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편 소설

200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통행권을 받으십시오 ① / 정원자

시인 최주식 2010. 2. 4. 22:29

200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통행권을 받으십시오 ① / 정원자

                                            

 산타나다. 벌써 한 달이 넘게 남자의 차 테이프박스에 걸려 있는 테이프다. 마리아…….마리아……. 싱어의 간드러지듯 슬픈 음률은 변심해버린 연인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간교하고 또 애처롭다. 나는 애써 남자의 시선을 비켜 비어있는 조수석을 본다. 통행권을 찾느라 부산을 떨고 있는 저 남자의 행동이 사실은 연극에 불과하다는 걸 나는 안다. 한 번의 실수없이 내 개찰구로 들어오는 남자의 차도 그렇지만 그때마다 산타나의 마리아 마리아를 흘러나오게 맞추는 남자의 약삭빠름이라니.

 창밖으로 날아가 버린 거야, 뭐야. 혼잣소리를 하며 안전벨트를 푼 남자는 이번엔 엉덩이를 반쪽씩 들어가며 시트를 확인한다. 나는 통행권을 받으려고 부스 창문턱에 걸쳐놓았던 손을 거둬들이고 텅 빈 모니터를 본다. 평일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 톨게이트는 한산했다. 내가 맡고 있는 부스 외에도 3개의 부스에서 개찰을 하고 있었고, 다음 차가 들어오기 전에 착실히 앞의 차를 내보내고 있었으니, 부러 정차해 있는 남자의 뒤에 차를 세우는 운전자는 없었다. 나는 모니터 옆에 놓여 있는 동그란 손거울을 본다. 간밤의 고단함이 기미처럼 눈 밑에 퍼져 있다. 귀 옆으로 흘러나온 옆머리를 쓸어 넘긴다.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다. 마치 TV를 시청하는 기분으로 느긋하게…….요금소 근무 13년 동안 내가 상대한 건 사람이 아니라 차였다고 할 수 있다. 할인되는 경차, 면제 대상인 부대 차, 서울을 출발한 차, 부산에서 온 차......,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타고 있는 차에서 부과되는 요금만 틀리지 않게 정산하는 일, 그게 내가 할 일이다. 특히 성질 급한 차, 매너 없는 차, 수작 부리는 차를 대할 때면 더욱 그렇다. 차가 아니라 사람을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감정을 다스려야 할 터였다. 그저 부스 유리창이 TV화면이라고 생각하면 그뿐이었다. 사람이지만 기계속의 사람을 대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으면 딱히 기분 상할 일이랄 게 없었다.

“통행권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남자의 예기치 못한 질문에 목 뒤쪽으로 스멀스멀 짜증기가 올라온다. 물론 나는 그런 짜증을 얼굴에 드러내진 않는다. 내가 그런 감정을 표시한다면 그 걸 받아드리는 남자들의 반응은 두 가지다. 드디어 자신이 던진 낚싯밥에 걸려들었다는 듯이 서툰 수작을 밀어붙이는 축과 먹혀들지 않은 수작에 보상이라도 받아야겠다는 식으로 내 얼굴에 드러난 짜증을 트집 잡는 축, 그 두 가지 상황에 말려들지 않는 방법은 애초에 그런 식의 수작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다른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열심히 모니터를 주시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지금 저 남자처럼 수작을 걸어오던 남자들은 자신의 수작이 거절당했다는 수치심 때문에 나를 공격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나는 요금소에서 가장 차를 잘 빼는 베테랑이다. 개찰을 대기하는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명절연휴 같은 때에는 시간당 사백 대의 차량을 빼낸 기록이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내가 차를 빨리 뺀다는 것은 단순히 손이 빠르거나 셈이 빠르다는 걸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운전자들의 저런 어쭙잖은 수작도 그만큼 잘 처리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송 혜씨?”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남자를 향해 얼굴을 돌린다. 한 번도 수인사를 나누지 않은 남자의 입에서 불리는 내 이름자가 낯설었다.

“통행권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송 혜씨?”

 미소 같기도 하고 비아냥거림 같기도 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끝에 송 혜씨? 이라고 끝을 올려 발음할 때는 남자의 시선이 부스 바깥쪽의 명찰에 머문다. 내 이름이 송 혜라는 것을 안 것은 방금 부스에 걸려 있는 이름표 때문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 명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지만 남자는 벌써 오래 전부터 내 이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남자를 처음 만난 건 계절을 재촉하는 봄비가 내리던 한 달 전이었다. 내린다고 말하기조차 어색한 안개 같은 봄비였다. 그 봄비를 조심스럽게 걷어내며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신형차가 미끄러지듯 진입로의 커브를 돌아 나오고 있었다. 때마다 새로운 모델을 내놓고 그때마다 새로이 등장하는 TV속의 차량광고를 볼 때처럼 나는 잠깐 생각한다. 저런 차를 타게 되면 나도 차멀미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날렵하게 빠진 차체에 잠시 넋을 잃고 있는 사이, 남자의 차가 내 부스 앞에 멈춰 섰다. 아직 TV광고에서 본적이 없는 모델이어서 외제차인가 하는데 보닛 위에 익숙한 자동차 회사의 마크가 보였다. 사실 나는 그때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TV광고에 나오기 전에 신형차를 타는 사람이 있다니…….나는 남자가 내미는 통행권을 요금 정산기에 밀어 넣으며 생각했다. 저런 사람들은 도대체 TV가 아닌 어디에서 저런 정보를 얻는 것일까? 출발지는 서울이었다. 남자가 요금을 준비하는 사이 나는 남자의 차에서 흘러나오는 마리아 마리아를 따라 흥얼거리고 말았다. 부스에서 요금을 계산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TV속에서 노래가 흘러나올 때면 같이 흥얼거리듯이 그렇게 마리아 마리아를 흥얼거린 것이다.

 그 후로부터 매주 금요일 아침, 나는 내 부스로 정확하게 밀고 들어오는 남자의 차를 목격했다.

“저희 톨게이트에서 가장 먼 곳의 요금소로부터 발생되는 요금을 내시면 됩니다.”

 나는 밀고 올라오는 짜증을 애써 누르며 그제야 그의 눈을 마주본다. 쌍꺼풀이 알맞게 지고 눈꼬리가 약간 쳐진 눈이다.

“그러면 이곳에서 가장 먼 곳의 요금소는 어디인가요. 송 혜씨?”

“다시 한 번 잘 찾아보시지요. 손님.”

 그의 말끝마다 붙여지는 송 혜씨라는 발음이 마치 미숙한 연기자가 주인공인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짜증을 불러일으켜 나는 빠르게 말했다. 한 번 더 그 발음을 듣는다면 나는 더 이상 서비스인으로써의 직업정신을 고수하지 못하고 얼굴에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낼 것만 같아 불안했다.

“가장 먼 곳의 요금소가 어딘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송 혜씨?”

“칠천 육백원입니다 손님.”

 실수였다. 나는 자꾸만 밀고 올라오는 짜증에 어쩌지 못하고 가장 먼 곳의 요금소가 아닌남자가 항상 지불하곤 하던 서울발 요금을 말해버리고 말았다.

“풋”

 나와 남자의 입에서 동시에 새어나온 웃음이었다. 머릿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지던 현 하나가 뚝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끝을 올리며 송 혜씨라고 부르는 소리를 한 번 더 들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 같던 짜증이 실소와 함께 사라졌다. 갑자기 터져 나온 실소 덕에 나는 나도 모르게 남자의 출발지를 알고 있다는 내색을 해버린 실수에 무안해하지 않는다.

“통행권이 없으니 일단 지갑을 맡기고 가겠습니다. 계산해주시죠. 그리고 올라갈 때 여기서 송 혜씨를 찾겠습니다. 지갑은 그때 돌려주십시오.”

 남자가 여전히 미소인지 비아냥거림인지 모를 웃음을 머금고 작은 손지갑을 부스 안으로 던진다. 내가 무어라 더 말을 할 사이도 없이 남자의 차가 빠르게 부스를 빠져나갔다. 반으로 접힌 손지갑을 펼치자마자 노란색 통행권이 책상위로 떨어진다.

 교대를 해줄 진이가 사무실 문을 나서는 게 보인다. 저만큼 달려오는 진이 뒤로 도로공사 사무실 울타리에 늘어선 넝쿨장미가 이제 막 그 붉은 봉오리를 열고 어지러이 엉켜 있다. 저렇게 넝쿨장미가 흐드러지는 봄이 오면 현수는 어쩌지 못하고 무릎을 훌쩍 올라서는 타이트스커트를 입곤 했다.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정확히 5센티미터 작은 현수는 그래서 왼쪽신발에 5센티미터의 굽을 덧댄 신발을 신어야 했다. 한쪽신발의 굽을 높여 다리 길이를 맞춘 보정용 신발을 신었으면서도 현수의 걸음걸이는 여전히 기우뚱했다. 그래서였는지 스커트 아래에서 먼저 시선을 잡는 건 굵기가 다른 현수의 다리가 아니라 굽 높이가 다른 현수의 신발이었다. 차고 맵던 바람이 봄볕에 녹아 한껏 부드러워지는 날이면 현수의 하얀 종아리는 그렇게 바람을 맞았다. 종아리 사이를 휘감고 스쳐가는 바람의 감촉이 야릇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던 현수. 그럴 때면 종아리의 잔털들이 오소소 일어서서 바람에 묻어오는 넝쿨장미 향을 맡는 것 같다던 현수. 단지 후각이 아니라 촉각으로도 향을 맡을 줄 아는 현수. 나는 현수가 보고 싶다.

 처음 현수가 내 집에 신세를 지겠다고 했을 때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10년이 넘게 혼자 살아온 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데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와 같은 침대를 써야한다는 것보다 더 당혹스러운 건 다른 누군가와 TV리모컨을 같이 써야한다는 거였다. 나만의 리모컨을 가진다는 것은 내겐 대단히 중요한 의미였다. 내게 있어 TV는 취미나 습관을 넘어 친구이자 스승이며 가족이었고 나의 두 다리였다. 나는 TV를 통해서 웃었고 TV를 보면서 여행을 다녔으며 TV를 통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TV를 통해서 세상을 익혔다. 10년 동안 퇴근하는 나를 반겨 준 것도 TV이었고 피곤에 지쳐 뒤척이는 나를 잠들게 했던 것도 TV이었고 작은 소읍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내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해준 것도 TV이었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채널을 틀 수 없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런 TV를 다른 누군가와 같이 공유해야 한다는 것은 나에겐 단순히 주거공간을 같이 쓰는 것을 넘어서 내 일상을 나눈다는 의미였다. 선뜻 허락할 수 없는 그런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현수를 내 집에 들인 것은 섬에서 왔다는 현수의 말 때문이었다. 오래 전부터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그곳이 섬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섬에서 왔고 아는 사람이 없어서 요금소에 출근을 하자면 당장 근처에 방을 얻어야한다고, 현수가 그렇게 말했을 때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요금소 가까이에 혼자 살고 있는 나를 바라봤다. 사람들의 시선을 좆아 나를 바라보던 현수는 마땅한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라고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부스 바깥쪽의 송혜라는 명찰을 이진이라는 명찰로 갈아 끼우는 진이를 뒤로하고 나는 사무실을 향해 걷는다. 지방의 중심도시를 지척에 둔 이 소읍은 십 몇 년 전 느닷없이 산중턱에 대학교가 들어서고 주변에 있던 논밭을 밀고 자동차 생산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변화했다. 내가 이 소읍의 유일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로공사의 협력업체인 일성이라는 인력업체에 입사할 수 있었던 건, 내가 기거하던 기도원과 톨게이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산자락 중턱에 대학교가 생긴 그때부터였다. 기도원은 소읍과 산자락을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는 천호라는 마을에 있었다. 하 늘 천에 항아리 호, 사람들은 천호라는 지명이 무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옛날 카톨릭 선교사들이 끌려와 순교한 성지가 있는 천호는 사람수보다 무덤수가 더 많은 산골마을이기도 했다. 대학교를 가로막고 있던 산허리를 가르는 아스팔트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나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나는 직장을 얻는 걸 포기했을 것이다. 물론 길이 새로 나기 전에도 다른 길을 돌아 톨게이트를 경유하는 버스 노선이 있기는 했지만 그 거리는 자전거로는 두 시간은 족히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어렸을 때부터 차멀미가 심했던 나는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하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힘겹게 마쳤다.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긴 했지만 큰아버지는 읍내에 방을 얻어줄 형편이 못된다고 했다. 형편이 안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아니면 기도원의 허드렛일을 맡아할 사람이 없었으니까.

 엄마가 일곱 살 먹은 나를 큰아버지 내외가 운영하는 산골의 기도원에 짐을 부리듯 놓고 사라진 후 나는 줄곧 기도원에서 기도원 원생들과 뒤엉켜 살았다. 기도원이라고는 했지만 수용소 같은 곳이었다. 치매를 앓는 노인들과 선천적으로 몸이 불편한 사람들, 혹은 정신지체를 앓는 아이들과 어쩌다가 몸이나 마음을 다쳐 요양해야하는 사람들이 누군가에 의해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맡겨진 수용소 말이다. 폐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도 그 수용소 같은 기도원에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물론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엄마가 나를 그 기도원에 데려다 놓고 사라지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기도원을 나와 지금 살고 있는 내방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대학교 덕분이었다. 대학교가 생기자 산중턱 아래에 하나둘 원룸이 들어섰다. 나만의 방과, 돈을 벌 수 있는 직장과, 직장을 오갈 수 있는 자전거와, 오직 나만을 위한 리모컨까지…….그것이면 완벽했다. 나는 그것들 외에 더 이상 세상에서 얻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따라 기도원 문을 들어선 날, 바보처럼 엄마 무릎에서 잠들어 버린 스스로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그 날 그렇게 잠들지 않고 엄마 손을 놓지 않았더라도 결국 엄마는 나를 두고 사라졌을 것이다.

 엄마 잘못이 아니야. 라고 현수는 말했다. 현수도 나도 근무가 없는 날이어서 늦은 점심을 먹고 나란히 침대에 기대어 앉아 TV를 보고 있을 때였다. TV에서는 건강프로가 재방송 되고 있었다. 성장 판이 없어지는 스무 살이 넘으면 수술을 할 수가 없다고 했어. 현수는 TV에 시선을 고정한 체 말했다. 물론 우리엄마야 수술해줄 돈도 없었지만 내가 수술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했어. 엄마한테는 그렇게 말하게 되더라고. 소아마비인 다리쯤은, 아무 일 아닌 것처럼, 길이가 다른 내 다리는 엄마한테도 큰 상처라는 걸 아니까. 현수는 유난히 가늘고 짧은 한쪽 다리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엄마는 시집오자마자 연이어 딸 셋을 낳았는데 둘째 언니 때부터 이미 보건소 가는 것에도 할머니 눈치가 보였데. 넷째인 날 낳고는 산후조리는커녕 미역국도 한 그릇 맘 편히 못 넘기셨다고. 게다가 나는 한창 바쁜 유월에 태어났고 그래서 때맞춰 예방접종을 못 시킨 거야. 현수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전하듯 얼굴에 미소까지 머금고 나를 바라봤다. 언니 내가 왜 섬을 나왔는지 알아? 우리 섬에선 말이지, 섬에 있는 작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섬을 떠나야 한다는 걸 누구나 알아. 마치 고등학교에서 섬을 떠나는 방법을 익힌 것처럼 누가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거나 강요한 게 아닌데도 다들 약속된 것처럼 대처로들 나갔어. 그런데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2년을 더 섬에 있었지. 언니처럼 차멀미가 심한 것도 아닌데 도시로 나가면 멀미가 날 것 같더라고. 그러다 일리자로프를 알게 됐지. 일리자로프? 나는 현수에게 되물었다. 일리자로프라고 키를 크게 하는 수술이야. 뼈에 핀을 꽂아 고정시킨 후 조금씩 뼈를 늘리는 수술이지. TV뉴스에서 그걸 듣고 믿기지 않아 방송국에 전화해서 확인까지 했어. 그날로 나는 섬에서 나왔어.

 그러고 보면 현수를 섬에서 나오게 한 건 현수의 짧은 한쪽 다리였다. 현수는 벌써 여러 해 동안 자신의 왼쪽다리를 5센티미터 더 키우기 위해서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현수의 마땅한 거처는 현수의 한쪽 다리가 5센티미터 커진 이후라야 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현수를 보내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때 나는 현수 모르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대학교 진입로의 상점들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나는 자전거에서 내린다. 거기서부터는 심한 오르막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자전거의 페달을 밟을 수 없었다. 차멀미 따위는 하지 않는 현수도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다. 가끔 근무시간이 겹칠 때면 현수는 제 자전거를 원룸 출입구 계단에 세워두고 내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앉았다. 그런 날에 현수는 오르막이 시작되는 그 즈음에서 상점에 들어가 항상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나왔다. 우리는 그렇게 어린 학생들처럼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자전거 손잡이를 하나씩 나누어 쥐고 오르막을 오르곤 했다.

 현수의 자전거가 계단 옆 핸드레일에 묶여 먼지를 뒤집어쓰기 시작한 건 도로공사 소속의 김 주임과 카풀을 시작하고 부터였다. 물론 그 후론 나와 근무시간이 겹쳐도 현수가 내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앉은 일은 없어졌다. 현수가 김 주임과 카풀을 시작하고부터 내게는 참 곤혹스러운 일이 생겼는데 그건 집안 여기저기 시선이 머물만한 곳에 두서없이 붙어 있는 김 주임의 사진을 보는 일이었다. 화장대 거울에, 침대 맡에, TV위에, 심지어는 식탁 유리 밑에도 김 주임의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근무시간이 엇갈려 곳곳에 김 주임의 사진이 놓여있는 집에 혼자 있게 되는 날엔 김 주임과 함께 기거하는 것만 같아 나는 맘이 불편했다.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라고 말했던 현수는 3년이 지나도록 마땅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고 내 집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현수는 밥을 먹다 말고 식탁유리 밑에 있는 김 주임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이렇게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때 나는 이제 곧 현수에게 마땅한 거처가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김 주임이라는 새로운 현수의 거처…….하지만 김 주임은 현수의 거처가 되어주지 않았다.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나는 신발장 위에 현관 열쇠와 자전거 열쇠가 묶여 있는 열쇠 꾸러미를 내려놓고 대신 신발장 위에 올려져 있던 리모컨을 집어 든다. 그리고 신발을 벗으면서 동시에 TV를 켠다. 내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맨 먼저 하는 일이 TV를 켜는 일이고 집을 나서기 위해 신발을 신고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TV를 끄는 일인 줄 아는 현수는 한 번도 리모컨을 신발장에 두고 나가는 일을 잊지 않았었다. TV를 켜니 뉴스 채널이다. 어제 밤근무를 하기 위해 집을 나가기 전까지 내가 보았던 채널이 뉴스 채널이었다는 말이다. 나는 뮤직채널로 채널을 바꾸고 음량을 조금 더 키운다. 이미 여러 번 보아서 노래가사 만큼이나 줄줄이 외고 있는 뮤직비디오가 시작되는데 TV화면이 안개 낀 것처럼 부옇다. 아침이면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 때문이다. 나는 베란다 쪽으로 나있는 창문에 커튼을 닫는다.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먹을 때까지 채널은 뮤직 채널에 고정되어 있다. 생각해보면 현수가 오기전의 나는 거의 손에서 리모컨을 내려놓지 않았었다. 사냥감을 찾듯 새로운 채널을 찾아 끊임없이 리모컨의 채널버튼을 눌러대곤 했으니까. 하지만 현수가 오고, TV를 보는 것처럼 현수를 보게 되면서 간혹 하루 종일 한 채널에 고정되어 있기도 하고 때로는 몇 번씩 같은 프로를 되풀이해 보곤 하면서도 나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치곤 했다.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기어 올라가면서 나는 드라마 채널로 채널을 바꾼다. 역시 이미 여러 번 보아서 내용을 다 아는 드라마지만 나는 채널을 바꾸지 않는다. 야간근무를 하느라 미뤄두었던 잠을 자야 하기 때문이다. 도란도란 TV속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는 자장가보다 잠들기에 더 유용하다. TV를 켜놓지 않고서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 때문에 현수는 한동안 힘들어했다. 대부분 근무시간이 달라 한 달이면 일주일정도 같이 잠드는 게 다였는데 그때마다 현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현수가 오고부터 리모컨에 대한 나의 병적인 집착은 없어졌지만 10년 넘게 길들여진 나의 오래된 습관, TV소리없인 잠들지 못하는 버릇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TV를 끄면 내가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일 것이고 내가 자꾸 뒤척이면 현수가 잠들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일 터였다.

 딱 한번 현수가 TV를 꺼달라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날은 현수가 자신한테는 한마디 언질도 없이 근무지를 옮겨버린 김 주임에게 다녀온 날이었고 집안 곳곳에 두서없이 놓여있던 김 주임의 사진이 모조리 사라진 날이기도 했다. 침대에 얼굴을 묻고 현수는 말했다. TV좀 꺼 줘…….함께 생활한 이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나만의 리모컨을 갖게 된 후 처음으로 TV소리 없이 잠이 들어야 했던 그날 밤, 물론 나는 잠들지 못했다. 지금생각하면 그 날 뜬눈으로 날을 새운 건 TV소리가 없어서가 아니었던 것 같다. TV소리가 없어진 대신 어둠 속에서 밀려오는 낮선 소리들, 맨살에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것처럼 느닷없고 낮선 소리들 때문이었다. 유난히 크게 들려오던 시계의 초침소리와 싱크대의 낙숫물 소리, 끊어질 듯 이어지던 현수의 흐느낌, 그 흐느낌이 잦아들던 새벽녘엔 바람이 일었던지 원룸건물 옆에 장승처럼 서있는 포플러 나무에서는 쉐쉐, 뱀이 풀밭 위를 지나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30일

통행권을 받으십시오 ②

천 변 둑 옆으로 띄엄띄엄 늘어서 있는 포플러 나무들이 바람을 맞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 아침, 엄마보다 이모가 나서서 외출 채비를 서둘렀다. 엄마는 방앗간 앞으로 흘러가는 천변의 누런 흙탕물을 하염없이 바라다보고 있었고 이모는 뭐에 들뜬 사람처럼 내 머리를 빗기고 있었다. 나 어디가? 이모에게 물었다. 아빠한테 갈 거라고 했다. 기차 타고 버스 타고 아빠한테 가는 거라고…….아빠한테 가는 거라는 말보다는 기차 타고, 버스 타고라는 말이 더 반가웠던 나는 이모를 돌아보았다. 정말? 이모는 머리를 빗기던 손을 내려놓고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애비 보고 싶으냐? 조금 생각하다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한 번도 아빠얼굴을 본적이 없는 나인 줄 뻔히 아는 이모가 내게 아빠가 보고 싶냐고 묻다니……. 아빠가 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보고 싶지 않다고 대답해 버리면 이모가 말했던 버스 타고라는 말도 없었던 일이 되어 버릴 것 같아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와 함께 방앗간을 나와 천 변 둑 위를 걸어가면서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정말 기차 타는 거냐고…….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차를 타려면 역으로 가야하고 역으로
가자면 천변 둑을 따라 걸을 것이 아니라 방앗간 뒤로 나있는 시장 골목을 지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정말 아빠한테 가는 거 맞지? 나는 앞서 걷는 엄마를 따라잡으며 다시 엄마에게 물었다. 아침에 천변의 노란 흙탕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하염없는 엄마의 시선이 이번엔 하늘 끝에 닿아있었다. 어디선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엄마의 하얀 치맛자락을 들추고 포플러 나무를 거칠게 흔들고 지나갔다. 포플러 잎들이 바람에 부딪쳐 쉐쉐…….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이윽고 누런 흙탕물 위에 마른 잎사귀를 비듬처럼 흩뿌렸다. 꽤나 빠르고 깊은 물살을 타고 잎사귀들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벌써 몇 년이냐. 꼭 서방이 죽어야만 수절이더냐? 이모는 기계에서 받아낸 쌀가루를 옆 분쇄기에 쏟아 넣으면서 엄마를 힐끔 쳐다보았다. 자식새끼 찍허니 퍼질러 놓고 그날로 요양입네 허고는 시골로 들어가는 바람에 청상 아닌 청상으로 산 세월은 그렇다치자, 해애가 지금 몇 살이냐? 내년이믄 학교에 갈 나이란 말여. 이모는 나를 해애라고 불렀다. 이모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나를 해애라고 불렀다. 살아 5년은 그렇다고 치고 죽고 2년은 뭐냔 말여 이것아! 도합 칠년이다. 칠년……. 이모는 분쇄기에서 하얗게 쏟아져 나오는 쌀가루를 고무다라에 받아내며 말을 이었다. 니 나이 아직 한창이고 그나마 맡아줄 시가붙이가 있는 줄 아니께 이런 자리도 나는 것여. 엄마는 댓구없이 수돗가에서 떡쌀을 일고 있었다. 어느 집에서 맡기고 간 떡살인지 양이 많았다. 이모의 그런 지청구가 어제 오늘일이 아닌 줄 아는 나는 오히려 무심히 방앗간 바닥에 공깃돌을 뿌렸는데 그날따라 조리질을 하는 엄마의 어깨는 유난히 흔들리고 있었다. 길게 할 거 읍다. 내일이라도 당장 다녀오니라. 이모가 다짐받듯 엄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눈 한번 질끔 감았다 뜨믄 되는 것이여. 알었냐? 말하고서는 생각난 듯 이모는 공깃돌을 줍는 나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하늘만 쳐다보며 걷던 엄마가 키를 낮춰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 눈에 빨간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엄마는 그때 이모가 말했던 것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엄마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또독, 내 손등 위로 떨어졌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천 변 둑을 내려왔다. 그리고 역으로 가는 시장골목으로 들어섰다. 잰걸음으로 엄마걸음에 맞춰 걸어갈 때마다 내 발 밑에서 딸랑딸랑 방울소리가 났다. 난생처음 가는 기차 나들이 기념으로 이모가 새로 사준 분홍색 구두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날 분홍색 구두에서 들려오던 방울소리처럼 유리구슬이 바닥에 흩어지는 것 같은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TV에서 나오는 소리인가 하고 TV화면을 보니 TV에선 여전히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드라마가 돌아가고 있었다. 소리를 좇아 시선이 닿은 곳은 TV옆에 놓인 전화기였다. 현수가 가버린 이후로 좀처럼 그 전화기가 울리는 일이 없었다. 한동안 듣지 못했던 전화벨소리에 새삼스러워 하느라 전화 받는 걸 잠시 잊고 있다가 나는 서둘러 수화기를 들었다. 현수일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수화기를 들었는데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남자였다. 누님? 저편에서는 송혜씨 댁이냐고 확인하고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누님 저 혁입니다. 나는 재빨리 그리 많지 않은 내 주변의 사람들을 떠올린다. 나를 누님이라고 부를만한 남자 중에서 혁이라는 이름이…….생각을 더듬는 사이 혁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다시 말한다. 저 어렸을 적에 누님을 본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를 따라서 누님 사시는 동네에 갔었는데 물론 그때는 누님이 누님인줄 몰랐었지만요. 수화기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나는 느낀다.

기도원 앞에 굳은 듯 서 있던 엄마 옆에서 흙장난을 치던 꼬마가 생각난다. 내가 갓 고등학교에 입학한 봄이었다.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피어오르는 신작로를 자전거를 달려 하교하던 길에 나는 기도원 앞에 서있는 한 여자를 보고 자전거에서 내려섰다. 해애야…….엄마가 나를 불렀다. 내 이름은 해애가 아니라 혜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알았다. 내 이름이 해애가 아니라 은혜 혜. 송혜라는 걸. 혜라고 부르려면 발음상 상당히 귀찮아 진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자신들이 혜라고 이름을 지어놓고 혜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나를 낳아놓고도 나를 버려두는 것과 같은 거라고, 나는 여전히 나를 해애라고 부르고 있는 엄마에게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만 두었다. 이미 나를 져버린 사람에게 늘어놓는 투정이야말로 정말 구차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해애야! 엄마가 다시 나를 불렀다. 나는 엄마를 향해 돌아서는 대신 흙장난을 하고 있던 꼬마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꼬마가 환하게 웃었다. 아래 눈두덩이 도톰하게 부풀어 올라가는 바람에 웃는 아이의 눈은 초승달이 되었다. 그런 웃음을 짓던 꼬마가 혁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인가?

나는 전화기를 든 체 일어서서 커튼을 젖힌다. 창밖엔 아직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봄볕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억센 햇볕이었다. 그 이후에도 나는 여러 번 기도원 앞을 서성이던 엄마를 보았었다. 항상 엄마 옆에는 그 꼬마임을 알아볼 만큼씩 커가고 있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번번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어머니가 위독하십니다. 혁이라는 남자가 말해놓고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전화기 속의 막막한 정적을 저 혼자 켜져 있는 TV소리가 채운다. 얼마나 잠이 들어 있었던 걸까? 건물 옆에 장승처럼 서 있는 포플러 나무의 키 큰 그림자가 건물마당에 드리어져 있다. 강물위로 튀어 오른 물고기의 반짝이는 비늘처럼, 햇빛을 등진 포플러 잎들이 시멘트마당에서 그림자로 튀어 오른다. 나는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커튼자락을 부여잡았다. 버스를 탔을 때 올라오는 차멀미처럼 느닷없이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파 왔다. 지독한 차멀미!

멀미는 기차에 처음 앉았을 때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시작됐다. 기차에서 내려 엄마는 다시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 옆의 약국에서 엄마는 멀미약을 사서 내게 먹였다. 하지만 멀미는 버스에서 더 심해졌다.

시골버스는 터미널에서 사람을 태울 때에 이미 만원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버스를 탄다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던 나는 꾸역꾸역 버스를 올라오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짐짝처럼 밀려다니고 있었다. 버스가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밀치고 들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순간 엄마 손을 놓치고 말았다. 손을 놓치자 갑자기 숨이 막혀 왔다.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그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불안감이 나를 엄습했다. 눈 한번 질끔 감았다 뜨면 되는 것이여……. 그렇게 엄마에게 말해놓고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어쩔 줄 몰라 하던 이모의 눈빛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엄마를 불렀다. 그때 이미 내 목소리는 거의 울먹임이었다. 한순간에 숨구멍이 막힌 듯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버스 천장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엄마를 부름과 동시에 쓰고 시큼한 것이 목을 넘어왔고 나는 그대로 앞의 아저씨 바지에 목엣 것을 게워내고 말았다. 아저씨가 기겁을 하며 주의를 물렸고 조금씩 뒷걸음질하는 사람들 틈에 엄마의 손이 내 손을 잡는 걸 느끼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버스 안이 아니라 엄마의 등이었다. 엄마는 나를 업고 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신작로를 걷고 있었다. 시골길엔 지나는 사람도 없었고 지나는 차도 없었다. 나를 업고 걷는 엄마가 힘에 부치는지 숨소리가 거칠었지만 나는 잠에서 깨지 않은 척 했다. 엄마 등에서 내리고 싶지 않았다. 엄마와 나는 그렇게 한참을 걸어 담쟁이가 빽빽이 얽혀있는 집 앞에 섰다. 엄마가 나를 내려놨다. 땅에 내려서자 빙글 다시 한 번 어질증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대문 옆에 세워져 있는 빛바랜 철제 안내판에 글씨가 써져 있었지만 그때까지 글을 몰랐던 나는 뭐라고 써져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에게 대신 읽어 달라고 하고 엄마를 올려다보니. 엄마는 기도원 담을 억척스럽게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만을 뚫어져라 보고 있을 뿐 대답이 없었다. 저거 뭐라고 읽어 엄마? 나는 다시 물었다. 생명샘 기도원. 꾹꾹 누르듯이 엄마는 안내판의 글씨를 읽어주었다. 나는 안심했다. 기도원이면 아버지가 있는 곳이 확실했다.

하지만 그 기도원에 아버지는 없었다. 엄마와 나를 맞은 사람이 아빠인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큰 아버지였다. 엄마는 그 기도원에 이미 아버지가 없는 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큰아버지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 무릎에서 또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깨었을 때 엄마는 없었다. 엄마는 그렇게 사라졌다. 내가 잠든 사이에 거짓말처럼…….

나는 우두커니 침대 위에 앉아 있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교대근무를 하기 위해서는 그쯤에서 저녁을 챙겨먹고 출근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불도 켜지 않고 TV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 앉아있었다. 언니 나 떠날 거야. 먹먹한 정적을 헤집고 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근무를 끝내고 현관문을 들어서는 순간 어둠 속에서 현수가 말했다. 수술 같은 건 이제 생각 안 할래. 그때 나는 묻고 싶었다. 현수가 말하는 수술이 다리 길이를 늘이는 수술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현수 뱃속에 있는 아이를 두고 하는 말인지 하지만 나는 현수에게 그걸 물을 수 없었다. 어째든 변함없는 사실은 현수가 내 집을 떠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방안을 가득 채운 어둠보다 더욱 막막한 무엇인가가 밀려드는 것 같아 숨을 몰아쉬었다.

낮에 걸려온 전화기 속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온다. 사실은 몇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부터 어머니가 치매를 앓고 계셨어요. 혁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어머니가 위독하십니다. 라고 말해놓고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변명처럼 말했었다. 정신이 흐려지고부터 건듯 하면 천호에 다녀와야 한다면서 무작정 집을 나가곤 하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기여 며칠 전에는 교통사고가 나고 말았습니다. 정신이 든 후에 어디를 가시던 길이냐고 물어보니까 천호엘 가던 길이었다고, 네 누님을 데리러 가던 길이었다고. 그때서야 저도 알았습니다. 어린 날에 어머니를 따라 여러 번 다녀온 곳이 천호였고 그곳에서 보았던 사람이 누님이었다는 것을......,그렇게 말해놓고 혁이라는 남자는 다짐을 받듯 다시 말했다. 서울 00병원입니다. 오실 거죠? 나는 그때 대답대신 리모컨을 들어 저 혼자 떠들고 있는 TV를 껐다. 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전화기 저쪽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쯤에서 전화를 끊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이번엔 전화기 저편에서 혼잣소리 같은 말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언젠가 어머님을 따라서 이모님 댁에 간 적이 있었어요. 이모님 방앗간 앞으로 꽤 넓은 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어머님이 한번은 그러시더라고요. 너 낳기 전에 네 위에 누이가 한 명 있었는데 저 물살에 떠내려 보냈다고. 그때 나도 네 누이랑 같이 저 물 속으로 뛰어들었어야 하는 건데 누이만 보냈다고……. 나 살자고 네 누이만 보냈다고……. 살아있는 누님을 가슴에 묻고 사셨던 어머니세요. 용서를 하란 말은 아닙니다. 그냥 한번 손이라도 잡아주셨으면.....,

독백처럼 들려오던 말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사라지고 뚜뚜 신호음이 들릴 때까지 나는 한참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교대시간은 한참 지나 있었고 근무를 하기 위해서 나선 길도 아니었지만 나는 있는 힘껏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전날 TV에선 비가 올 예정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날씨는 유리알처럼 맑았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자전거 거치대에 자전거를 세우고 돌아서는데 빵빵 경음기 소리가 들린다. 나는 소리가 나는 갓길 쪽을 돌아보았다. 낮이 익은 차였지만 고속도로 요금소에서 각양각색의 차를 대하는 내게 어디 낮이 익은 차가 한둘일까 싶어 나는 무심히 사무실을 향해 돌아섰다. 사무실 안에 근무를 바꿔줄 누군가가 있어야 할 텐데…….장미 울타리 넘어 사무실 안을 기웃거리며 걸어가고 있는데 이번엔 경음기 소리대신 송 혜씨?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다. 뒤를 돌아보기 전에 나는 이미 나를 부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산타나의 마리아 마리아, 그 남자였다.

남자는 어제저녁 교대시간에 맞춰 요금소에서 날 기다렸다고 했다. 왜죠? 나는 투명스럽게 물었다. 유니폼을 차려입지 않은 부스 밖에서까지 친절을 고집할 마음은 없었다. 그야 지갑 때문이죠. 남자는 입 꼬리를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나는 남자가 던져주고 간 지갑이 생각났다.

나는 남자의 옆자리, 조수석에 앉았다. 이 남자에 대해 아는 건 없다. 그저 한 달 전부터 일주일에 한번, 정해놓은 것처럼 내 부스로 들어와 물색없이 수작을 걸던 남자라는 사실과 그 남자가 내민 통행권을 요금 정산기에 넣으면 서울이라는 출발지가 뜬다는 것 밖에는. 하지만 나는 남자의 차에 탔다. 어쨌든 남자의 차는 서울을 향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통행권 발급기가 가까워지자 남자가 유리창을 내린다. 통행권을 뽑아 가십시오! 요금소에 근무했던 지난 시간동안 TV소리만큼 무수히 들었던 기계음이건만 처음 듣는 것처럼 울림이 길었다. 남자가 통행권을 뽑아들고 그것을 놓아 둘만한 곳을 찾아 머뭇거리다가 옆자리의 나에게 건넨다. 나는 통행권을 받아들고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엄마 등에 업혀 처음 발을 내딛은 천호였다. 생각해보면 무덤 속 같은 시간이었다. 집을 나설 때는 그랬다. 손이나 한번 잡아보자고, 대신 발작 같은 차멀미를 감당해야 하겠지만 그저 손이나 잡아보자고. 하지만 막상 통행권을 손에 쥐고 보니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서서 내가 닿을 곳이 어디인지 안개 속처럼 모호하기만 하다. 치매를 앓고 나서야 나를 데려와야 한다고 말했다는 엄마를 만나러 갈 수도 있다. 아니면 여전히 한쪽 다리를 기우뚱거리며 살고 있지만 지금은 새로운 거처를 마련한 현수를 만나러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도 현수도 정작 그 앞에 서게 되면 어떨지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전처럼 다시 발길을 돌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찌됐든 확실한 건 내가 지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세상과 통하는 표를 얻은 양 통행권을 손에 쥐고, 지난 내 오랜 칩거를 보상받기라도 하듯 고속도로를 말 그대로 고속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멀미는 처음 남자의 차에 올라타서 훅! 새 차 냄새를 맡았을 때 이미 기미를 보였다. 제가 학교를 이쪽에서 나왔습니다. 남자가 달리는 차의 속력을 높이며 말했다. 거 있죠. 톨게이트 옆에 있는 학교…….학교 후배들하고 뭘 좀 해본다고 일주일에 한 번씩 발도장 찍은지가 한 달입니다. 학교를 오가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여러 번 봤지요. 남자가 작정한 듯 이야기를 시작한다. TV토크쇼에 나와 시시콜콜한 주변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처럼……. TV가 아니니 듣기 싫다고 채널을 돌릴 수도 없는 일이고 나는 자동차 시트 깊숙이 몸을 기댄다. 나는 이 남자에 대해 아는 게 없다. 하지만 고속도로를 달려 서울 요금소에 도착할 즈음에는 어쩌면 이 남자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때쯤이면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그것 또한 확실해질까?.

멀미는 아직 미미하게 목울대 안쪽에서만 바장이고 있었다. 나는 문득 남자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어쩌면 남자의 조곤조곤한 말소리가 내 지독한 차멀미를 잠재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TV드라마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가 곤하게 나를 잠재우는 것처럼.

심사평

 이 신성한 첫새벽에 굳게 빗장을 닫아 건 문학의 장원이 잠시 사잇문을 연 틈에 나발소리처럼 길게 들려오는 금계(金鷄)의 고고한 울음을 듣게 된 이가 누구인고? 그들에게만큼은 이 울음소리가 오래 인내하며 기다린 참다운 한 소식이 될 수 있기를!

 올해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에 응모된 작품들을 모두 읽고난 소회가 바로 그러했다. 당선자는 다른 응모자들에 비해서 분명 더 오래 깨어 있었고 더욱 인내했으며 자신의 세계에 더 명징하고자 애를 쓴 흔적이 역력했다. 그에 비한다면 여기 본심에서 언급된 이들을 비롯한 많은 작가 지망생들은 장인으로서의 일정한 수준을 갖추고는 있었지만 무엇인가 한 두어 가지 흠결들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지 못하여 각자 드러내 보이려는 세계가 흐릿하였다.

 노혜옥씨의 ‘폭설’은 경제가 어려운 현실과 그 폭설 같은 상황에 처한 주인공이 걸어가고 있는 앞길의 암울함을 잘 묘사한 작품이다. 아버지를 비롯한 과거의 인물들이나 사건 처리도 비교적 무난하였으며 평이한 가운데 문장 호흡도 고른 편이었다. 하지만 상황설정과는 달리 스토리 자체는 감동을 주지 못했으며 주인공의 마지막은 너무 구태의연한 영상 결말을 보는 듯했다.

 노원씨의 ‘오드 아이(Odd Eye)’는 문장이 아주 돋보였으며 기지촌이라는 독특한 작품 배경과 사진 작업이라는 화자의 행위가 신선해 보였다. 얘기를 끌어가는 작가의 입심도 높이 살만 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진을 오려 붙이는 화자의 무의미한 행위에 대한 반복적인 묘사가 거슬렸으며 스토리는 오히려 그 행위들 속에 가려지는 바람에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단편소설에서는 모든 게 구비되어야 하되 넘치는 부분 또한 없어야 할 것이다.

 조하나씨의 ‘나쁜 연인’이라는 응모 작품에도 똑같은 지적이 뒤따라야겠다. 섬세한 묘사라든가 구성, 소설을 이끌어가는 힘, 스토리 모두 흠잡을 데 없는 완결미를 자랑한다. 그런데도 선뜻 이 작품을 선택하지 못한 이유는 아무리 단편이라고는 하더라도 문학이라는 형태로 인간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줘야 한다는 우리 자신들의 약속에는 조금 미치지 못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외래어 남발이 문제가 될 수 있었으며 이유 없는 구타를 당하면서도 쿨(cool)하게 세상을 마주하고 있는 화자, 작품은 그만큼 건조한 느낌을 주었고 이 때문에 무엇인가가 빠져버린 듯한 공허감이 흠이라면 하나의 흠이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정원자씨의 ‘통행권을 받으십시오’는 화자 자신의 갈등 묘사가 적은 점이라든가 TV에 집착하는 심리에 대해 설득력이 약해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조금쯤은 산만한 구성을 지적할 수도 있겠다. 그런 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고속도로 톨게이트라는 독특한 공간을 활용한 측면이라든가 한쪽 다리가 짧은 여인에 대한 묘사가 생동감 있게 다가왔으며 끝 부분에 우연히 만난 사내와 동행하는 설정 등이 희망적으로 읽혔다.

 과거의 사건들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도, 그리고 재빨리 현실 속으로 방향을 트는 솜씨나, 그 과거가 현재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은근슬쩍 내비치는 속내 묘사도 돋보였다. 무엇보다 우리는 당선자로부터 희망을 높이 샀다고 고백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지금의 희망이 유효한 건 아니다. 그리고 이 희망은 작품 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외적인 가치일 수도 있음을 명심했으면 한다. 축하의 말에 앞서서 먼저 이 작가에게 희망을 주문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심사위원

서정인(소설가), 이병천(소설가)

 

되돌아보는 일, 이전 시리지만은 않다..정원자씨 당선소감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2004년은 나에게도 유난히 힘들고 아픈 한해였다.

 졸업과 함께 부모님에게로부터 독립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일상의 상처들이 삶의 멍울로 흔적을 남기며 쌓여질 때면 나는 수시로 지난날을,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살자 다짐하곤 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되돌아보는 일이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보탠다는 것은 그저 숫자를 늘려가는 것 뿐만이 아니라 더해지는 나이만큼 힘든 기억들이 차곡차곡, 꼭 그만큼씩 쌓여진다는 것. 그래서 되돌아보면 볼수록 아프고 시리다는 것.

 비겁한 일이지만 그래서 나는 돌아보고 반성하고 다시 나를 독려하고 그러기보단 잠시 외면해주거나 모르는 척 넘어가 주거나 하면서 버텨왔던 것 같다. 그러다 중독이 되고 습관이 되고......

 가을이 끝나갈 무렵 나는 그동안 내손에 쥐고 놓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많은 것들을 놓아버렸다. 10년을 버티던 TV가 느닷없이 고장이 났고,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해왔던 일을 놓아버린 나는, 나의 두 다리였던 자동차의 열쇠를 동생에게 넘겨주고 작정한 듯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마치 겨울잠에 들어가는 짐승처럼 나는 그렇게 방안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그 대신, 그동안 내려놓았었던 것을 다시 집어 들었다. 졸업하고 10년 가까이 들지도, 놓지도 못하고 그저 짬짬이 꺼내보며 마음만 헤집던 오래된 꿈.

 이제…. 돌아볼수록 설레고 행복한 기억하나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힘들었던 기억들이 아프지만은 않다.

감사할 분들이 많다는 것 또한 큰 행복이다.

 한사람의 독자로서 존경하던 서정인 선생님과 이병천 선생님으로부터 점검을 받았다는 것은 내게 또 다른 기쁨이고 영광이다. 더불어 내 일처럼 기뻐해준 충애언니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은선이. 그리고 언제나 크고 영원한 나의 재산인 가족과 당선 소식을 전해 듣던 순간에 마침 함께 있어 기쁨을 나눌 수 있었던 한 사람에게도 고맙다 전하고 싶다.

<정원자 약력>

1972년 완주 출신
백제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인테리어 기사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