의 제휴마케팅을
<현대문학 2007. 8월호>
김영남 시인
1957년 전남 장흥출생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및 같은 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 <정동진역>이 당선.
시집 <정동진역> <모슬포 사랑> <푸른 밤의 여로>
소설가 이청준, 화가 김선두와 함께 고향을 소재로 한 시, 소설 화집 <옥색 바다 이불 삼아 진달래꽃 베고 누워>
중앙대학교 기획조정실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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