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산수유 아래서 징소리를 외 1편 / 김길나

시인 최주식 2010. 1. 28. 22:35

산수유 아래서 징소리를 외 1편  / 김길나

 

 

  그녀의 맨발을 만져보고 싶었으나
  그녀는 일찍이 땅 속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묻힌 흙에서 빠끔히 떡잎이 눈 뜨고
  떡잎에 숨은 길 한 가닥이 불쑥 일어나
  줄기는 허공을 주욱 찢어 올리고
  가지들은 또 낭창낭창 허공을 건드리고
  허(虛)를 찔린 허공이 여기저기서 째지고
  째진 공(空)의 틈새에서 얼굴 하나씩이 피어나고
  이렇게 수많은 그녀가 그녀의 맨발에서 솟아났다

 

 파르르 떨리는 허공의 틈새마다에서
 울려나오는 저 소리는 번쩍이는 징소리
 그리고 연달아 징을 치는 쟁쟁한 해 뭉치
 공을 트고 나온 얼굴들을 푸르게 두들겨 펴는……

 

 

소란한 수화 / 김길나

소리 이전의 고요를
아득한 고요를 머금은 귀,

그 귀 아래서 춤으로 흘러나오는
물처럼 부드러운 수화를
햇빛 속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런데 오늘은 달리는 전동차 안에서
그지없이 소란한 수화를 듣는다

뚜껑 닫힌 허공을 빠르게 휘젓고
던지는 공기들이 자지러지는 소리
성대를 잠근 남루한 침묵이 징판에 머리를 치받고
우르릉 갇힌 울분을 터뜨리는 소리
농아의 세월, 그 긴긴 밤을 몰아 영혼의 희고
검은 건반을 줄곧 소낙비로 두둘겨온 저 상기된 손가락
그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말이 말을 찢고
갈가리 너풀거리는 소리, 결국

말을 죽이기 위해 세상의 모든 말을 손가락으로

건져올려 요리조리 찌르고 자르는 소리,
세상의 여린 詩들이 저 손끝에서 으깨져
희멀건 국물로 흘러내리는 소리


말하는 이들의 말못할 격정 몇 가닥이
수화 곁으로 다가오고 말못할 비애가 수화의

비애에 엉겨 붙어 요동치는 사이, 나는 그만
전동차 안에서 하차할 정류장을 잊고 말았다.

 

 

 

         시집 <홀소리 여행> 서정시학

 

 

       김길나 시인

 

          전남 순천 출생

          1995년 시집 <새벽날개>를 상자하면서 시단에 나옴

          1997년 시집  <빠지지 않는 반지>문학과지성사

          2003년 <둥근 밀떡에 뜨는 해>문학과지성사

          2008년 <홀소리 여행> 서정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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