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당선詩

제9회 시흥문학상 시부문 금상 -누이가 오래 된 집으로 걸어온다 / 김영호

시인 최주식 2010. 2. 2. 22:11

제9회 시흥문학상 시부분 금상

 

 

누이가 오래 된 집으로 걸어온다 / 김영호



                                                                     

1.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장맛비에 젖는다 세족식처럼 길이 씻긴다 가로등 불빛이 울음을 그친 눈빛 같다 실직한지 오래인 아버지 우중충 젖은 벽지에 한숨이 머리를 박는다 책가방이 흠뻑 젖어있다


2. 

 몇 시간째 눈이 내린다 꿈의 세계로 달려가던 밤이 나침반을 내 던지자 장판 아래 어두운 구들 틈새 사이를 비집고 그림자도 없는 일산화탄소가 방안으로 들어온다 창백한 꿈속에서 차례로 기어 나온 동생들과 누이가 윗목에 엎어진다 한 장씩 늦은 책장을 넘기던 내 눈에 아슬아슬한 뉴스의 한 장면이 스친다 어디선가 북 소리가 불안하게 울린다 하늘에 오르지 못한 하얀 눈이 쓸모없는 날개처럼 굴뚝에 처박혀 있다


3. 

꺼지지 않는 연탄불은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이다


소리 없이 시작되는 연극처럼 

새벽을 연 어머니  

부엌에서 밥솥의 하얀 김이 안개의 발원지처럼 솟고

끼니마다 상에 오르는 콩나물 냄새가

문틈 사이를 지나 동 트기 전 어두운 새벽을 깨운다

 

연탄불에 엉덩이를 댄 세숫대야엔

언제나 조용히 물이 끓고 

그 물을 아끼며 식구들이 차례로 잠을 털어낸다


창호지에 찬란한 아침이 드리우면

오늘의 기대감이 외출 할 시간이다 


4.

 오래 되어 거뭇한 손과 어두워진 눈이 바늘귀에 실을 꽂듯 고등학교를 졸업한 누이는 우유회사 꿈 많은 스무 살 신입사원이었다 적은 월급이 대나무 살처럼 가늘게 쪼개져도 누이의 얼굴은 늘 갓 따온 채소처럼 파랬다 서른을 넘겨 만난 서글서글한 인상의 그 사내를 따라 미국으로 간 누이의 목소리는 일요일이면 어머니의 안부를 살피기 위하여 안방에 나타났다 바람난 그 사내가 언젠가 집을 나갔다는 말이 송곳 같았다 뜨거운 연탄불같은 사랑으로 아들을 키우는 누이의 한 쪽 턱이 헤쓱한 하현달처럼 차츰 기울어갔다


 누이가 오래된 집으로 걸어온다 선인장 화분에서 백년에 한번 피는 보랏빛 꽃이 봉긋 솟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