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비림(非林) / 윤병무

시인 최주식 2010. 2. 2. 22:40

비림(非林) / 윤병무

 

  책의 종이 날에 손을 베였다. 상처에 침 바르고 책을 펼쳐보니 제본선 골짜기에서 낮은 신음이 들린다. 엄마가 유칼립투스 식림지(植林地)에 일 나가기 전 여름 아지랑이처럼 발열하며 하찮은 생과 싸우고 있었을 한 아이의 마지막 몸의 소리다. 한 권의 책이 된 종이의 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무는 동남아 식림지에서 이파리처럼 늘어져 귀가한 엄마가 죽은 아이를 안은 채 숨어서 울고 있다. 빈곤은 익숙하지만 죽을 때 조차 곁에 있어주질 못한 엄마의 동그란 뒷모습이 보인다. 다음날도 엄마는 살아남은 자식들을 위해 식림지에 간다. 아직 앓지 않은 아이들의 손짓 같은 가문 강 같은 허연 가지 뻗는 유칼립투스, 그 펄프로 만든 책에서는 비린내가 난다. 종이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 모아 압축해 만든 책장에 피 한방울 묻지 않은 책을 꽂는다.

 

시와반시 (2007. 겨울호)

 

47

'♣ 詩그리고詩 > 1,000詩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 가마솥 / 정명하   (0) 2010.02.03
숟가락 단상 / 복효근   (0) 2010.02.03
빙어회를 먹지 못하는 저녁 / 박완호   (0) 2010.02.02
북 / 박완호   (0) 2010.02.02
아내의 문신 / 박완호   (0) 2010.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