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선풍기를 위하여 / 엄원태
고모님께서 한 십년 쓰시다가
미국 이민 가시면서 물려주신 일제 산요 선풍기가
우리집에 온지도 이십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해마다 여름 맞아 이놈을 꺼낼 때마다
속초 처가 진돗개 진희를 겹쳐보게 됩니다
새끼들 쑥쑥 잘 낳아 퍼뜨리며 한 이십 년 가까이 잘 늙어
웬만한 사람보다 속 깊던
진희의 무심한 듯 검고 깊은 표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진희처럼 새끼들을 낳지는 못했지만
이젠 이놈도 생을 다해 가는 건지
철사로 된 얼굴에서 세월과 존재의 섭리랄까
일생이라는 것의 한 심연을 언뜻 드러내 보입니다
이젠 바로 일번을 누르면 이놈이
금세 돌아가지 않고 그으응, 하고 신음소릴 냅니다
살살 다뤄달라고, 말을 하게 된 게지요
목덜미의 꼭지를 뽑으면 목이 돌아가야 하는데
디스크라도 걸렸는지 관절 더덕거리는 소리만 내면서
오십견은 내 목덜미며 어깨처럼 삐딱하거나
제멋대로 돌다 서다 하면서 고집을 피웁니다
한번씩 얼굴을 가린 철망을 변검술처럼 훌러덩 벗어버릴 때도 있어
가족들을 놀라게 할 때도 있습니다
이쯤 되면 비록 생명 없는 이놈의 물건이지만
이름 하나 붙여줘야 하는 건 아닌지요
시집 <물방울 무덤> 2007년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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