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편 소설

200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마네킹 24호 / 조영아

시인 최주식 2010. 2. 5. 23:44

마네킹 24호 / 조영아


 '여자의 얼굴이 거울에 정면으로 비친다. 광대뼈가 불거지고 각이 진 얼굴은 조금 큰 편이다. 요즘 유행하는 녹두색 반코트를 입었다. 거울 속으로 점원이 들어온다. 진열대에 있는 모자 중 하나를 집어 여자에게 권한다. 여자가 모자를 받아쓴다. 얼굴이 더 커보인다. 점원은 또 다른 종류의 모자를 꺼내놓는다. 여자는 모자를 썼다가 벗었다가 한다. 잠시 후 거울 속에서 점원이 사라진다. 여자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모자 하나를 황급히 가방 속에 구겨 넣는다. 여자가 거울 밖으로 나가고 다시 점원이 들어온다. 점원은 진열대 위에 널려 있는 모자들을 정리한다.

 쇼윈도를 새로 단장하면서 폭 오십 센티미터 정도의 아래위로 긴 거울이 마네킹 새간에 붙여졌다. 거울은 양면으로 되어 있어서 밖에서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도로의 풍광이 그대로 반사돼 바로 옆에 서 있는 마네킹 모습과 함께 색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이를테면 몸매를 드러낸 와인빛 스트라이프 벨벳 재킷에 크림색 핫팬츠를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검은 부츠를 신은 여자가 눈 내리는 거리에 서 있다면 지나가는 사람 누구든 돌아볼 일이었다. 그 거울을 나는 지금 쇼윈도 안쪽에서 보고 있다.

 시선을 밖으로 옮긴다. 백화점 출구를 빠져나온 여자가 쇼윈도 앞을 막 지나치려한다. 여자는 쇼윈도 거울 속에서 제 모습을 발견한 눈치다. 곁눈질로 슬쩍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다. 나는 숨을 안으로 삼키고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여자는 움찔 놀란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더 크다. 의식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려니까 눈까풀이 자꾸 내려온다. 당황한 여자가 바삐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나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눈을 깜박거린다.

 지나가던 노인이 쇼윈도 가까이 다가온다. 노인은 아이스크림을 핥듯이 천천히 쇼윈도를 훑는다. 양 옆에 있는 마네킹과 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끈끈한 노인의 시선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와 치마 단이 끝나는 허벅지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허리를 거슬러 불룩한 가슴께까지 단박에 치고 올라온다. 종아리에 끈끈한 타액이 줄줄 흐르는 것 같다. 그래. 조금만 더. 나는 노인과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린다. 드디어 눈이 마주친다. 옳지. 벗겨진 그의 머리에 당장 입맞춤이라도 할 듯 요염한 눈빛으로 한쪽 눈을 살며시 감아 보인다. 멋쩍은 노인이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저런 유의 사람을 보면 정말 마네킹이 된 기분이 든다.

 사차선 도로를 빼곡히 메운 차들이 좀처럼 움직일 줄 모른다. 길 건너 고층빌딩에서 유니폼을 입은 여자들과 정장차림의 남자들이 빠져나온다. 그들은 신호등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린다. 점심을 먹으러 백화점 식당코너를 찾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얼굴에는 먹는 거에 대한 기대감이나 즐거움 따위는 없어 보인다. 간혹 옆 사람과 끊임없이 조잘대거나 고개를 젖혀가며 웃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아무런 표정 없이 신호등을 건너 이곳 백화점 지하로 향한다.

 파란불이 켜지고 가까워져오는 그들의 얼굴을 살펴보면 플라스틱이나 인조고무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마네킹과 별다를 바 없다. 그 표정에 있어서는 오히려 내 양 옆에 서 있는 마네킹 23호와 25호만도 못하다.

 마네킹 23호는 이중적이다. 살짝 치켜든 턱과 슬며시 내리깐 시선에는 도도함과 유혹의 몸짓이 공존한다. 반면에 마네킹 25호는 이지적이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모습이다. 먼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의 표정은 순진무구하다. 그녀는 누군가와 마주치길 꺼린다. 그러나 그녀 안에는 이미 무수한 누군가가 들어 있다. 이들은 걸치는 옷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사람이 서로 다른 성격과 개성을 지녔듯이 이들 또한 그렇다. 하루에도 이런저런 분위기의 사람들이 이들을 거쳐 간다. 마네킹 23호와 25호는 사람보다 더 인간적이다. 사람보다 매혹적인 23호와 25호 사이에서 인간인 내가 눈길을 끌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이 백화점 앞에 다다를 즈음 나는 포즈를 바꾼다. 소품으로 전시된 작은 의자에 오른발을 살짝 올리고 한 손은 허리에, 다른 한 손은 자연스럽게 내린다. 갑작스런 내 움직임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린다. 아침 조회 때마다 강조되는, '마네킹은 마네킹이되 움직임을 최소화하여 살아있음을 인지시킬 것'이라는 교육강령에 의한 것이지만 마네킹 23호와 25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철저히 계산된 나의 몸부림이다. 안경을 낀 남자가 익살맞은 표정으로 한쪽 눈을 질끈 감아 보인다. 99퍼센트의 정(靜)과 1퍼센트의 동(動)이 빚어낸 기막힌 조화의 산물이다. 유니폼을 입은 몇몇 여자들이 쇼윈도 가까이 와서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본다. 팔짱을 끼고 잔뜩 움츠린 자세로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을 구경한다. 저들 월급을 뭉텅이로 축내야 살 수 있는 옷들이다. 쇼윈도 앞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다시 하나 둘 흩어진다.

 기연이 교대를 하기 위해 나온다. 민트그린의 우아한 원피스 차림이다. 기연은 모 대학 의상 디자인과 졸업 작품 발표회 때 학생 모델로 참여했다가 윤 실장의 눈에 띄어 백화점 모델이 되었다. 쟁쟁한 경쟁을 뚫고 들어온 나나 다른 직원들의 눈에 그리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기연은 신체조건이 나보다 좋다. 검은 피부에 속하는 나는 핑크나 오렌지 계열의 옷을 소화하기가 힘들다. 반면에 얼굴이 흰 기연은 어떤 색의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린다. 그런 기연이 신경 쓰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윤 실장은 내 치마폭에서 놀고 있다. 이를 알 리 없는 기연이 내게만은 깍듯이 대했다.

 나는 쇼윈도에서 내려와 탈의실로 향한다. 백화점 안은 벌써 봄이 무르익었다. 긴 부츠가 즐비했던 신발 코너에는 화사한 봄 신발이 외출을 기다린다. 액세서리 코너의 알록달록한 스카프들이 꽃이 핀 봄 동산을 연출한다. 선물포장 코너를 지나 비상구로 나온다. 탈의실은 지하 2층에 있다. 옷 속으로 찬 기운이 스민다. 종아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몸은 한없이 움츠러드는데 바싹 마른 속에선 뿌연 흙먼지가 인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간다.

 탈의실에 들어선 나는 냉장고 문을 연다. 생수병을 꺼내 물을 마신다. 뿌옇게 일어나던 흙먼지가 가라앉는다. 생수 한 병을 거의 다 마시고 나서야 소파에 주저앉는다.

-혹시 다음증 아니야?

 언젠가 섹스를 끝내자마자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나를 바라보며 윤 실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거 심각한 거다 너. 병이야.

-병이라니요?

-내가 보기에 넌 진짜 병이다. 그것도 중병!

 침대에서 빠져나온 윤 실장이 욕실로 들어갔다. 곧이어 물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한동안 생수병을 든 채로 서 있었다. 몸속으로 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내 몸은 거대한 수로였다. 둥글고 긴 관으로 물이 흘러갔다. 물은 거침없이 흘러 내 몸을 관통했다. 물살이 점점 세지면서 수압이 올라갔다.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물 마시는 게 병이라니. 물은 내게 일종의 신경안정제 역할을 했다. 물을 마시면 허전하고 불안한 마음이 사라졌다. 어쩌면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물, 그 자체보다 마시는 행위에 더 길들여진 탓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일을 하기 전에는 지금보다 더 많이 마셨다. 길을 가다가도, 쇼핑을 하면서도, 심지어는 잠을 자다가도 습관처럼 물을 찾았다. 중독도 일상 속에선 그저 밥 먹고 자는 일처럼 평이하게 느껴졌다. 물은 자연스럽게 흘러들었고 집요하게 나를 물고 늘어졌다. 병일 수도 있겠구나, 뭐 그뿐이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이것으로 죽음에 이른다 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뭔가 결핍되어 있을 때 그런 증상이 나타난대.

 샤워를 마친 윤 실장이 물기를 닦으며 나왔다. 나는 들고 있던 물을 머리에 부었다. 머리칼을 타고 물이 흘러내렸다.

-특히 애정 결핍 같은 거 말이야.

윤 실장이 뒤에서 내 몸을 감싸 안았다.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걱정마. 내가 있잖아.

 윤 실장이 목덜미에 흘러내리는 물을 부드럽게 핥았다. 거친 숨소리가 온몸을 두드렸다. 깊고 은밀한 그곳에 말간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의 격렬한 몸짓이 차오르는 수면을 쉴 새 없이 흔들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차오르는 욕망이 두려웠다. 욕망이 습관이 될 수도, 그것이 진실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정말 물로 느껴질까 겁이 났다.

 정 코디가 양손에 옷걸이를 들고 들어온다.

"또 물이야? 생수 회사에서 미스 서한테 공로상 같은 거라도 줘야 되는 거 아냐? 벌써 세 병이나 해치웠어."

정 코디는 옷걸이를 손에 든 채로 빈 생수병을 턱짓으로 헤아린다.

"누가 들으면 술 마신 줄 알겠어요."

 나는 정 코디 손에 들린 옷을 받아들어 행거에 건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술을 그렇게 마신다면 또 몰라."

정 코디의 주량은 1층 쇼윈도 관리팀에 정평이 나 있었다. 회식자리에서 술을 제일 많이 마시는데도 정 코디는 끝까지 말짱했다. 윤 실장을 포함한 몇몇 남자들이 있었지만 정 코디를 이기지는 못했다.

"만날 그렇게 목이 말라?"

 나는 원피스 뒤에 꽂았던 핀을 빼내며 웃어보인다.

 엄마는 언제나 밤늦게 들어왔다. 나는 창문에 기대어 앉아 밤을 기다렸다. 낮 동안 방바닥에 고여 있던 햇볕이 마르고 검은 그늘이 일렁일 때쯤이면 잔뜩 구부린 등 안쪽에서 타닥탁 마른 장작에 불붙는 소리가 났다. 몸속의 장기들이 새들새들 말라 배배 틀리는 것 같았다. 나는 몸을 동그랗게 만 채로 방바닥을 굴러다녔다. 썩은 호두를 흔들어대는 것처럼 형편없이 쪼그라든 몸속의 장기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서로 부딪치는 듯했다. 그 소리가 크면 클수록 몸속은 점점 비워지는 듯했고, 자꾸 빈 껍데기만 남은 죽은 달팽이가 떠올랐다. 무엇이라도 채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빈 냉장고에 먹을 거라곤 물밖에 없었다. 나는 물을 마셨다. 그때 내가 기다린 것은 엄마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었다. 남자건 여자건, 어린이건 노파건 상관없이 사람이면 되었다.

"그렇게 물을 마시는데 어떻게 한 시간씩 참고 서 있니?"

 내가 옷을 벗자 정 코디가 행거에서 옷을 꺼낸다. 체리핑크색 투피스다.

"이야, 환상적이다!"

"윤 실장이 각별히 신경 쓴 거야."

윤 실장은 디자이너다. 기연이와 나 그리고 마네킹 23, 25호가 입는 옷들은 모두 윤 실장의 작품이다. 윤 실장과 함께 처음으로 저녁을 먹을 때였다. 그는 핏물이 배어나는 스테이크를 잘라주며 속삭였다.

- 넌 내가 본 마네킹 중에서 가장 완벽해. 봄에 중요한 패션쇼가 있어. 그때 멋지게 데뷔시켜줄게.

 그가 자른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어주었다. 부드럽고 연한 살코기를 씹을 때마다 입 안에 핏물이 고이는 것 같았다. 나는 웃으며 핏물을 삼켰다. 많이 먹어. 그는 계속해서 핏물이 흐르는 스테이크를 내 입 안에 넣어주었다. 모델이 된다는데 그까짓 스테이크쯤이야 얼마든지 먹어줄 수 있었다. 그와 헤어지자마자 나는 가로수 아래 쭈그리고 앉아 스테이크를 다 게워냈다. 나는 이미 모델이 되어 무대 위를 걷고 있었다.

"점심은?"

"한 타임 더 뛰고 먹으려구요."

 기연과 나는 교대로 한 시간씩 쇼윈도에 선다. 점심은 각자 빈 시간에 알아서 해결하는 편이다. 한 시간 쉬는 시간이 있지만 별반 쉴 수 있는 시간도 못 된다. 다음 전시 준비를 위해 옷을 갈아입고 화장이나 머리를 고치다 보면 잠시 누워서 눈을 붙인다거나 여유 있게 밥을 먹을 수도 없다.

 가운을 걸친 채로 거울 앞에 앉는다. 마주 앉은 정 코디가 내 얼굴에 클렌징크림을 바르고 문지른다. 입는 옷에 맞춰 화장을 하다 보니 어느 때는 옷을 갈아입을 적마다 화장을 고치는 경우도 있다. 하루 동안 입는 옷이 대개 비슷한 톤이기 때문에 아이섀도나 입술색만 부분적으로 수정한다. 그러나 색상 차이가 많이 나는 지금 같은 경우는 기초화장부터 다시 해야 한다. 정 코디는 빠르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클렌징크림을 닦아낸다. 거울 속에 화장이 지워진 맨 얼굴이 드러난다. 수정하기 편리하도록 아예 뽑아버린 반쪽짜리 눈썹이 흉물스럽게 드러난다. 화장을 지운 내 얼굴은 틀에서 처음 찍혀 나온 마네킹 같다.

 마네킹은 머리, 몸통, 팔, 다리를 각각 제작하여 조립됐다. 과정을 거듭할수록 얼굴 모습이 차츰 변해 갔다. 처음 틀에서 찍어냈을 때 메이크업하기 전의 얼굴은 눈 코 입의 윤곽만 두드러진 것이 마치 얇은 양막을 뒤집어쓴, 습자지 같은 양막이 찢어지지 않을 만큼만 숨을 쉬고 있는 자궁 속의 태아 모습 같았다.

 메이크업 과정을 거치면서 확실한 마네킹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눈썹과 눈동자가 검게 그려지고 입술이 붉게 물들면서 숨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야말로 고무인형 그 자체였다. 양막도 자궁도 태아도 숨소리도 전혀 연상되지 않는 딱딱한 인조 얼굴이었다.

"인간들이 어쩜 그러냐?"

 오른쪽 눈썹을 그리면서 정 코디가 말한다.

"무슨 일 있어요?"

"어제 뉴스 못 봤어? 백화점에서 상습적으로 물건 훔친 여자가 글쎄 사장 부인이라 신다."

 정 코디 손에 힘이 들어간 탓인지 흥분한 탓인지 오른쪽 눈썹 끝이 부자연스럽게 그려진다. 한발 물러서서 가늠해보던 정 코디가 클렌징크림을 묻혀 오른쪽 눈썹을 지운다. 다시 반쪽짜리 눈썹이 된다.

"뭐, 이유가 있겠지요."

아까 매장에서 모자를 훔치던 여자가 떠오른다.

"이유는 무슨. 심심해서 그랬다는데. 배부르고 할 일 없으니까 별짓을 다 하는 거지. 아이참, 오늘따라 왜 이러냐."

 이번에는 눈썹 안쪽이 너무 굵게 그려졌다. 다시 지우고 그린다. 눈썹이 제대로 그려지자 눈두덩에 핑크빛 아이섀도를 펴 바른다. 내 얼굴은 점점 체리핑크색 투피스에 맞는 마네킹이 되어간다.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마네킹 만드는 공장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마네킹 눈과 입술에 색깔 입히는 일을 했다. 집 뒤쪽의 허름한 건물이 아버지의 작업실이었다. 아버지는 공장에서 가져온 마네킹 머리통을 놓고 연습을 했다. 연습이라기보다는 연구를 하는 듯했다. 어쩌다 아버지 몰래 들어가 보면 수십 개의 목이 잘린 머리통들이 가지각색의 표정으로 뒹굴고 있었다. 슬프거나 기쁘거나 혹은 분노하거나 하는 식의 표정들이 아니었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데 웃음소리가 들리고 간간이 흐느낌이 섞여 있는가 하면 반대로 흐느낌 속에 명랑한 웃음소리가 들어있기도 했다.

 나는 그 중에 하나를 들어올렸다. 머리통 속을 들여다보았다. 텅 빈 속은 깊은 동굴처럼 음습했고 역한 플라스틱 냄새가 났다. 내 머리를 디밀어 보았지만 구멍이 너무 작았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텅 빈 머리통 속에 무엇인가를 채워 넣고 싶었다. 구석에 있는 수도로 갔다. 나는 머리통을 거꾸로 세우고 그 속에 물을 부었다. 물이 점점 차오르자 기분이 묘해졌다. 몸에 차츰 무게가 실리는 것 같았다. 몸속에 물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말라비틀어져 제멋대로 돌아다니던 몸속의 장기들이 다시 제 모습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또 다른 머리통을 거꾸로 세우고 물을 부었다. 기분 좋을 만큼의 적당한 무게가 느껴질 때까지 물을 채웠다. 바닥에 거꾸로 머리를 박고 있는 머리통들은 모두 즐겁고 재미있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틈만 나면 나는 그곳으로 가 아버지 몰래 마네킹 머리통에 물을 부었다.

 "사장 부인이 부족한 게 뭐가 있겠어."

 내 입술에 핑크빛 립스틱을 발라준 후 거울을 힐끗 돌아보며 정 코디가 중얼거린다. 모자를 훔치던 그 여자도 궁색해 보이지는 않았다. 다음증이 병이라던 윤 실장 말대로 그녀들도 애정결핍증에 시달리는 걸까.

 가운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려는데 정 코디가 브래지어를 벗으라고 한다. 옷 특성상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말라는 윤 실장의 주문에 의한 것이다. 흔히 있는 일이다. 브래지어를 벗는다. 정 코디가 준비한 실리콘 소재의 둥근 테이프를 젖꼭지 위에 붙인다. 동전만한 테이프 속에 젖꼭지와 그 둘레가 가려진다. 그 위에 옷을 걸친다. 어깨가 다 드러난 옷은 마치 금방이라도 아래로 흘러내릴 것처럼 부드럽게 살갗을 자극한다.

"참 그거 알아?"

 뒤에서 지퍼를 올려주며 정 코디가 묻는다.

"윤 실장하고 기연이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래. 꽤 됐다나봐."

 갑자기 등이 따끔하다. 나는 '아야' 하고 몸을 움츠린다. 지퍼가 살갗을 스친 모양이다.

"어머, 미안. 어쩌지. 상처 생기겠는걸."

 당황한 정 코디가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아픈 것은 둘째치고 상처부터 걱정하는 눈빛이다. 모델한테 눈에 보이는 상처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그녀는 잘 알고 있다.

"괜찮아요. 마저 끝내요."

"야. 눈부시다. 역시 미스 서는 살아 있는 마네킹이라니까."

 미안해서 그런지 여느 때보다 호들갑이다. 나는 거울에 전신을 한번 비춰보고 나가려다가 다시 돌아선다. 정 코디가 '왜?' 하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찾는다. 생수가 한 병도 없다. 그냥 닫으려는데 사과주스가 보인다. 기연이 넣어 놓은 것이다. 그녀는 유독 사과주스만 먹는다. 뭐라도 채우고 싶다. 사과주스를 꺼내 한 모금 입에 물고 삼킨다. 잘 넘어가지 않는다. 속에서 뜨겁고 강한 무엇이 사과주스를 힘껏 밀어낸다. 나는 이를 악문다. 밀고 올라오던 느낌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사과주스를 잘근잘근 씹는다. 억지로 삼켜보지만 잘 넘어가지 않는다. 나는 사과주스를 입에 문 채로 계단을 오른다.

"수고."

 기연이 손을 들어보이며 지나치려 한다. 기연에게도 스테이크를 잘라주었겠지. 순간 구토가 치민다. 나는 입에 물고 있던 사과주스를 기연을 향해 내뿜는다. 기연이 옷에 얼룩이 진다. 기연이 울상이 되어 뛰어 내려간다.

 나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연신 주위를 둘러본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기연이 보이지 않는다. 탈의실을 나온 나는 윤 실장에게 전화를 건다. 계속해서 통화불능 지역으로 나온다. 갑자기 한기가 돈다. 불온한 예감에 휩싸인다. 나는 계단을 천천히 밟아 내려간다. 물류창고는 지하 3층에 있다. 불빛이 희미하게 보인다. 멈춰 서서 숨을 고른 후 발을 뗀다. 모퉁이만 돌면 물류창고다. 나는 다시 멈춰 선다. 안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낯익은 숨소리가 새나온다. 숨을 죽이고 안을 엿본다. 쌓여 있는 마네킹 사이에 윤 실장과 기연이 한데 엉켜 있다. 어느 게 사람이고 어느 게 마네킹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나는 얼른 돌아서서 단숨에 빠져나온다.

 마네킹 23호와 25호가 치워졌다. 나와 기연의 반응이 좋아 쇼윈도의 마네킹을 아예 다 인간 마네킹으로 바꾸었다. 기연이 전에 내가 섰던 중앙에, 나는 마네킹 25호가 섰던 기연의 왼쪽에, 새로 들어온 정애가 기연의 오른쪽인 23호 자리에 서 있다.

 건물마다 불이 켜지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도 분주하다. 간판을 밝히는 네온사인과 가지각색의 불빛들로 거리는 점점 오색 물결로 넘실댄다. 낮 동안 볼 수 없었던, 잊어버린 것을 찾은 듯한, 아니면 그조차도 아예 망각한, 그리하여 싸늘하게 식은 머리에 그럴듯한 가면 하나씩을 얹고 다니는, 간교한 얼굴들이 희희낙락하며 몰려다닌다. 꽃샘 추위 때문인지 사람들의 옷차림은 아직도 두껍고 칙칙하다. 간혹 화사한 봄옷 차림이 눈에 띄지만 오히려 이물스럽다.

 오늘의 컨셉은 노란색과 그린색이 주조를 이루는 가벼운 평상복 차림이다. 라임그린의 칠 부 바지에 반소매 티셔츠와 얇은 카디건을 걸쳤는데도 후텁지근하다. 오후가 되자 백화점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 열기와 사방에서 비춰대는 조명 때문에 쇼윈도는 뜨겁게 달아오른다. 제일 견디기 힘든 시간이지만 나는 이 시간을 즐긴다. 아침부터 줄곧 한자리에 서 있다 보면 머릿속이 점점 비어진다. 내가 여기 왜 서 있는지,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밖에 비는 그쳤는지. 머릿속은 하얗게 지워지고 몸속은 텅텅 비워져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두둥실 공중으로 떠오를 것만 같다. 물을 채워 넣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시간이다. 나는 곁눈질로 기연을 살핀다. 기연과 눈이 마주친다. 기연이 먼저 시선을 돌린다.

"세상에!"

 기연이 갑자기 제 앞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나직이 소리친다. 나는 얼른 내 앞의 거울을 본다. 기연이 쪽 거울과 달리 이쪽 거울에서는 액세서리 매장이 보인다. 여자 둘이 핀을 고르고 있다. 그 중에 한 여자가 머리에 큐빅이 박힌 핀을 꽂는다.

"상습적이잖아. 벌써 몇 번째인지 몰라."

 기연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한다. 그때 아이 둘을 데리고 걷던 젊은 부부가 쇼윈도 앞에 멈춰 서서 우릴 쳐다본다.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던 기연은 시선을 바로하고 입가에 우아한 미소를 머금는다.

"저것 봐. 진짜 사람이지?"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아이 둘이 하는 모습으로 보아 우리들을 놓고 내기를 한 모양이다.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를 향해 손바닥을 내민다. 머뭇거리던 여자아이가 남자 아이 손바닥에 무엇인가를 건네준다. 동전이다. 그 순간 한 여자가 황급히 아이들 곁을 스쳐간다. 얼핏 스친 여자의 옆모습. 모자가 어울리지 않던 그 여자다.

"아직 이 안에 있을 텐데! 하필이면 모자야. 이왕이면 값비싼 보석이라든가 뭐 그런 걸 훔치지. 이거 너무 싱겁잖아."

 기연이 못마땅한지 연신 투덜댄다. 젊은 부부와 아이들이 가버리자 기연이 속삭이며 계속 거울 속을 살핀다. 나는 못들은 척 외면한다. 여자는 곧 인파 속에 묻혀버린다. 나는 건너편 고층 건물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환하게 불을 밝힌 건물은 영화 속에 나오는 거대한 공룡 같다. 꼬리를 치켜들고 앉아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이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쓰지도 않는 모자가 가득 쌓여 있을 여자의 방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공장에서 몰래 마네킹을 가져오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창고를 엿보던 나는 어느 날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마네킹의 한쪽 다리였다. 반듯하게 세워놓고 보니 내 어깨를 훌쩍 넘었다. 매끈매끈한 감촉이 좋아 손으로 자꾸 쓸어보았다. 속은 깜깜했다. 긴 터널 같기도 하고 코끼리 콧속 같기도 했다. 그 속에다 손을 디밀었다. 저 발끝까지 가면 뭐가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어린 내 손은 무릎에도 못 닿았다. 그 다음 날 다리 한쪽이 또 생겼다. 며칠 있다 팔 한쪽이 생겼고, 또 얼마 있다 다른 한쪽 팔이 보였다. 아버지가 하나씩 공장에서 몰래 가져온 것이었다. 마침내 몸통과 머리통을 갖춘 온전한 모습의 마네킹이 생겼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엄마는 아침 설거지를 쌓아 둔 채로 거울 앞에 오래 앉아 있다가 전화를 받고 나갔다. 심심한 나는 밖으로 나왔다. 밤이 아닌데도 사방은 어둑어둑했다. 찢어진 우산 새로 비가 샜다. 내 발길은 자연히 창고로 향했다. 그곳은 유일하고 은밀한 나의 놀이터였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공장에 있을 시간이었다. 작업실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무엇인가에 올라타 앉은 자세로 고개를 수그리고 야릇한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바싹 귀를 갖다대었다. 신음소리 속에 흐느낌 같은 게 섞여 있었다. 그것은 텅텅 빈속에서 울려나오는,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 갇혀 있던 공명음 같았다. 아버지 바지는 무릎까지 내려왔고 드러난 엉덩이 밑으로 허연 마네킹의 두 다리가 보였다. 숨이 막혔다. 문틈에서 눈을 떼고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후 다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마네킹은 그대로 누워 있었고 아버지는 구석에서 뭔가를 찾았다. 돌아서는 아버지 손에는 톱이 들렸다. 나는 문에 바싹 당겨 앉았다. 아버지가 마네킹 앞에 와서 섰다. 마네킹의 다리를 한쪽 발로 밟고는 허리를 숙여 톱질을 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마네킹의 허리가 서서히 잘렸다. 벌어진 틈새로 음험한 웃음소리가 실실 비어져 나와 아버지를 휘감았다. 마치 아버지가 웃는 것처럼 보였다. 웃음소리가 크면 클수록 아버지의 톱질 속도도 빨라졌다.

 두 동강 난 마네킹의 몸통이 저만치 튕겨나갔다. 갑자기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아버지는 잘린 마네킹의 몸통을 들어 다른 머리통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구석으로 집어던졌다. 이런저런 머리통들이 사방으로 튀거나 굴러갔다. 그 중에 하나가 웃으면서 문쪽으로 굴러왔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돌아서서 집을 향해 뛰었다. 큰 우산이 자꾸 뒤로 젖혀졌다. 꼭 잘린 머리통이 쫓아오는 것만 같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휴대폰에 메시지가 뜬다. 윤 실장이다. 폴더를 얼른 닫는다. 기연이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지우고 있다.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는다.

 모텔 파라다이스는 백화점에서 다섯 블록 떨어진 곳에 있다. 건물 외벽에 늘어진 작은 전구들이 철 지난 유행처럼 생경하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다. TV를 보던 노파가 볼륨을 줄이고 힐끔 쳐다본다. 나는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킨다. 노파는 말없이 고개를 돌린다. 다시 TV볼륨이 높아진다.

 붉은 카펫이 깔려 있는 계단을 밟아 올라간다. 길고 좁은 계단은 어둡고 침침하다. 거대한 짐승의 지저분한 혓바닥 위를 더듬어 가는 기분이다. 계단 난간에 바퀴벌레 한 마리가 기어간다. 잘 닦인 가죽구두처럼 윤이 난다. 손끝으로 툭 쳐 떨어뜨린다. 뒤집어져 바둥거리는 바퀴벌레를 발로 슬며시 밟아 누른다. 낙엽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나는 한동안 발을 떼지 못하고 서 있다. 발을 뗀다. 붉은 카펫 위에 짓이겨 진 바퀴벌레가 새겨졌다. 나는 계단참에 서서 밖을 내다본다. 다양한 크기의 선홍색 십자가들이 어둠 속에 떠 있다. 잔뜩 웅크린 검은 짐승들의 살기등등한 눈빛 같다. 얼른 고개를 돌린다.

 노크를 한다. 가운을 여미며 윤 실장이 나온다. 열린 문틈으로 TV 푸른빛이 새나온다. 머리가 젖은 윤 실장은 밤바다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하다. 윤 실장 등 뒤로 푸른 빛이 일렁이는 밤바다가 펼쳐졌다. 나는 그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물기를 닦기도 전에 윤 실장이 덮쳐온다. 오랫동안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내 허벅지 허연 살덩이를 물어뜯는다. 곳곳에 배어있는 기연의 냄새가 살아난다. 나는 바퀴벌레를 밟았을 때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다. 그에게 살과 피를 다 내준다. 다릿속이 점점 코끼리 콧속 같이 텅 비어 간다. 텅 빈 몸통 속으로 그의 거친 숨소리만 채워진다.

 주위를 둘러본다. 모두들 퇴근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나는 재빨리 비상계단으로 나온다. 빠르게 계단을 내려간다. 창고에 있는 마네킹들이 모조리 치워진다는 소리를 들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더러는 농촌으로 보내져 허수아비로 재활용된다는 것이다. 물류품 보관 창고에 폐기처분을 기다리는 마네킹들이 쌓여 있다. 벌거벗은 마네킹들이 죽 둘러싸고 내려다보는 앞에서 가랑이를 벌리고 누워 처음으로 윤 실장을 받아들였던 곳이다. 그 후에도 우린 몇 번 근무 시간을 틈타 마네킹들 사이에서 몸을 부대꼈다.

 희미한 불빛 아래 벌거벗은 마네킹들이 한데 엉켜서 거대한 봉분을 이루고 있다. 사지가 멀쩡한 이에서부터 머릿부분이 떨어져 나간 이, 팔이 없어진 이, 몸체만 뒹구는 이. 아무렇게 처박힌 머리통들. 인육 썩는 냄새가 진동할 것만 같은. 그래도 마네킹들의 표정은 여전히 살아 있다. 화려한 옷과 눈부신 조명이 사라진 무대의 뒤편에서 이들은 무엇을 기다릴까. 어쩌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네킹 하나하나를 살핀다. 여자, 남자, 여자아이. 용케 한 가족이 다 모였다. 그 중 남자 마네킹의 한쪽 팔이 없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려 바닥에 떨어진 팔 하나를 집어 남자 마네킹에게 맞춰본다. 맞지 않는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또 다른 팔 하나를 대본다. 이것도 아니다.

 낯익은 얼굴이다. 나와 쇼윈도에 함께 섰던 23호와 25호다. 23호는 남자 마네킹 위에, 25호는 빠진 자기 머리통을 두 손으로 감싸 안은 자세로 구석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마네킹 25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만지면 눈가에서 물기가 묻어날 것 같다. 가만히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본다. 잘 다듬어진 반질반질한 매끄러움. 물기가 묻어날 것만 같던 환상은 이내 깨지고 만다. 몸을 아주 천천히 더듬는다. 딱딱하고 차가운 덩어리. 그 이상의 무엇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깊은 동굴 속에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흉흉한 동물의 뼈를 만지는 듯하다. 잘 가. 슬픈 피에로. 나는 천천히 옷을 벗는다. 그리고 마네킹 23호와 25호 사이에 몸을 눕힌다. 찬 기운이 살 속을 파고든다.

 

 

 [심사평-'새로운 혼인풍속도를 그린 수작']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7편의 작품을 꼼꼼히 통독하고 나니 그 질적 수준의 우열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비문과 오문이 연방 눈에 띄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만화속의 풍선글에서 흔히 보이는 미완의 문장과 그 의미를 흐지부지 끝내고 마는 이른바 '야만의 문체'를 제멋대로 과시하는 문맥들도 간단없이 출몰해서 선자의 문학관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다음의 3편은 각각 장단점이 없지 않은 채로나마 상당한 성취를 빚어내고 있다. '셰도복싱'(김윤하)은 화자 '나'가 아내와 함께 교통사고도 당하고, 이런저런 사업에도 실패한 나머지 야간산행에 나서면서 느끼는 일상 중의 소외감을 기록하고 있다.

어휘 취사력에 허영끼가 묻어 있는데다가 이종격투기의 세계적인 강자들을 장황하게 열거하고 있어서 그 산만한 정리력도 결격사유로 뚜렷하고, 이야기들의 유기적인 연결고리를 잡아채는 기량이 부족하다.

' 소도(蘇塗)'(고창근)는 아직도 우리의 일부 농촌사회에 보쌈풍습이 남아 있다는 민속학적 풍물 체험기이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가는 솜씨가 제법 능숙하고, 그 통속성이 발빠른 전개에 힘입어 소설의 골격이라 할 역동감을 실어나르고 있다.

 그러나 그 수필투의 가락도 일정하게 함량 미달이고, 오늘날의 막강한 '현대성'을 도외시하는 발상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작가 자신의 냉정한 현실감각이 덧대지지 않는 한 이런 류의 소설은 감상적인 경험담에 불과할 뿐이다.

 '마네킹 24호'(조영아)는 진짜 인간으로서 마네킹 노릇에 종사하는 백화점 모델 '나'의 세태 점검 및 그 비판의 기록이다. 하필 '나'의 아버지조차 마네킹 제작자였다는 조작에 작위성이 지나쳐서 어설프게 읽히긴 해도, 이 작품에는 상품 매매와 성적 유희감이 곱다시 맞물릴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물신숭배 풍조를 직시하는 그 작의가 힘좋게 넘실거린다.

 


 당선소감]

 

 

 

 

▒ 약력 ▒

1966년 강원도 정선 출생

△ 서울여대 국어국문과 졸업

 

 당선 소식을 듣고 밤새 뒤척였다. 그리고 생뚱맞게도 어린시절 아버지가 만들어 주시던 밀가루 빵이 떠올랐다. 일 때문에 항상 가족과 떨어져 지내시던 아버지는 한달에 한번 꼴로 집에 오셨다. 누런 종이봉투 한가득 먹을 것을 사가지고 들어오시던 아버지.

 며칠 동안 집에 머무르면서 아버지는 우리에게 빵을 만들어 주셨다. 밀가루 반죽을 얇게 펴서 여러 겹으로 접어 그 위에 깨를 뿌려 구워낸 중국식 빵이었다. 아무 것도 들어간 게 없는데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나는 빵을 아껴 먹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다시는 그 빵 맛을 볼 수 없었다.   오늘은 유난히 그 빵이 먹고 싶다.

 아직 제 맛이 나지 않는 글을 맛나게 봐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힘들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준 어머니와 형제들, 방구석에 처박혀 글만 쓰는 며느리를 묵묵히 지켜봐 주신 시어머니, 언제나 충실한 독자이기를 자청하는 남편, 항상 든든한 응원군인 두 딸.

 그리고 문학의 열정과 진지함을 심어주신 황 선생님, 박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끝으로 같은 길을 가는 문우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이제 겨우 산을 하나 넘었다. 씹을수록 맛이 나던 그 빵처럼 읽을수록 맛이 나는, 그래서 아껴서 읽고 싶은, 그런 글을 쓰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