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당선詩

[2009 경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무등산 오르기 / 박정이

시인 최주식 2010. 2. 3. 22:36

[2009 경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무등산 오르기 / 박정이 

 
무등을 오르면 산을 오른다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가장 편안한 어린 시절의 우리 아버지의 등이거나
할아버지의 등이다
밖으로 나가 일하시다가 돌아 온 아버지는
언제나 그 등을 내게다 허락 하시고
나는 세상을 나가지 못했지만 그 등을 타면서
세상은 따뜻하고 든든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방에 계시던 할아버지는 재떨이에
담뱃대 톡톡 터시고 기침 몇 번 하시고 난 뒤
담뱃대 높이만한 굽은 등을 내게 주셨다
등에서 내려와 본 세상은 사랑방만 하지만
시시각각 끓는 사랑방 온기로 하여
세상은 아침에서 한밤까지
가득가득 끓는다는 생각을 했다
무등을 오르면 산을 오른다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세상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등이
산으로 솟아있고 나는 그 따뜻한 등을 등으로
오른다고 생각을 한다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싶을 때
산은 억새풀 무더기로 쓸리고 쓸리는 소리
내게다 허락하고
할아버지 기침 소리 듣고 싶을 때
산은 골짜기에 흐르는 물소리 아래로 내려 보내고
내려가다 남는 소리 내게로 허락한다
아, 세상은 나날이 가파르고 언덕배기 작은 골에도
숨이 막히는데 숨이 차고 차서 넘칠때
나는 등을 오른다 등에서 세상은 들녘처럼 편안하고
등에서 세상은 제일 낮은 사람의 목소리
대샆을 돌아 겨우 겨우 돌아 나오는 바람소리를 낸다
그 바람소리
눈물이 나는 소리 같지만 내 어머니의 치마
치맛자락에 얼려있는 내 어린 시절의 꿈이거나
우리 가문이 키워내는 가풍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등은 오르는 것이 아니라
등 아래 사는 사람들의 눈높이로 흐르거나
그 높이로 흐르는 굽 낮은 하늘 바라보는 자리,
무언의 자리이리
하늘에 구름이 무리지어 흐르고
무등은 그 자리
한 번도 어디론가 떠나가지 않고
우리 집 종손이신 아버지처럼
또 할아지처럼 등으로 말하고 등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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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소감]

 

 

“막길어 올린 마알간 우물물같은 마음으로”

 

 

이천 팔년 섣달 그믐밤 아무도 없는 텅빈 공간에서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접했다.
얼마나 혼자서 설레였는지 눈시울을 적셨다. 겨울 햇살 한 줌을 비단 융단에 깔아놓기 위해 하루내내 말을 잊고 있었다. 구구절절 가슴 깊은 곳에서 배어 나오는 시를 쓰기위하여. 아리도록 눈시울 적시고 목젖열어 울음도 토해 보지 못하고 안으로만 삼켜야 하는 절절한 나의 세계를 표현하고 싶었다.
현실속에서 삶, 고통 그리고 성취는 분명히 있으리라고 믿으며 더 좋은 시를 쓰려고 오늘도 끝없이 노력하고 있다.
언제나 막 길어올린 마알간 우물물같은 그런 사랑과 그런 절절한 시의 세계를 펼쳐 가고 싶다. 황진이처럼 그런 시를 펼칠 수 있을까. 어쩜 내 마음에 아직도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은 그 속에 못다한 사랑이 있기 때문인가?
마음에 창을 열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바람소리론 나의 작은 시의 세계를 쉽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이곳까지 올 수 있게 염려해주신 문학회 동인들 그리고 스승님과 선배님들 그리고 항상 자연과 시밭을 만들어 주신 선배님께 감사 드린다. 어머니 그리고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제 시를 뽑아주신 경남일보 심사위원님들께도 깊은 감사 드린다.


-약력-
서울 출생
시정문학회/강남시문학회회원
한국문인협회회원
국제펜클럽한국본부회원

 

 

 [심사평]

 

무리한 비약없는 차분함에 높은 점수

 
시 부문-강희근(시인 경상대 명예교수)·이상옥 (시인 창신대교수) 
 
  이번 시부문에서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4사람에 의한 4편이다. ‘양장본 한 사람’ ‘경운기’‘뒤돌아보는 길’‘무등산 오르기’가 그것이다.
‘양장본 한 사람’은 서적의 향방을 쫓고 있는 화자가 서적들이 안겨주는 감각이나 내용을 상상력으로 따라가는 시다. 한 노인을 양장본 같다고 한 대목이 눈에 크게 들어온다. 그러나 딱 잡아 이것이다 하는 내용이 미미하다는 점이 결점이라 할 수 있다.
‘경운기’는 못쓰고 버려진 경운기를 소재로 끌고 가는 사실적 접근이 눈에 띈다. 그것도 사실감 자체로 끝나지 않고 그것이 갖는 속성이나 주변을 형상화하고 있는 솜씨가 볼 만하다.그러나 시 전체가 주는 질량감이 실려 있지 않다.
‘뒤돌아보는 길’은 차분히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능력면에서 돋보이는 작품이다. 거기에 비해 주제 처리가 상대적으로 미약해 보인다.
‘무등산 오르기’는 앞 3편에 비해 여러 측면에서 시적 기량을 고루 갖추고 있는 작품으로 읽힌다. 이 시는 무등산 오르는 일을 어린 시절 아버지의 등이나 할아버지의 등을 오르는 것으로 오버랩시키고 있다. 이미지를 차분히 끌고 가면서 화자의 성장을 드러내는데 한 군데도 무리한 비약이나 무리한 상상으로 나가지 않는다. 언어를 통제하는 가운데 화자의 의식과 지향을 결합시켜 나간다는 점에 있어서 예사롭지 않은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선자 두 사람은 일찍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집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