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나다. 벌써 한 달이 넘게 남자의 차 테이프박스에 걸려 있는 테이프다. 마리아…….마리아……. 싱어의 간드러지듯 슬픈 음률은 변심해버린 연인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간교하고 또 애처롭다. 나는 애써 남자의 시선을 비켜 비어있는 조수석을 본다. 통행권을 찾느라 부산을 떨고 있는 저 남자의 행동이 사실은 연극에 불과하다는 걸 나는 안다. 한 번의 실수없이 내 개찰구로 들어오는 남자의 차도 그렇지만 그때마다 산타나의 마리아 마리아를 흘러나오게 맞추는 남자의 약삭빠름이라니.
창밖으로 날아가 버린 거야, 뭐야. 혼잣소리를 하며 안전벨트를 푼 남자는 이번엔 엉덩이를 반쪽씩 들어가며 시트를 확인한다. 나는 통행권을 받으려고 부스 창문턱에 걸쳐놓았던 손을 거둬들이고 텅 빈 모니터를 본다. 평일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 톨게이트는 한산했다. 내가 맡고 있는 부스 외에도 3개의 부스에서 개찰을 하고 있었고, 다음 차가 들어오기 전에 착실히 앞의 차를 내보내고 있었으니, 부러 정차해 있는 남자의 뒤에 차를 세우는 운전자는 없었다. 나는 모니터 옆에 놓여 있는 동그란 손거울을 본다. 간밤의 고단함이 기미처럼 눈 밑에 퍼져 있다. 귀 옆으로 흘러나온 옆머리를 쓸어 넘긴다.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다. 마치 TV를 시청하는 기분으로 느긋하게…….요금소 근무 13년 동안 내가 상대한 건 사람이 아니라 차였다고 할 수 있다. 할인되는 경차, 면제 대상인 부대 차, 서울을 출발한 차, 부산에서 온 차......,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타고 있는 차에서 부과되는 요금만 틀리지 않게 정산하는 일, 그게 내가 할 일이다. 특히 성질 급한 차, 매너 없는 차, 수작 부리는 차를 대할 때면 더욱 그렇다. 차가 아니라 사람을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감정을 다스려야 할 터였다. 그저 부스 유리창이 TV화면이라고 생각하면 그뿐이었다. 사람이지만 기계속의 사람을 대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으면 딱히 기분 상할 일이랄 게 없었다.
“통행권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남자의 예기치 못한 질문에 목 뒤쪽으로 스멀스멀 짜증기가 올라온다. 물론 나는 그런 짜증을 얼굴에 드러내진 않는다. 내가 그런 감정을 표시한다면 그 걸 받아드리는 남자들의 반응은 두 가지다. 드디어 자신이 던진 낚싯밥에 걸려들었다는 듯이 서툰 수작을 밀어붙이는 축과 먹혀들지 않은 수작에 보상이라도 받아야겠다는 식으로 내 얼굴에 드러난 짜증을 트집 잡는 축, 그 두 가지 상황에 말려들지 않는 방법은 애초에 그런 식의 수작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다른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열심히 모니터를 주시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지금 저 남자처럼 수작을 걸어오던 남자들은 자신의 수작이 거절당했다는 수치심 때문에 나를 공격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나는 요금소에서 가장 차를 잘 빼는 베테랑이다. 개찰을 대기하는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명절연휴 같은 때에는 시간당 사백 대의 차량을 빼낸 기록이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내가 차를 빨리 뺀다는 것은 단순히 손이 빠르거나 셈이 빠르다는 걸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운전자들의 저런 어쭙잖은 수작도 그만큼 잘 처리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송 혜씨?”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남자를 향해 얼굴을 돌린다. 한 번도 수인사를 나누지 않은 남자의 입에서 불리는 내 이름자가 낯설었다.
“통행권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송 혜씨?”
미소 같기도 하고 비아냥거림 같기도 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끝에 송 혜씨? 이라고 끝을 올려 발음할 때는 남자의 시선이 부스 바깥쪽의 명찰에 머문다. 내 이름이 송 혜라는 것을 안 것은 방금 부스에 걸려 있는 이름표 때문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 명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지만 남자는 벌써 오래 전부터 내 이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남자를 처음 만난 건 계절을 재촉하는 봄비가 내리던 한 달 전이었다. 내린다고 말하기조차 어색한 안개 같은 봄비였다. 그 봄비를 조심스럽게 걷어내며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신형차가 미끄러지듯 진입로의 커브를 돌아 나오고 있었다. 때마다 새로운 모델을 내놓고 그때마다 새로이 등장하는 TV속의 차량광고를 볼 때처럼 나는 잠깐 생각한다. 저런 차를 타게 되면 나도 차멀미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날렵하게 빠진 차체에 잠시 넋을 잃고 있는 사이, 남자의 차가 내 부스 앞에 멈춰 섰다. 아직 TV광고에서 본적이 없는 모델이어서 외제차인가 하는데 보닛 위에 익숙한 자동차 회사의 마크가 보였다. 사실 나는 그때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TV광고에 나오기 전에 신형차를 타는 사람이 있다니…….나는 남자가 내미는 통행권을 요금 정산기에 밀어 넣으며 생각했다. 저런 사람들은 도대체 TV가 아닌 어디에서 저런 정보를 얻는 것일까? 출발지는 서울이었다. 남자가 요금을 준비하는 사이 나는 남자의 차에서 흘러나오는 마리아 마리아를 따라 흥얼거리고 말았다. 부스에서 요금을 계산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TV속에서 노래가 흘러나올 때면 같이 흥얼거리듯이 그렇게 마리아 마리아를 흥얼거린 것이다.
그 후로부터 매주 금요일 아침, 나는 내 부스로 정확하게 밀고 들어오는 남자의 차를 목격했다.
“저희 톨게이트에서 가장 먼 곳의 요금소로부터 발생되는 요금을 내시면 됩니다.”
나는 밀고 올라오는 짜증을 애써 누르며 그제야 그의 눈을 마주본다. 쌍꺼풀이 알맞게 지고 눈꼬리가 약간 쳐진 눈이다.
“그러면 이곳에서 가장 먼 곳의 요금소는 어디인가요. 송 혜씨?”
“다시 한 번 잘 찾아보시지요. 손님.”
그의 말끝마다 붙여지는 송 혜씨라는 발음이 마치 미숙한 연기자가 주인공인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짜증을 불러일으켜 나는 빠르게 말했다. 한 번 더 그 발음을 듣는다면 나는 더 이상 서비스인으로써의 직업정신을 고수하지 못하고 얼굴에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낼 것만 같아 불안했다.
“가장 먼 곳의 요금소가 어딘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송 혜씨?”
“칠천 육백원입니다 손님.”
실수였다. 나는 자꾸만 밀고 올라오는 짜증에 어쩌지 못하고 가장 먼 곳의 요금소가 아닌남자가 항상 지불하곤 하던 서울발 요금을 말해버리고 말았다.
“풋”
나와 남자의 입에서 동시에 새어나온 웃음이었다. 머릿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지던 현 하나가 뚝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끝을 올리며 송 혜씨라고 부르는 소리를 한 번 더 들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 같던 짜증이 실소와 함께 사라졌다. 갑자기 터져 나온 실소 덕에 나는 나도 모르게 남자의 출발지를 알고 있다는 내색을 해버린 실수에 무안해하지 않는다.
“통행권이 없으니 일단 지갑을 맡기고 가겠습니다. 계산해주시죠. 그리고 올라갈 때 여기서 송 혜씨를 찾겠습니다. 지갑은 그때 돌려주십시오.”
남자가 여전히 미소인지 비아냥거림인지 모를 웃음을 머금고 작은 손지갑을 부스 안으로 던진다. 내가 무어라 더 말을 할 사이도 없이 남자의 차가 빠르게 부스를 빠져나갔다. 반으로 접힌 손지갑을 펼치자마자 노란색 통행권이 책상위로 떨어진다.
교대를 해줄 진이가 사무실 문을 나서는 게 보인다. 저만큼 달려오는 진이 뒤로 도로공사 사무실 울타리에 늘어선 넝쿨장미가 이제 막 그 붉은 봉오리를 열고 어지러이 엉켜 있다. 저렇게 넝쿨장미가 흐드러지는 봄이 오면 현수는 어쩌지 못하고 무릎을 훌쩍 올라서는 타이트스커트를 입곤 했다.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정확히 5센티미터 작은 현수는 그래서 왼쪽신발에 5센티미터의 굽을 덧댄 신발을 신어야 했다. 한쪽신발의 굽을 높여 다리 길이를 맞춘 보정용 신발을 신었으면서도 현수의 걸음걸이는 여전히 기우뚱했다. 그래서였는지 스커트 아래에서 먼저 시선을 잡는 건 굵기가 다른 현수의 다리가 아니라 굽 높이가 다른 현수의 신발이었다. 차고 맵던 바람이 봄볕에 녹아 한껏 부드러워지는 날이면 현수의 하얀 종아리는 그렇게 바람을 맞았다. 종아리 사이를 휘감고 스쳐가는 바람의 감촉이 야릇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던 현수. 그럴 때면 종아리의 잔털들이 오소소 일어서서 바람에 묻어오는 넝쿨장미 향을 맡는 것 같다던 현수. 단지 후각이 아니라 촉각으로도 향을 맡을 줄 아는 현수. 나는 현수가 보고 싶다.
처음 현수가 내 집에 신세를 지겠다고 했을 때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10년이 넘게 혼자 살아온 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데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와 같은 침대를 써야한다는 것보다 더 당혹스러운 건 다른 누군가와 TV리모컨을 같이 써야한다는 거였다. 나만의 리모컨을 가진다는 것은 내겐 대단히 중요한 의미였다. 내게 있어 TV는 취미나 습관을 넘어 친구이자 스승이며 가족이었고 나의 두 다리였다. 나는 TV를 통해서 웃었고 TV를 보면서 여행을 다녔으며 TV를 통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TV를 통해서 세상을 익혔다. 10년 동안 퇴근하는 나를 반겨 준 것도 TV이었고 피곤에 지쳐 뒤척이는 나를 잠들게 했던 것도 TV이었고 작은 소읍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내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해준 것도 TV이었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채널을 틀 수 없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런 TV를 다른 누군가와 같이 공유해야 한다는 것은 나에겐 단순히 주거공간을 같이 쓰는 것을 넘어서 내 일상을 나눈다는 의미였다. 선뜻 허락할 수 없는 그런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현수를 내 집에 들인 것은 섬에서 왔다는 현수의 말 때문이었다. 오래 전부터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그곳이 섬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섬에서 왔고 아는 사람이 없어서 요금소에 출근을 하자면 당장 근처에 방을 얻어야한다고, 현수가 그렇게 말했을 때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요금소 가까이에 혼자 살고 있는 나를 바라봤다. 사람들의 시선을 좆아 나를 바라보던 현수는 마땅한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라고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부스 바깥쪽의 송혜라는 명찰을 이진이라는 명찰로 갈아 끼우는 진이를 뒤로하고 나는 사무실을 향해 걷는다. 지방의 중심도시를 지척에 둔 이 소읍은 십 몇 년 전 느닷없이 산중턱에 대학교가 들어서고 주변에 있던 논밭을 밀고 자동차 생산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변화했다. 내가 이 소읍의 유일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로공사의 협력업체인 일성이라는 인력업체에 입사할 수 있었던 건, 내가 기거하던 기도원과 톨게이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산자락 중턱에 대학교가 생긴 그때부터였다. 기도원은 소읍과 산자락을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는 천호라는 마을에 있었다. 하 늘 천에 항아리 호, 사람들은 천호라는 지명이 무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옛날 카톨릭 선교사들이 끌려와 순교한 성지가 있는 천호는 사람수보다 무덤수가 더 많은 산골마을이기도 했다. 대학교를 가로막고 있던 산허리를 가르는 아스팔트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나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나는 직장을 얻는 걸 포기했을 것이다. 물론 길이 새로 나기 전에도 다른 길을 돌아 톨게이트를 경유하는 버스 노선이 있기는 했지만 그 거리는 자전거로는 두 시간은 족히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어렸을 때부터 차멀미가 심했던 나는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하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힘겹게 마쳤다.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긴 했지만 큰아버지는 읍내에 방을 얻어줄 형편이 못된다고 했다. 형편이 안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아니면 기도원의 허드렛일을 맡아할 사람이 없었으니까.
엄마가 일곱 살 먹은 나를 큰아버지 내외가 운영하는 산골의 기도원에 짐을 부리듯 놓고 사라진 후 나는 줄곧 기도원에서 기도원 원생들과 뒤엉켜 살았다. 기도원이라고는 했지만 수용소 같은 곳이었다. 치매를 앓는 노인들과 선천적으로 몸이 불편한 사람들, 혹은 정신지체를 앓는 아이들과 어쩌다가 몸이나 마음을 다쳐 요양해야하는 사람들이 누군가에 의해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맡겨진 수용소 말이다. 폐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도 그 수용소 같은 기도원에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물론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엄마가 나를 그 기도원에 데려다 놓고 사라지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기도원을 나와 지금 살고 있는 내방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대학교 덕분이었다. 대학교가 생기자 산중턱 아래에 하나둘 원룸이 들어섰다. 나만의 방과, 돈을 벌 수 있는 직장과, 직장을 오갈 수 있는 자전거와, 오직 나만을 위한 리모컨까지…….그것이면 완벽했다. 나는 그것들 외에 더 이상 세상에서 얻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따라 기도원 문을 들어선 날, 바보처럼 엄마 무릎에서 잠들어 버린 스스로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그 날 그렇게 잠들지 않고 엄마 손을 놓지 않았더라도 결국 엄마는 나를 두고 사라졌을 것이다.
엄마 잘못이 아니야. 라고 현수는 말했다. 현수도 나도 근무가 없는 날이어서 늦은 점심을 먹고 나란히 침대에 기대어 앉아 TV를 보고 있을 때였다. TV에서는 건강프로가 재방송 되고 있었다. 성장 판이 없어지는 스무 살이 넘으면 수술을 할 수가 없다고 했어. 현수는 TV에 시선을 고정한 체 말했다. 물론 우리엄마야 수술해줄 돈도 없었지만 내가 수술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했어. 엄마한테는 그렇게 말하게 되더라고. 소아마비인 다리쯤은, 아무 일 아닌 것처럼, 길이가 다른 내 다리는 엄마한테도 큰 상처라는 걸 아니까. 현수는 유난히 가늘고 짧은 한쪽 다리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엄마는 시집오자마자 연이어 딸 셋을 낳았는데 둘째 언니 때부터 이미 보건소 가는 것에도 할머니 눈치가 보였데. 넷째인 날 낳고는 산후조리는커녕 미역국도 한 그릇 맘 편히 못 넘기셨다고. 게다가 나는 한창 바쁜 유월에 태어났고 그래서 때맞춰 예방접종을 못 시킨 거야. 현수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전하듯 얼굴에 미소까지 머금고 나를 바라봤다. 언니 내가 왜 섬을 나왔는지 알아? 우리 섬에선 말이지, 섬에 있는 작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섬을 떠나야 한다는 걸 누구나 알아. 마치 고등학교에서 섬을 떠나는 방법을 익힌 것처럼 누가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거나 강요한 게 아닌데도 다들 약속된 것처럼 대처로들 나갔어. 그런데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2년을 더 섬에 있었지. 언니처럼 차멀미가 심한 것도 아닌데 도시로 나가면 멀미가 날 것 같더라고. 그러다 일리자로프를 알게 됐지. 일리자로프? 나는 현수에게 되물었다. 일리자로프라고 키를 크게 하는 수술이야. 뼈에 핀을 꽂아 고정시킨 후 조금씩 뼈를 늘리는 수술이지. TV뉴스에서 그걸 듣고 믿기지 않아 방송국에 전화해서 확인까지 했어. 그날로 나는 섬에서 나왔어.
그러고 보면 현수를 섬에서 나오게 한 건 현수의 짧은 한쪽 다리였다. 현수는 벌써 여러 해 동안 자신의 왼쪽다리를 5센티미터 더 키우기 위해서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현수의 마땅한 거처는 현수의 한쪽 다리가 5센티미터 커진 이후라야 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현수를 보내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때 나는 현수 모르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대학교 진입로의 상점들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나는 자전거에서 내린다. 거기서부터는 심한 오르막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자전거의 페달을 밟을 수 없었다. 차멀미 따위는 하지 않는 현수도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다. 가끔 근무시간이 겹칠 때면 현수는 제 자전거를 원룸 출입구 계단에 세워두고 내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앉았다. 그런 날에 현수는 오르막이 시작되는 그 즈음에서 상점에 들어가 항상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나왔다. 우리는 그렇게 어린 학생들처럼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자전거 손잡이를 하나씩 나누어 쥐고 오르막을 오르곤 했다.
현수의 자전거가 계단 옆 핸드레일에 묶여 먼지를 뒤집어쓰기 시작한 건 도로공사 소속의 김 주임과 카풀을 시작하고 부터였다. 물론 그 후론 나와 근무시간이 겹쳐도 현수가 내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앉은 일은 없어졌다. 현수가 김 주임과 카풀을 시작하고부터 내게는 참 곤혹스러운 일이 생겼는데 그건 집안 여기저기 시선이 머물만한 곳에 두서없이 붙어 있는 김 주임의 사진을 보는 일이었다. 화장대 거울에, 침대 맡에, TV위에, 심지어는 식탁 유리 밑에도 김 주임의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근무시간이 엇갈려 곳곳에 김 주임의 사진이 놓여있는 집에 혼자 있게 되는 날엔 김 주임과 함께 기거하는 것만 같아 나는 맘이 불편했다.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라고 말했던 현수는 3년이 지나도록 마땅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고 내 집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현수는 밥을 먹다 말고 식탁유리 밑에 있는 김 주임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이렇게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때 나는 이제 곧 현수에게 마땅한 거처가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김 주임이라는 새로운 현수의 거처…….하지만 김 주임은 현수의 거처가 되어주지 않았다.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나는 신발장 위에 현관 열쇠와 자전거 열쇠가 묶여 있는 열쇠 꾸러미를 내려놓고 대신 신발장 위에 올려져 있던 리모컨을 집어 든다. 그리고 신발을 벗으면서 동시에 TV를 켠다. 내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맨 먼저 하는 일이 TV를 켜는 일이고 집을 나서기 위해 신발을 신고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TV를 끄는 일인 줄 아는 현수는 한 번도 리모컨을 신발장에 두고 나가는 일을 잊지 않았었다. TV를 켜니 뉴스 채널이다. 어제 밤근무를 하기 위해 집을 나가기 전까지 내가 보았던 채널이 뉴스 채널이었다는 말이다. 나는 뮤직채널로 채널을 바꾸고 음량을 조금 더 키운다. 이미 여러 번 보아서 노래가사 만큼이나 줄줄이 외고 있는 뮤직비디오가 시작되는데 TV화면이 안개 낀 것처럼 부옇다. 아침이면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 때문이다. 나는 베란다 쪽으로 나있는 창문에 커튼을 닫는다.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먹을 때까지 채널은 뮤직 채널에 고정되어 있다. 생각해보면 현수가 오기전의 나는 거의 손에서 리모컨을 내려놓지 않았었다. 사냥감을 찾듯 새로운 채널을 찾아 끊임없이 리모컨의 채널버튼을 눌러대곤 했으니까. 하지만 현수가 오고, TV를 보는 것처럼 현수를 보게 되면서 간혹 하루 종일 한 채널에 고정되어 있기도 하고 때로는 몇 번씩 같은 프로를 되풀이해 보곤 하면서도 나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치곤 했다.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기어 올라가면서 나는 드라마 채널로 채널을 바꾼다. 역시 이미 여러 번 보아서 내용을 다 아는 드라마지만 나는 채널을 바꾸지 않는다. 야간근무를 하느라 미뤄두었던 잠을 자야 하기 때문이다. 도란도란 TV속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는 자장가보다 잠들기에 더 유용하다. TV를 켜놓지 않고서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 때문에 현수는 한동안 힘들어했다. 대부분 근무시간이 달라 한 달이면 일주일정도 같이 잠드는 게 다였는데 그때마다 현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현수가 오고부터 리모컨에 대한 나의 병적인 집착은 없어졌지만 10년 넘게 길들여진 나의 오래된 습관, TV소리없인 잠들지 못하는 버릇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TV를 끄면 내가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일 것이고 내가 자꾸 뒤척이면 현수가 잠들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일 터였다.
딱 한번 현수가 TV를 꺼달라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날은 현수가 자신한테는 한마디 언질도 없이 근무지를 옮겨버린 김 주임에게 다녀온 날이었고 집안 곳곳에 두서없이 놓여있던 김 주임의 사진이 모조리 사라진 날이기도 했다. 침대에 얼굴을 묻고 현수는 말했다. TV좀 꺼 줘…….함께 생활한 이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나만의 리모컨을 갖게 된 후 처음으로 TV소리 없이 잠이 들어야 했던 그날 밤, 물론 나는 잠들지 못했다. 지금생각하면 그 날 뜬눈으로 날을 새운 건 TV소리가 없어서가 아니었던 것 같다. TV소리가 없어진 대신 어둠 속에서 밀려오는 낮선 소리들, 맨살에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것처럼 느닷없고 낮선 소리들 때문이었다. 유난히 크게 들려오던 시계의 초침소리와 싱크대의 낙숫물 소리, 끊어질 듯 이어지던 현수의 흐느낌, 그 흐느낌이 잦아들던 새벽녘엔 바람이 일었던지 원룸건물 옆에 장승처럼 서있는 포플러 나무에서는 쉐쉐, 뱀이 풀밭 위를 지나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