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言)의 오두막집>이 있는 황야의 풍경 / 尹石山
나는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스물 아홉살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 처음 시를 쓴 곳도 거기고, 문단에 등단한 곳도 거기다. 따라서, 내 시심(詩心)의 본향을 말하라면 마땅히 충남 공주 땅의 계룡산(鷄龍山) 골짜기나 금강(錦江)을 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주보다는 제주도를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좀 더 과장해서 말한다면, 젊은 나이에 문단에 나간 것도, 서른 살부터 서울에 올라가 공부한 것도 제주도에 내려와 시를 가르치고 쓰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 내려오기까지 제주도라는 지명은 한낱 지도상의 좌표에 불과했었다. 그런 제주도가 구체적인 실체로 다가온 것은 1985년 5월이었다. 5형제 8남매 장남인데다가, 처자식까지 딸린 주제에 잡문을 쓰며 공부하는 꼴이 너무 측은하게 보였던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 ≪한국 문인협회≫ 주최로 제주도에서 세미나가 열리니 바람이나 쐬고 오자고해서 발을 들여 놓은 것이 첫인연이 되었다.
그 해 오월 내게 제주도는 아주 굉장한 것이었다. 뭐라고 말할까, 잘름대는 쪽빛 바다, 노오랗게 부서져 내리는 금빛 태양, 꿈을 꾸듯 흔들리는 유채꽃 물결, 앵글만 잘 잡으면 서부 영화도 찍을 만한 광막한 초원, 하이얀 넝쿨꽃들이 흔들리는 안개낀 숲에서 어슬렁거리며 빠져 나오는 조랑말떼들……. 서울의 콘크리이트 숲 속에 갇혀 지칠대로 지친 내 신경 세포들을 하나하나 되살리면서 미치게 만들었다.
아쉬운 3박 4일의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나는 그 해 겨울 제주대학교에서 낸 교수 공채(公採) 공고를 보고 무조건 서류를 냈다. 그리고, 그 이듬해부터 강의가 없는 날이면 섬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차츰 제주 바다 물빛을 식별할 줄 알기 시작한 가을부터는 서귀포를 넘나들었다. 제주시에서 바라보는 북쪽 바다는 그냥 암연한 빛깔이지만, 서귀포 앞 바다는 한없이 투명하면서도 서러운 낭만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서귀포에서 특히 자주 간 곳은 <소라의 성(城)>이라는 카페였다. 해물 뚝배기에 한라산 오미자로 담근 소주를 마시는 재미도 유별났거니와, 창 넘어 해안선 절벽 아래로 펼쳐지는 바다에 저녁 해가 장미빛으로 얼크러지는 황혼녁이나, 달빛이라도 휘영청하게 비치는 밤이면 빠져 죽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만일 내가 자살을 한다면 <소라의 성> 앞 바다를 택할 것이라는 소리를 자주 했었다
.
그 집에서 얼근히 취한 나는 <하얀 성(城)>이나 <허니문 하우스>의 커피 숍으로 옮겨 앉기가 일수였다. 그러나, 기분 내키는 대로 옮겨 앉는 것은 아니었다. 동행한 미인이 있으면 목조 테라스와 정원이 내다보이는 <허니문 하우스>로 옮겨 앉았고, 눈이라도 올 듯한 밤이면 페치카에서 화득화득 장작 타는 소리가 좋은 <하이얀 성>으로 옮겨 앉는다.
그리고, 밤마다 <제주 서정 민요초>라는 연작시를 미칠듯이 써댔다. 지난 해에 펴낸 제 3시집 {말(言)의 오두막집} 1부의 <제주 서정 민요초>라는 연작시도 그때 쓴 것들이다.
다음 작품은 서귀포를 넘나들기 시작한 지 몇 년 뒤에 쓴 것으로서, <사랑찾기>라는 연작시 가운데에 하나이지만, 역시 <허니문 하우스>에 갔다가 쓴 것이기에 소개해 본다.
나는 언제나 왜 저 바다를 바다라고만 부르는 것일까?
칸나꽃 뒤 쪽, 끊임없이 밀려오는 물굽이를 박차고 조랑말떼처럼 내닫는 빗줄기, 수평선은 번득이는 그 빗줄기의 갈기에 실려 하늘로 오르고
그 뒤로 무연히 남는 공간을 산이나 들 또는 죽음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걸까?
나는 왜 밤마다 꿈 속에 그대가 남기고 간 입술 자국처럼 선연한 칸나를 붉게 타오른다고만 말하는 걸까
누가 이미 한 말 같다만, 사물은 순간마다 달리 보이는 법, 그래도 관념은 여전히 고집을 피우고, 까닭없는 슬픔은 온몸 가득 번져 나른한데
다탁 위에 놓인 내 손 끝을 잡고 애써 웃는 너를 위해 얼룩진 말의 딱지를 떼고 새롭게 부르고 싶어 견딜 수 없구나.(후략)
-[칸나꽃 뒤로 보이는 風景을 위하여] 중에서
그러나, 지난 3년전부터는 나는 서귀포 대신 한라산 허리를 가로지르는 서부 산업도로 쪽의 어음(於音)이라는 곳을 자주 가기 시작했다. 서귀포처럼 무슨 볼만한 경치나 근사한 술집이 있는 것도 아니다. 화물 자동차가 시속 100킬로로 씽씽 달리는 허허 벌판이다.
그런데도 내가 그곳을 자주 가는 것은 순전히 시를 위한 푸닥거리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카 레코드>에 불경(佛經) 테이프이나 남미 인디오들의 쿠스코(cusco) 음악을 틀어 놓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고, 마음 비우는 연습을 한답시고 그믐밤에도 '달아 떠라! 달아 떠라!'고 외쳐대다가 운전석 의자를 뒤로 젖힌 채 새벽 2시까지 자고 오는 게 전부이다.
내가 내 시를 위해 푸닥거리하는 장소를 서귀포 <바다>와 <까페>에서 서부 산업도로의 <황야>으로 바꾼 것은 제주에 와서 쓴 작품들을 시집으로 묶으려고 정리하다 보니, 이곳 풍물을 예찬하거나 섬에서 혼자 사는 외로움을 토로하는 것들이 대부분임을 발견한 뒤부터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연구실에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제2시집 {벽 속의 산책(散策)}까지 내 작품의 특징이었던 도시적 감각과 세련미를 살려보려고 <사랑찾기>와 <시 또는 시가 아닌 사랑에 대한 단장(斷章)>이란 두 개의 연작시를 썼다
처음에는 제법 잘 되는 것 같았다. 한 동안 쾌재(快哉)를 불렀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다시 보니, 전자는 내가 늘 다니던 서귀포의 남국적 정열과 까페 음악을 닮았고, 후자는 대학 교수다운 티를 너무 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아. 날은 저무는데, 광야에서 길을 잃고 혼자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다시 서귀포를 넘나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늘 다니던 제1횡단 도로를 버리고 서부 산업도로 쪽으로 차를 몰았다. 어둠이 너무 완강하게 가로막으면서 시야를 괴롭혀 큰길에서 좀 벗어난 어느 마을 입구에 차를 세웠다. 그곳은 앞에서 말한 어음이라는 곳의 입구다.
운전석 등받이를 젖히면서, 달이라도 떴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렸다. 하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시인의 말은 해와 달도 움직이고, 귀신도 부릴 수 있다더니, 휘파람이라도 불면 호이호이 인디언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나올 것 같은 초원 한 복판에 파르스름한 달덩이가 슬며시 떠오르는 게 아닌가.
달아, 돋아라! 달아, 돋아라!……, 나는 정신없이 주문을 외워댔다. 그러나, 내 주문의 어세(語勢)가 너무 강했던지 달덩이는 너울거리는 풀잎에 걸려 푸들거리다가 광막한 황야에 죽음 같은 어둠만 질펀하게 남겨 놓고 환각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문득 이제까지 내가 써온 시들을 되돌아보았다. 밀(Jhon Steward Mill)이 [두 종류의 시(The two Kinds of Poetry)]에서 말한 대로 나눈다면, 후험적(後驗的) 지식과 기술로 쓴 <문명적인 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미지가 선명하지 않으니 그를 강화시키고, 거리(距離)가 가까우니 좀 넓히고, 정서가 과잉된 것 같으니 덜어내자는 식으로 써온 것이다.
그 뒤부터 시간이 나는 대로 서부 산업도로 쪽으로 차를 몰았다. 진실해지려면 무엇보다 객기(客氣)를 빼야 하고, 그것을 빼기 위해서는 까페나 바다처럼 화려한 것들을 익히기보다 황야의 거치른 기운을 쐬는 게 더 유익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갈 때마다 장난처럼 달을 띄우기 위한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기척이 없으면 불경 테이프나 쿠스코 음악을 듣고, 인간과 우주가 완전히 합일했던 아득한 고대의 시간을 생각해 봤다.
한 일년 쯤 지났을까, 한라산에 낙엽이 지고, 목초마저 베어진 그 황야가 더욱 쓸쓸해지기 시작하면서 제법 둥싯한 달이 중천까지 떠올랐다. 그래서, 달 속의 계수나무를 베어 황야 한구석에 오두막집을 지어 놓고 날마다 찾아가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방문을 열어놓고 벌렁 들어누워 잠을 잤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먼 섬들을 발끝으로 끌거나 밀어 보고, 미인들을 불러다가 시시덕거렸다.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말로 만든 오지 뚝배기에 말로 담은 된장과 달물을 부어 토장국을 끓여 먹은 다음 시를 썼다.
이 때 쓴 <말(言) 오두막집에서>라는 연작시와 서귀포에 넘나들면 쓴 <제주 서정 민요초>를 합쳐 펴낸 게 제3시집 {말의 오두막집}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완전히 도사가 다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도사가 되려면 흔히 말하는 도(道)뿐만이 아니라 무도(無道)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달빛으로 만든 여인을 밀쳐내고, 괜한 허세를 부렸다고 후회하며 집으로 돌아오고, 그렇게 돌아오는 길 아내의 힐문을 걱정하는 위인이니 여전히 속물에 불과하다.
나는 지금 매우 조바심을 하면서 살고 있다. 쓰고 있는 {화자시학(話者詩學)}란 책이 끝난 다음에는, 아니 그 때까지 기달릴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그 황량한 들판에 다시 한번 오두막집을 세워 놓고 도와 무도도 함께 끌어안는 작품을 쓰고 싶어 떨고 있다. 그러니, 이 곳이 내 시심의 고향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출처 - <한국문학도서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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