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3회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당선작]
냄비 속의 여자 / 강성남
1
화기를 가하는 건 늘 내부 쪽이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불은 두꺼운 바닥을 투과하여
이마까지 달군다
속이 비치는 뚜껑
꽃망울처럼 부푼 목젖과
허파 밑으로 드나드는 바람이 보인다
방울토마토 같은
레몬 같은
타이레놀 같은
둥근 시간들이 그녀 안을 떠다닌다
정작 그녀 자신은
제 속을 볼 수 없어 바닥을 새까맣게 태울 때가 많다
2
바닥이 다층인 그녀
확 끓어올랐다 파르르 식어버리는 성깔이 아니다
급작스런 온도 변화에 민감하다
함부로 열을 가하는 것은 금물이다
서쪽 창으로 들어온 날 선 빛 한줄기
옆구리에 박힌다
빛 날에 긁힌 기억 속으로
두레박줄을 풀어 내린다
햇살과 바람으로 파도치던 시간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달콤한 시럽약 맛
쓰디쓴 가루약 맛
통증의 맛을 구분하는, 목구멍 씁쓸한 그녀
하얗게 불린 침묵을 넣고 뚜껑을 닫는다
열에 들뜬 이마 점점 달아오르고
뿌옇게 흐려진 안부, 끓기 시작한다
내장 뜨거운 짐승이 푸른 눈을 뜬다
[당선소감]
그리움 더듬어 가니 시의 길이 있었네
눈을 뜨면 창에 길이 나 있곤 했다. 누가 어디로 가기 위해 낸 길일까 궁금해 하며 베란다를 유심히 살피는 날이 많았다. 단풍나무, 벤자민, 제라늄… 잎새 뒤에 숨어 제 몸을 드러내지 않던 달팽이. 집주인 몰래 안방 베란다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밤마다 유리창에 길을 내며 위로 오르다 떨어지기라도 했던 것인지 길이 엉켜 있었다. 그가 몸으로 낸 실타래 같은 길이, 내 꿈속에서 무작정 오르다가 미끄러져 내려온 절벽 같았다. 잡을 돌부리 하나, 나무뿌리 하나 없는 절벽. 길게 그어진 내밀한 길이 내 심연의 방을 비추곤 했다.
그리움이라는 더듬이 하나로 길 위에 선다. 시와 미끄럼을 타며 몇번의 겨울을 박스에 담았다. 그리고 오늘 미처 정리하지 못한 여름을 박스에 담는다. 집안 구석구석에 핀 곰팡이와 마음속 먼지들을 털어내고 화초에 물을 준다. 뿌리들이 꿀꺽꿀꺽 물 마시는 소리가 들린다. 닫아두었던 창을 열고 햇살을 맞아들인다. 가슴 안팎이 따뜻하다.
세상으로의 첫발을 허락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시를 만나게 해주신 장석남 선생님과 마음으로 아껴주신 지인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강성남
△1967년 경북 안동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과 졸업
[심사평]
뛰어난 시적 상상력 돋보여
예심을 거쳐 넘어온 9명의 작품을 놓고 심의한 끝에 〈냄비 속의 여자〉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작품들을 일별하면서 아쉬운 점은 무엇보다도 언어의 남용이 눈에 거슬린다는 것이었다. 시 작품 속에 산문적 진술이 과도하게 개입되면 결정적 흠이 된다.
예심을 거쳐 온 작품 중에서 산문적 진술이 덜하고, 시적 상상력이 뛰어난 〈냄비 속의 여자〉를 당선작으로 선택한 까닭도 시어의 남용이 비교적 적다는 점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근자에 와서 시가 점점 산문화되어가는 추세에 비춰 평범한 일상적 소재를 성공적으로 ‘데포르메’(변형하다, 왜곡하다는 뜻)한 점도 장점으로 꼽혔다.
선외작인 〈소고기 국밥〉과 〈쌀 한 알에 담긴 풍경〉은 당선작에 비해 시적 발상이 단순하고 상식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시어 선택과 비유법의 창의적 노력이 더해진다면 좋은 작품을 생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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