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 외 1편 / 조정인
다 해진 무릎걸음으로, 나무는 그렇게 겨울을 건넜으리라
그의 메마른 몸을 지날 때 벌어진 손톱 같은 수피 틈으로
그을음이 새어나왔다 숯을 구워 물을 덥히거나 알을 품거나
알이 깨지고 흰, 빛의 부리들이 허공을 두드린다 허공이 한 겹
비릿한 껍질을 벗는다 무섭도록 새들의 환영을 들어앉힌,
목련의 아프락사스는 어디에 있나 기껏 누더기 탁발승으로나 내몰린
낙화를 비켜 딛지 못한 날
꽃잎이 불어간다 부르튼 입술로 흙에 입을 맞춘다 고양이가
쓰레기봉지를 뜯다가 차 밑으로 몸을 숨긴다 바닥에 라면발이 흘러 있다
어둠 속에서 겁먹은 허기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살핀다
미안하구나, 번뜩이는 찰나에 마쳐야하는 식사를 멈추게 한 나는,
오늘도 아무에게나 손 내밀어 구걸했고 분노했고 치졸했고 외로웠단다
미안하구나, 지상에서 가장 순결한 입맞춤과 비명 같은 식사를 훼손한 나는,
붉었던 기억 / 조정인 암전, 이 어둠의 水源은 어디인가 수문이 열리고 어둠이 덮쳐왔다 석류사세요, 누군가 이 밤의 끄트머리에 간신히 표류중이다 더듬더듬 석류를 주고받았다 여자가 웃어보인다 이빨이 희다 여자의 ‘석류’는 모음과 자음이 잔뜩 녹슬어 있다 이란 산이라던, 칼끝을 넣어 뻑뻑하게 열고 들어간 석류가 길게 신음을 토해낸다 칼이 지나간 단면에 석양이 방울진다 한 점 석양을 집어 입에 대자 아흐, 온몸 터럭이 쭈뼛 일어서 손을 밀친다 도마 위에 퍼들퍼들 창궐하는, 살아서, 헐떡이는… 다시 봉합할 수 없는, 술탄의 비단 잠자리에 검정 배암처럼 스미던 천일의 아씨들 심장을 닮은 실과 아비와 오라비의 손아귀에 끌려 누가 석류나무 아래 머리채를 묻기라도 한 걸까 수유역 뒷길, 밤의 차도르 속에 검게 빛나던 눈동자 이국의 여자와 매음하듯 건네받은 너는, 붉었다 <다시올문학 > 2008.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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