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장천재 동백꽃 외 3편 / 김영남

시인 최주식 2010. 1. 28. 22:32

장천재 동백꽃 외 3편 / 김영남 

 

 

눈 내려 쌓이니

여기 동백꽃에는 상처가 보인다

띄엄띄엄하고 선명한

 

그런데 이 상처들은 유정란일까

품고 있으니 금세 부화를 시작한다

상처의 내용과 결과도 다 껍질을 깨고 나온다

 

거기에서 내 외할아버지가 걸어나온다

보름밤에 끌려나간 외할아버지 맨발의 상처가

땅에 눈 소복이 쌓이니 보인다

대밭에 풍랑이 일면 또 그 상처들이

쓰리고 아프게 시달리는 것도

그러다가 눈 위에 툭 툭 떨어지는 것도

 

자, 이제 난 꽹과리채를 잡아라

저 동백꽃 수효만큼 붉은 쇳소리도

여기 눈 위에다 어지럽게 남겨보자

 

<시와 상상, 2008년 봄호>

 

 

 

  앵강만 일출 / 김영남

 

파도가 내게 들어와

꽉 조인 나사를 하나씩 빼내기 시작하네요

빼서 멀리 던져버리고 구석마다 기름을 칠해주네요

생각도 잘 돌아가 난 금세 명랑해지고

 

고맙다고

앵강만을 한번 쓰다듬어보네요

밤늦게까지 민박집에서 함께 놀다가

새벽녘 다랭이논에 나가

모내기 하는 앵강만을

데려와 씻겨 벗겨 눕혀보네요

그러면 곧 거친 숨을 몰아쉬고

뒤척뒤척하다가 일어나

날 음탕하게 깨워놓기도 하고

철부덕철부덕하는 소리들을 창밖에다 쌓기도 하고

 

혼자 감당할 수 없어 나는

아침 일찍 앵강만에게

내 친구 한 명을 더 소개시켜주겠다고 약속해보네요

그랬더니 그녀가 얼굴을 갑자기 붉혀오네요

그녀의 부끄러움으로

바다도, 다랭이마을 골목도 먼 훗날까지 행복해지고

 

<시와상상, 2008 봄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瓷象嵌雲鶴文梅甁) / 김영남

 

저 병의 학을 타고

올라가보면 알리라

배를 띄워보면

 

부상하지 않으면 너의 불량이고

흔들리지 않으면 나의 불량이다

칠량 대구의 하늘이니

더 이상 돌아가 안길 고향도 없고나

 

친구여, 우리 모두 그런 기슭으로 한번 올라가보자

그런데 청자란 얼마나 깊은 남도의 하늘이고

상감이란 또 얼마나 외로운 강진의 들길이더냐

눈 감으면 산, 또 산

재 넘으면 골짜기 마다 자욱한 가마 연기

 

이제 나는 몇 도의 환원염으로

저 사당리 대숲에 이는 풍랑을 반영해볼 것인가

품을 이야기는 양각인가, 음각인가

 

정수사에 들러 도공들 위패를 쓰다듬고

봉대산 위에서 내려다본 마량항

 

비색이란

여기 바다와 함께 깊은 목청 다듬어 온

강진만이 건네는 귓속말이네

무명 도공 아낙들이 닦아세운 푸른 밤이네

 

< 시로 여는 세상, 2008년 봄호>

 

 

 

  벼랑 위 소나무 내게 끌어들여 / 김영남

 

저 절벽은

저비용 고효율 홍보전략이다

갈매기와의 제휴마케팅!

 

나는 지금 고급 메타포를 배우고 있다

절벽 경영학과 함께

그런데 좋은 메타포란 얼마나 높은 곳의 새알이며

잘 못 짚으면 또 얼마나 위험한 낭떠러지냐

 

경영학에 메타포가 융합되니

섬은 정말 장엄하다. 위태롭기까지 한

제스처가 숨어있다

 

나도 괴춤에서 해오라기 한 마리를 꺼내

머리 위에 올려놓고 움직이는 제스처로 서 본다

그러나 나의 제스처는 왜 이리 뭉툭한 호소력일까

갈매기들도 못 본체하며 날아가버린다

여기 벼랑에선 해오라기가 한계생산체감물이다

 

물질하는 가마우지 앞세워 새로운 자세 닦다보니

바다가 더 넓고 깊게 다가온다

세상도 늦게까지 황홀한 메타포에 젖는다

그렇구나, 여기에선 또 가마우지기가 한계생산체증물이다

 

나는 경제학까지 공부하면서 꿈꾸고 또 꿈꾼다

저 절벽이면서 절벽 아닌 것들과의 제휴마케팅을

  

 <현대문학 2007. 8월호>

 

 

 김영남 시인

 

1957년 전남 장흥출생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및 같은 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 <정동진역>이 당선.

시집 <정동진역> <모슬포 사랑> <푸른 밤의 여로>
소설가 이청준, 화가 김선두와 함께 고향을 소재로 한 시, 소설 화집 <옥색 바다 이불 삼아 진달래꽃 베고 누워>  

중앙대학교 기획조정실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