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토란잎 / 송찬호

시인 최주식 2010. 2. 2. 21:54

/ 송찬호
                                  

  나는, 또르르르……물방울이 굴러가 모이는 토란잎 한가운데, 물방울 마을에 산다 마을 뒤로는 달팽이 기도원으로 올라가는 작은 언덕길이 있고 마을 동남쪽 해뜨는 곳 토란잎 끝에 청개구리 청소년수련원의 번지점프 도약대가 있다

 

  토란잎은 비바람에 뒤집혀진 우산을 닮았다 그래도 토란잎 대궁 아래 서면 비가림 정도는 충분하다 한번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던 군인이 하늘에서 길을 잃고 토란잎에 착지한 적 있다 나는 그와 함께 초록뱀이 짧게 발등을 스치고 지나간 청춘의 오솔길에 대해 오래 이야기하였다

  바람이 없어도 때로 토란잎은 온몸을 흔들며 경련을 한다 어디든 삶의 격절과 단층은 있는가보다 그럴 때마다 물방울들은 의자나 기둥에 매달려 떨며 흔들리며 몹시 아프다

 

 지난 여름 소나기가 토란잎을 두드려 드럼을 연주하는 가설무대가 선 적 있다 한 달간 소나기가 계속되었고 그 다음 한 달은 폭염이 세상을 지배했다 빗속 천둥과 번개가 토란잎 위에서 뒹굴었고 그 다음 전라의 젊은 남녀가 태양을 피해 토란잎 그늘로 뛰어들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을 한껏 치장하는 앵무새의 혀, 사자의 갈기, 원숭이의 다이아몬드 꼬리, 잉어의 수염 등은 한낱 삶의 가면에 불과하다

 

  그리고 지난 여름, 토란잎을 둘러싼 탱자나무 울타리에 커다란 해일이 일었다 그러나 어떠한 사소한 뉴스도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를 뚫고 넘어오지 못했다 다만, 아무도 다치지  않은 채 오직 탱자나무 가시만 홀로 아팠다 그러고 훌쩍, 여름은 지나갔다

 

  언제나, 물방울들은 토란잎 한가운데 모여 합창을 한다 또르르르 또르르르 쉬임없는 물방울들의 합창 또르르르 또르르르 힘겨운 물방울들의 노젓기 토란잎, 이 배가 가 닿는 세상의 끝은 어디인가 나는 게으르게 언덕에 누워 아득히 하늘을 지나는 비행기를 본다 어디 저기에서 쓸만한 냉장고 하나 안 떨어지나……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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