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것 / 노준옥
내게는 왼쪽 귀를 앓는 아들과 불면증이 있는 남편이 있다. 정신병원에서 약을 타 먹어야하는 어머니가 있고 이혼의 위기에 처한 동생이 있다. 내게는 부도가 나고 택시기사가 된 오빠가 있고 어릴 때 집을 나가 소식 없는 소아마비의 언니가 있다. 나를 건너간 숱한 연인들 대신 내게는 하루종일 나의 전화만을 기다리며 애태우는 싱싱한 젊은 애인들이 있다. 나를 친구로 등록한 아홉 명의 채팅클럽 팬들과 내가 친구로 지명한 세 명의 친구가 있다.
내게는 적막한 세상 한 끝으로 달려가 영영 숨어버리고 싶은 돌아오고 싶지 않은 강렬한 유혹이 있다. 18시간을 날아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할 비상금이 든 자유저축 예금 통장이 있다. 내게는 망치로 잘게 부순 듯 가루가 되어버린 몹쓸 기억이 있고 불륜에 대한 알 수 없는 강박관념이 있다. 신호등 앞에서 어딘지 갈 바를 모르는 추위에 겹쳐 신은 <천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추억>이 있다. 누구는 어미를 잃어버린 거미새끼를 보고 안쓰러이 쓸어내며 눈물지었다는데 내게는 나를 담금질해버린 나를 말없이 쓸어 내버린 비디오가 있다. 단막극이 있다.
내게는 길지도 않는 팔을 둘러 스스로 내 몸을 껴안아 보는 숭스런 자기연민이 있다. 개구리로 살며 창창한 푸른 하늘만이 전부였던 돌멩이로 메워버린 깊은 우물의 신음소리가 있다. 나의 하루를 몰래 카메라로 훔쳐보며 키득거릴 또 다른 내가 있고 통쾌해서 박수를 치다가 가여워 눈물을 흘리는 또 다른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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