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기억력 / 이정란
책장에 온갖 책을 넣고 긴 세월을 함께 지냈다
층층이 올린 짐을 잘 버텨주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책장이 내쉬는 나무의 숨소리를 들었다
조용한 그 소리는 깊은 산 속에서 빗소리와 햇빛에 감응하고 절망을 글썽이던 잎과 줄기의 기억에 가 닿게 하였다
결 사이에 압축되어 있는 바람과 하늘
옹이에서 빛나는 마음눈도 보았다
애초 마음을 끌었던 빛깔과 향이 새를 위해 어깨를 내주었던 품새라는 걸 뒤늦게 알고 한동안 숲에 잠겨 있었다
숲을 놓지 않는 나무의 기억력이 무거움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
나뭇가지 위에서 죽어간 새가 콕콕, 마음눈을 아프게 쫀다
시집 <나무의 기억력> 2008. 종려나무
이정란 시인
서울 출생. 1999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어둠ㆍ흑맥주가 있는 카페》, 《나무의 기억력》
에세이집 《사랑하는 날 아침에는》 《간이역 풍경》 《시비로 만나는 아름다운 시》《고운 말과 바른 글 여행》 등.
현재 중앙대 예술대학원 재학, 계간 시지 《詩로 여는 세상》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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