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배롱나무꽃 / 정성수
오백 살 배롱나무가 선국사 앞마당에
가부좌를 틀고 있다.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고서
여름밤 폭죽처럼 피워 낸
저 붉은 꽃들.
깡마른 탁발승이 설법을 뿜어내는지
인연의 끈을 놓는 아픔이었는지
이승에서 속절없이 사리舍利들을 토해내고 있다.
배롱나무꽃
붉은 배롱꽃은 열꽃이다.
온 몸으로 뜨겁게 펄펄 끓다가 떨어진 꽃잎 자국은
헛발자국이다.
피기는 어려워도 지는 것은 금방인 꽃들은
저마다 열병을 앓다가 진다.
저물어가는 여름 끝자락에
신열을 앓다가 가는 사람이 있다.
배롱꽃처럼 황홀하게
무욕의 알몸으로 저 화엄 세상을 향해서
쉬엄쉬엄
* 선국사 : 전북 남원시 교룡 산성 내에 있는 사찰.
당선소감
"쓰러질 때까지 시 끌어안겠다"
언젠가 박사학위를 받은 친구에게 부러움과 수고의 말을 전하자 친구는 ‘학위라는 것은 별게 아니야. 그것은 다만 스승이 없어도 혼자서 학문을 할 수 있다는 격려의 말일 뿐이지’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나는 상당히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그 뒤로 진위를 확인한 바 없지만 지금도 머릿속에 깊이 박혀있다.
신춘문예 당선이야 말로 이제 혼자서 글을 써도 좋다는 징표 정도가 아닌가 한다.
그 동안 많은 시간들을 시 쓰는 일에 매달려 왔다.
그렇다고 대학에서 시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평생교육원이나 문학교실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린이들과 함께 생활해오면서 동시를 읽고 지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와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교사라고 하는 직업이 결국 나를 여기가지 데리고 온 셈이다.
가끔 보탬도 되지 않는 짓을 하느냐는 아내의 말이나 시 같지도 않은 시라고 혹평을 받을 때면 정말 나는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반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약같은 중독의 유혹과 시의 매력에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 40여년의 교직생활을 마무리하고 강단할 때가 다가온다.
그 동안 수없이 쳐 보내던 종소리도 여운만 남긴 채 허공으로 사라져 갈 것이다.
종은 찌그러져도 종소리만은 오랫동안 깨지지 말고 어린이들의 가슴속에 추억으로 남기를 바란다.
내 시를 어여삐 봐주시고 선해 준 심사위원들께 감사함을 전한다.
이제 출발선 상에 있는 마라토너가 된 기분이다.
시의 길은 멀고 해는 지고 있다.
가다가 쓰러질 때 까지 시를 끌어안고 달릴 것이다.
오늘 밤은 옴팡집 목의자로 친구를 불러내어 오랫동안 술잔의 깊이를 재고 싶다.
심사평
"시의 응축적 결정과 여운 돋보여"
예선 통과의 작품 수는 160여 편이였다.
응모자는 도내 뿐 아니라, 부산·인천·포항·대구·광주에 걸쳐 있었다.
10대로부터 70대의 나이층이었으나 40∼50대가 주였다.
시의 양식도 자유시를 비롯, 시조시· 동시도 있었다.
한마디로 작품 수준을 말하기는 어렵다.
각자 나름의 시세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어디까지나 선자 나름의 눈으로 작품을 읽고 가릴 수 밖에 없다.
응모작들을 일독한 후, 골라낸 작품은 고제우·신도홍·김삼경·이현주·김금아·김형태·정성수 님들의 것이었다.
각자의 작품들이 지닌 장점도 볼 수 있었다.
동심의 세계(고제우), 생활 속 여심(신도홍), 산뜻한 감성(김삼경), 해학적 기지(이현주), 폭넓은 사유(김금아) 등이 곧 그것이다.
그러나 시에 대한 온축이나 역량 면에 있어서 김형태와 정성수의 작품들이 위 여러 응모자의 작품에 비하여 뛰어난 것을 볼 수 있었다.
선자로서의 호감이 더 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김형태·정성수는 다같이 시에 대한 그동안의 수련과정도 만만찮다는 것을 각각 10편·5편의 응모작에서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시어 하나를 골라 쓰는데도 많은 고심을 한 것을 볼 수 있었다.
특히 토박이말에 대한 애정에도 호감이 갔다.
‘뜸베질’ ‘되창문’ ‘노박이’ ‘고빗사위’ ‘옴나위’ 등의 낱말이 지닌 정감은 오늘날 되챙겨 보고 싶은 우리의 토박이 말이다.
최종 선정에 번갈아 읽으며 들었다 놓았다 적잖이 망설였다.
끝내는 정성수의 ‘배롱나무꽃’을 당선작으로 내어밀기로 하였다.
요설적 산문적인 시행 처리 보다도 응축적인 시의 결정과 그 여운을 사기로 한 것이다.
정성수 시인의 시의 앞날을 빌어 마지 않는다.
-(최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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