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 / 신정민
말이 좋아 삭힌 거고 숙성이지 결국은 조금 상한 것 아니겠는가
시들어 꽃답고 늙어 사람답고 막다른 골목이 길답고
깨어 헛것일 때 꿈답던 꿈
우리의 한 시절은 모두 비非철에 이루어진다
냉동실에 안치된 채 구천을 떠돌고 있는 박봉규씨만 봐도 그렇다
노점공구상 그가 폭력적인 단속에 항의하다 분신, 목숨을 잃자
사람들은 그를 열사라 불렀다 우리 모두 열사가 될 수 있는 시대
그는 추리소설의 시작처럼 죽었고 덕분에 살아남은 우리들이 판을 쳤다
어둠아, 사람만큼 상한 영혼을 가진 물건이 어딨더냐
죽을똥 살똥 살아도 허구헌 날, 그날이 그날인 사람아
오발탄 / 신정민
203호에 이사온 그는 총잡이다 그가 쓰는 권총의 방아쇠는 손가락이 아닌 구둣발로 잡아당긴다 문 열어! 탕, 탕, 탕 열리지 않는 문을 향해 쏜 총성은 그의 마누라 귀에만 날아가 박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출입구를 같이 쓰는 열 세대의 모든 귀에 날아가 박힌다 귀를 관통한 총알은 벽에 부딪혀 어지럽게 튕겨나와 아이들의 인형을 쓰러뜨리고 거울을 깨부수고 담뱃재 수북한 재떨이를 날려버릴 것이다 왜 안 열어, 빨리 열란 말이야! 탕, 탕, 탕 이불을 뒤집어쓰고 벽을 향해 돌아눕고 꾸던 꿈을 마저 꾸기 위해 눈을 감는 밤 시끄럽다고, 잠 좀 자자고 방아쇠가 입에 달린 105호 남자, 한 소리 지를 법도 한데 어째 조용하기만 한 밤 총성과 총성사이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깊고 고요한지 드나드는 사람 뻔한 비둘기 맨션 한 번도 본적 없는 203호 사람들 제발 열어, 열란 말이야! 탕, 탕, 탕 들리지 않는 새벽의 총성에 끝내 문은 열리지 않는다 맨 처음 / 신정민
사과는 사과꽃에 앉은 별의 더듬이가 맨 처음 닿은 곳에서 썩기 시작한다 바람이 스쳐간 곳, 햇볕이 드나들며 단맛이 돌기 시작한 곳, 맨 처음 빗방울이 떨어진 곳, 사과는 먼 기찻길에서 들려온 기적소리, 사과의 귀가 맨 처음 열린 곳에서 썩기 시작한다
익어가는 거야,
씨앗을 품고 붉어지기 시작한 곳에서 사과는 썩기 시작한다 썩고 있는 체온으로 벌레를 키워 몸 밖으로의 비행을 꿈꾼다 온 힘을 다해 썩은 사과는 비로소 사과가 된다 해 / 신정민
깊은 바다 어딘가에 해를 만드는 대장간이 있다 울렁이는 파도거죽을 들추면 쇳덩이 두들기는 메질소리 불이 괄하게 핀 화덕속에서 방금 꺼낸 시뻘건 쇳덩이 모루에 놓고 어둠 두둘기는 소리 들린다 쩍쩍 금이 가려는 해 풋울음 멈추고 제 울음 찾아 올 때까지 둥근 가장자리 반반해지도록 딤금질한다 맞을만큼 맞아야 빛나는 해 곰망치로 햇살을 편다 단쇠 냄새 뒤엉킨 풀무소리 그치면 나이테를 새긴 방짜해가 수평선 위로 쑤욱 떠오른다 감은 눈에도 새벽은 그렇게 온다
안녕 블라디보스톡 / 신정민
혼자서 밤길을 걷는다는 것은 시든 베고니아 꽃보다 슬픈 것
보드카로 달래보는 추위는 사랑을 견딜 수 없게 하고 팔짱을 끼고 걷는 어둠은 떠나 버린 연인을 더욱 그립게 한다
사랑보다 이기적인 것은 없더라 연인을 좀 더 생각하다 가겠으니 시간 먼저 가라던 노래
낯선 곳에 묻어두고 오겠다던 이름아 맹세는 늘 어긋나더라
가슴 안 가슴을 가진 러시아 인형들아 영혼은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말 사실이더냐
카페 앞을 서성대던 처녀들이 콜택시를 타고 사라질 때 지상에 닿지 못한 별빛 아래 무표정한 누이보다 쓸쓸해서 시린 손끝에 입김을 불어본다 타향아 , 나 잠시 다녀간다 성냥불 같은 이 순간들이 꺼지면 바다 끝에 누가 서있는지 나, 더 이상 묻지 않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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