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홍어 / 신정민

시인 최주식 2010. 1. 29. 23:28

홍어 / 신정민

 

말이 좋아 삭힌 거고 숙성이지 결국은 조금 상한 것 아니겠는가

시들어 꽃답고 늙어 사람답고 막다른 골목이 길답고

 

깨어 헛것일 때 꿈답던 꿈

우리의 한 시절은 모두 비非철에 이루어진다

 

냉동실에 안치된 채 구천을 떠돌고 있는 박봉규씨만 봐도 그렇다

노점공구상 그가 폭력적인 단속에 항의하다 분신, 목숨을 잃자

사람들은 그를 열사라 불렀다 우리 모두 열사가 될 수 있는 시대

 

그는 추리소설의 시작처럼 죽었고 덕분에 살아남은 우리들이 판을 쳤다

 

어둠아, 사람만큼 상한 영혼을 가진 물건이 어딨더냐

죽을똥 살똥 살아도 허구헌 날, 그날이 그날인 사람아

 

오발탄 / 신정민

 

203호에 이사온 그는 총잡이다

그가 쓰는 권총의 방아쇠는

손가락이 아닌 구둣발로 잡아당긴다

문 열어! 탕, 탕, 탕

열리지 않는 문을 향해 쏜 총성은

그의 마누라 귀에만 날아가 박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출입구를 같이 쓰는 열 세대의 모든 귀에 날아가 박힌다

귀를 관통한 총알은

벽에 부딪혀 어지럽게 튕겨나와

아이들의 인형을 쓰러뜨리고

거울을 깨부수고

담뱃재 수북한 재떨이를 날려버릴 것이다

왜 안 열어, 빨리 열란 말이야! 탕, 탕, 탕

이불을 뒤집어쓰고

벽을 향해 돌아눕고

꾸던 꿈을 마저 꾸기 위해 눈을 감는 밤

시끄럽다고, 잠 좀 자자고

방아쇠가 입에 달린 105호 남자, 한 소리 지를 법도 한데

어째 조용하기만 한 밤

총성과 총성사이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깊고 고요한지

드나드는 사람 뻔한 비둘기 맨션

한 번도 본적 없는 203호 사람들

제발 열어, 열란 말이야! 탕, 탕, 탕

들리지 않는 새벽의 총성에

끝내 문은 열리지 않는다

 

맨 처음 / 신정민

 

사과는

사과꽃에 앉은 별의 더듬이가

맨 처음 닿은 곳에서 썩기 시작한다

바람이 스쳐간 곳,

햇볕이 드나들며 단맛이 돌기 시작한 곳,

맨 처음 빗방울이 떨어진 곳,

사과는

먼 기찻길에서 들려온 기적소리,

사과의 귀가 맨 처음 열린 곳에서 썩기 시작한다

 

익어가는 거야,

 

씨앗을 품고 붉어지기 시작한 곳에서

사과는 썩기 시작한다

썩고 있는 체온으로 벌레를 키워

몸 밖으로의 비행을 꿈꾼다

온 힘을 다해 썩은 사과는

비로소 사과가 된다

 

/ 신정민

 

깊은 바다 어딘가에

해를 만드는 대장간이 있다

울렁이는 파도거죽을 들추면

쇳덩이 두들기는 메질소리

불이 괄하게 핀 화덕속에서

방금 꺼낸 시뻘건 쇳덩이 모루에 놓고

어둠 두둘기는 소리 들린다

쩍쩍 금이 가려는 해

풋울음 멈추고 제 울음 찾아 올 때까지

둥근 가장자리 반반해지도록 딤금질한다

맞을만큼 맞아야 빛나는 해

곰망치로 햇살을 편다

단쇠 냄새 뒤엉킨 풀무소리 그치면

나이테를 새긴 방짜해가

수평선 위로 쑤욱 떠오른다

감은 눈에도 새벽은 그렇게 온다 

 

 

안녕 블라디보스톡 / 신정민

 

혼자서 밤길을 걷는다는 것은

시든 베고니아 꽃보다 슬픈 것

 

보드카로 달래보는 추위는 사랑을 견딜 수 없게 하고

팔짱을 끼고 걷는 어둠은 떠나 버린 연인을 더욱 그립게 한다

 

사랑보다 이기적인 것은 없더라

연인을 좀 더 생각하다 가겠으니 시간 먼저 가라던 노래

 

낯선 곳에 묻어두고 오겠다던 이름아

맹세는 늘 어긋나더라

 

가슴 안 가슴을 가진 러시아 인형들아

영혼은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말 사실이더냐

 

카페 앞을 서성대던 처녀들이 콜택시를 타고 사라질 때

지상에 닿지 못한 별빛 아래 무표정한 누이보다 쓸쓸해서

시린 손끝에 입김을 불어본다

 

타향아 , 나 잠시 다녀간다

성냥불 같은 이 순간들이 꺼지면

바다 끝에 누가 서있는지 나, 더 이상 묻지 않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