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편 소설

2002년 제26회 이상문학상 수상작-뱀장어 스튜/권지혜

시인 최주식 2010. 2. 6. 21:32

2002년 제26회 이상문학상 수상작-뱀장어 스튜/권지혜

 

뱀장어 스튜 / 권지혜

                        

 뱀장어 스튜(La matelote d’anguilles)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그림의 제목이다. 그러나 나는 한동안 화집을 덮지 못하고 있다. 화집답지 않게 그 그림의 밑에는 뱀장어 스튜를 요리하는 법이 쓰여 있다.
  4인용의 뱀장어 스튜를 위해선 1.2킬로그램의 뱀장어, 2큰술의 올리브유, 당근2개, 양파2개, 셀러리2쪽, 마늘3통, 버터 100그램, 월계수잎 1장, 향초 약간……
 소개한 요리법은 '자끌린의 스튜 요리법'이라는 특별한 이름이 붙여져 있으며 1996년 출판된 알?미셀 출판사에서 나온 <피카소의 식탁>이란 책에서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뱀장어 스튜라는 요리에 처음부터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자끌린이 만드는 뱀장어스튜'였다. 자끌린. 그녀는 파카소의 마지막 여자다. 자끌린은, 천재치고는 아흔 살이 넘도록 지독히도 오래 살았던 난봉꾼 노화가의 마지막 여자인 것이다. 그 '마지막'이란 단어와 '스튜'라는 이름이 합성되어 풍기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거기다 또 '뱀장어'라니!
  뱀장어 스튜. 그건 인생을 '비빔밥'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더 풍부한 은유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그 그림, '뱀장어 스튜'에서는 세월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수많은 여자들……에바, 올가, 마리-떼레즈, 도라, 프랑소와즈, 자끌린…….
파카소의 화집을 들려다보니 정말로 여인들의 초상이 많다. 모두가 피카소가 사랑했던 여인들이다. 그가 그린 여인들의 모습은 그로데스크해 보인다. 정면과 프로필이 한 화면에 합성되어 있다. 그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반대쪽의 보이지 않는 여인의 눈이나 유방마저도 보여주고 싶어한다.
  그 그림, '뱀장어 스튜' 는 기형적으로 그려진 수많은 여인들을 거쳐 두꺼운 화집의 맨 마지막 장에 편집되어 있다. 한평생을 태운 노화가의 열정의 화염이 종국에는 뱀장어스튜를 데울 만큼 은근하고 고요하게 잦아든 느낌이다. 중요한 점은, 뱀장어 스튜를 만들려면 불이 세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주 고요하고 평화로운 화력(火力)이어야 한다.
  그림은 이렇다. 베란다 난간 너머로 녹색의 후경을 깔고, 전경엔 긴 갈색 테이블이 놓여있다. 그 위에 이제 막 뱀장어 스튜 요리를 하기 위한 재료들이 놓여 있다. 테이블 왼쪽에 커다란 양파, 테이블 가운데는 풀어놓은 신문지 위로 검은 뱀장어들의 몸이 난교하듯 서로 얽혀 있다. 그 오른쪽엔 여자용 갈색 손지갑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앞엔 투박하지만 끝이 매우 뾰족한 식칼 한 자루가 놓여 있고…….
  지독히도 단순하고 평면적인 그림이다. '아비뇽의 처녀들'이나 '게르니카'의 화려함이나 장엄함에 비해서는 초라할 만큼 평범한 그림. 입체파로 세상을 풍미하던 기교의 천재가 79세에 그린 단순하기 짝이 없는 그림. 그리고 말년의 피카소가 마지막 여자에게 바치는 아래와 같은 헌사가 붙어 있는 그림.
  "1960년 12월 3일 자끌린이 점심식사로 만든 스튜를 위하여. 이 그림을 바침으로써 그녀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기만 한다면."
  왠지 이 '뱀장어 스튜'란 그림은 내게는 쓸쓸한 감동을 준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예술가의, 일상에 대한 경의와 마지막 여자에 대한 예의가 느껴진다. 인생이란 화려하지도 않고, 더군다나 장엄하지도 않으며 다만 뱀장어의 몸부림과 같은 격정을 조용히 끓여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용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신이 조절한 타이머에서 종소리가 날 때까지 말이다. 하긴 꼭 뱀장어 스튜가 아니면 어떤가. 삼계탕이나 곰탕, 뭐 이런 것들도 조용히 끓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한 여자가 떠올랐다. 이슬비 내리는 파리 근교의 낡은 아파트 부엌으로 조용히 들어서고 있는 그녀……

 

                                                       피카소-뱀장어 스튜

 

                                                                *

  부엌에 바퀴벌레를 잡기 위한 덫을 세 군데나 놓았다. 그건 종이로 접어서 만든 것이다. 마치 바퀴벌레를 위한 조립식 집처럼 생겼다. 커다란 창문처럼 사면에 통로가 있고, 안엔 바퀴벌레가 좋아하는 먹이가 들어있다. 그러니 집의 조건은 잘 갖춘 셈이다. 그러나 그 안으로 한 발만 디뎠다 하면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한다. 강력 접착제가 바닥에 도포되어 있는 것이다. 밖에는 여전히 이슬비가 내리고 있고, 비가 내리고 있다는 그 사실은 그녀에게 바로 '이곳에' 왔다는 존재감을 비로소 느끼게 해 준다. 습한 우기의 공기가 몸을 눅은 김처럼 길들이는 곳. 그렇다. 그녀는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 석 달만이다.
  그녀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집안에 먼지와 바퀴벌레가 는 것이다. 이곳에서 칠 년을 살았지만 바퀴벌레는 그 전엔 아예 없었던 존재다. 는 것도 있지만 준 것도 있다. 남편의 체중과 은행의 잔고,
  그녀는 세 군데의 건물을 순찰하듯 자주 세 곳, 바퀴벌레의 집안을 들여다본다. 바퀴벌레집 안에 든 벌레들의 반쯤은 이미 푸석하게 널브러져 죽어 있다. 오늘도 도합 열 마리 가량 잡혔다. 새로 들어온 놈은 윤기로 알 수 있다. 새로 출고된 구두처럼 유난히 반짝거린다. 죽어가고 있는 놈들은 하루하루 윤기를 잃어가고 있다. 가운데 먹이까진 차마 가 보지도 못하고 수많은 바퀴벌레가 통로 앞에서 죽어 가고 있다. 세상의 긴 다리는 바닥에 붙어버린 채로 몸통과 긴 더듬이만 간절하게 움직이고 있다. 벌레들이 싸 놓은 배설물은 마치 까만 채송화 씨앗들처럼 바닥에 흩뿌려져 있다.
  그런데 씽크대 옆에 놓아둔 집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그만 꼿꼿해진다. 가운데 먹이 근처에 거의 다다른 암컷의 꽁무니에서 표면에 윤기가 잘잘 흐르는 길쭉한 유백색 주머니가 비어져 나오고 있는 중이다. 죽어 가는 상황에서도, 끈끈이 위에다 알을 낳을 수밖에 없는 암컷은 연신 더듬이와 꽁무니를 흔들어대고 있다. 꽁무니에서 쑥 빠져 나온 알주머니는 따끈따끈할 것만 같다. 그녀의 손이 다가간다. 엄지손톱을 밑으로 바퀴벌레집 한 채의 지붕을 아래로 꾹 누른다. 미세하게 톡, 알집 터지는 소리가 나고 잠깐 천장이 바닥에 들러붙었다가 떨어진다. 알은 흔적이 없이 사라지고, 알이 자라는 노란 액체가 번져 있다.
  "뭐 하고 있어? 또 들여다보고 있어? 징그럽지도 않니?"
  남편이 부엌으로 들어서다가 눈살을 찌푸린다. 쪼그리고 앉아 있던 그녀가 놀라서 일어선다.
  "벌레는 곧 죽음이 다가오는 걸 모르나봐. 붙어 버린 다리를 끊임없이 굽혔다 폈다, 간절하게 더듬이를 움직이구……저렇게 안간힘을 쓸 필요가 있을까? 죽는 순간까지 쓸데없이 저러고 있네, 쟤네들."
  손으로 마늘을 까면서 바퀴벌레의 집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녀가 말한다.
  "어쩔 수가 없잖아."
  남편이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묻는다.
  "대추랑 인삼은?"
  그녀는 싱크대 수납장을 고갯짓으로 가리킨다. 남편은 인삼 상자에서 제일 큰 것을 한 뿌리 골라내고 대추도 한움큼 꺼내어 수돗물에 씻는다.
  그리고 좀 전에 그녀가 씻어 놓았던 닭을 끌어당겨 놓는다. 닭은 좀 외설스런 포즈를 하고 있다. 두 다리를 한껏 가슴에 치켜올린 채 누워 있는 닭의 뚫린 꽁무니에 남편이 대추를 집어넣고 있다. 그리고 인삼뿌리를 쑤셔 넣으며 말한다.
  "한동안 말이지. 난 닭고기를 못 먹었어. 어릴 땐 엄마가 집에서 키우던 닭을 잡곤 했는데, 내가 좀 크니까 그걸 나한테 시키더라구. 엄마는 닭 모가지를 참 잘 비트셨지. 우리집은 늘 아버지가 골골하시고 엄마는 힘이 셌지. 처음 내가 닭을 잡는데 말야. 차마 목을 못 비틀겠더라. 식칼을 들고 벌벌 떨다 눈 질끈 감고 목을 쳤는데 닭이 푸득거리는 통에 기겁을 하고 놀랐지. 그런데 목이 덜렁거리는 닭이 질질 피를 흘리며 도망가다가 빨래 간짓대를 쓰러뜨려 버렸어. 흰 이불 홑청이 땅바닥에 널브러지고 닭은 그 위로 피를 쏟으며 달려가고. 털을 뽑기 위해 물을 끓이던 엄마는 저놈의 닭! 고함을 치고……그러다 닭이 어딘가로 도망을 가 버렸어.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야. 그런데 새벽에 나쁜 꿈을 꾸고 설핏 깼는데 무슨 신음 같은 게 들려왔어……. "
  닭의 사타구니에 인삼을 꾹꾹 찔러 넣던 남편은 잠시 재채기를 하려는 사람처럼 고개를 들고 동작을 멈추었다. 그의 옆얼굴은 약간 질려 있다.
  남편은 그러고 나서 천천히 말했다.
  "아아, 그 닭이 말야, 내가 차마 죽이지 못했던 닭이말야, 바로 내 머리맡에 앉아 있는 거 있지. 다 죽어 가면서 반쯤 내리 감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거야. 그러더니 서서히 막이 내리듯 아주 천천히 눈꺼풀이 닫히면서 닭이 죽는 거야. 생각해 봐. 서서히 눈꺼풀이 내려오고 있는 닭의 작은 눈을……. "
  "그랬어?"
  그녀가 의외라는 듯 호들갑스럽게 묻는다.
  "닭을 다시 먹기 시작한 건 군대 갔다 오고부터야. 군대는 모든 걸 바꾸어 놓을 수 있으니까."
  "이젠 그런 죄의식을 갖는 소년은 없을 거야. 집에서 닭을 죽일 필요가 없어졌어. 이렇게 손질이 잘 되어 있는 닭을 파니까."
  "그래. 그럴꺼야. 하지만 문제는, 무언가를 죽여보지 못한 사람은 무언가를 사랑할 수도 없다는 거야. 이렇게 죽어 있는 닭들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닭을 다시 키운다고 해도 애정 따윈 생겨나지 않지."
  남편은 가끔 자신이 한 말에 스스로 도취되는 경향이 있다. 지금도 자기 확신에 차서 끝의 두 음절을 아주 신중한 톤으로 말하고 있다.
  남편이 끓는 냄비 안에다가 사타구니에 인삼 끼운 닭을 안쳤다. 조리대 한쪽에 놓아둔 덫 근처에 윤기 나는 통통한 바퀴벌레 한 마리가 얼씬대고 있다. 집 나온 여자가 서성대며 망설이듯 통로 주위만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그놈이 들어가는 걸 보고 싶어 안달이 나는 마음을 애써 누른다. 들어가라…….
  놈을 유인할 수도 없기에 막연히 옴의 행로를 그녀는 눈으로 좇고만 있다. 그녀의 염력이 그만 그놈의 안테나에 포착되었나 보다. 벌레는 통로 앞에서 발을 돌린다.
  그러다 그녀는 바퀴벌레의 집안을 들여다본다. 세상에! 그녀가 나지막이 부르짖는다. 그녀의 눈에 믿기지 않는 사태가 벌어져 있다. 바글거리는 참깨 알! 죽은 어미 바퀴벌레의 꽁무니에서 나온 알이 부화되어 참깨 알보다도 작은 새끼들이 알주머니에서 기어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왜 이 조리대 위의 집에 어미가 알을 까 놓은 걸 못 보았을까. 어미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되어 껍질만 바닥에 붙어 있는데 홀로 떨어져 있던 알 덩이에서 이렇듯 새 생명을 받아 나오다니. 그녀가 여직껏 눈에 보이는 대로 알주머니를 터뜨렸는데 여태도 살아남아 이렇듯 많은 새끼가 되어 나오다니. 소름이 끼쳤다. 이상하게도 새로 태어난 새끼들은 끈끈이에 들러붙지도 않고 서로의 몸을 타 넘고 집  밖으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아니, 뭐야?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그때 남편이 넙적한 손바닥으로 바퀴벌레의 집을 위에서 잽싸게 짓눌러 버린다. 그 와중에도 혼비백산한 새끼들이 사방으로 뛰쳐나갔다. 갑자기 남편에 대해 막연하지만 전부터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 잔잔하게 밀려오는 것 같다. 그건 남편을 향한 살의였다.
  "당신이 바퀴벌레를 그렇게 사랑하는지 몰랐어."
  그녀는 씹어뱉듯이, 그러나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만큼은 못하지."
  남편의 얼굴이 잔인하게 빛났다. 바퀴벌레를 죽인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진다. 남편도 그녀에게 살의를 느끼는 게 분명했다.
  남편은 스튜 냄비에 닭을 안치고 중간 불로 불을 조절한 다음 타이머를 1시간에 맞추었다. 그리고 그녀를 침대로 데려갔다.
  남편은 그녀를 눕혀 놓고 그녀의 두 손을 깍지 껴 만세를 부르게 하고 그녀의 오른손목에 먼저 키스한다. 방금 전 마늘을 깠던 그녀의 손에서는 생 마늘 냄새가 심하게 날 것이다. 전희의 시작을 알리는 그 동작은 남편의 오래된 습관이다. 두 팔을 올려 만세를 부르는 듯한 그 동작은 그녀에게 항복 신호처럼 느껴진다. 사실 그녀는 항복한 포로처럼 늘 얌전하다.
  이제 남편은 그녀의 오른손목을 혀로 핥기 시작한다. 엄격히 말하면 손목이 아니다. 오른손목에 자벌레처럼 오톨도톨하게 남은 흉터다. 오른손목의 푸른 정맥을 가로지른 그녀의 흉터 자국을 마디마디 혀로 핥기 시작한다. 마치 그것이 다른 여자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그녀만의 성감대이기나 한 것처럼. 그러고 나면 그는 마치 진압군처럼 비로소 전의가 충전되는 듯하다. 조금씩 격렬하게 그녀의 몸의 여기저기를 수색하다가 맨 마지막으로 아랫배에 나 있는 또 하나의 흉터에 이르면 그는 그녀 속으로 깊이 투하해 마침내 폭발해 버린다. 아랫배엔 오래 전 자궁에서 아이를 꺼내느라 생긴 흔적이 가시 돋힌 철삿줄처럼 그어져 있다. 오른손목의 자벌레나 아랫배의 철삿줄, 둘 다 남편과는 상관없는 상처들이다. 남편을 만나기 오래 전부터 그녀는 그것들을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 상처들을 애무해 주는 건 이제 그녀에게 아무런 위안이나 특별한 감동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처음으로 상흔에 입술을 대던 순간 몹시 울었던 기억이 난다. 섹스를 하면서 감상에 빠지는 적은 드물었는데도 그랬다.
  그 상처를 지닌 스무 살부터 많은 남자들을 만났지만, 그네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하지 않고도 그 상처들을 따뜻하게 핥아 주는 남자는 남편이 처음이었다. 치유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남편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환부를 오랫동안 들여다본 의사처럼, 상처를 아주 잘 이해했다는 듯이 첫 섹스 후에 남편이 말했다.
  "당신은 말이야, 당신은 ……당신은 삶을 정말 사랑할 수 있는 여자요."
  반드시 그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그는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생겨난 듯 물은 적이 있다. 청명한 초여름 오후, 어느 시골 국도 변에 차를 받쳐놓고 카페 테라스에서 맥주 한 잔씩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목적지도 없이 어딘가로 떠나는 중이었다. 함께 살기 시작한 지 오 년이 지나서였다. 맨 살갗을 어루만지는, 에로틱하게까지 느껴지는 햇빛으로 그녀가 거의 오르가슴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왜 오른손목이었지? 당신은 왼손잡이도 아니잖아?"
   그가 조금은 퉁명스레 물었다.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눈을 반짝 떴다. 그녀는 변명하듯 머뭇머뭇, 그러나 금세 자신을 조롱하듯 장난스레 말했다.
  "글세, 음……그러고 보니까 정말 마지막 순간에까지 망설였던 건 칼을 어느 손에 쥐느냐의 문제였어. 우습지? 죽는 순간에까지 생을 가지고 장난을 친 거지. 결국 왼손에 칼을 쥐었지. 나는 지독한 오른손잡이라 오른손의 힘은 센데 왼손은 전혀 그렇지 않아. 이렇게 흉터가 지저분한 거 봐. 오른손이었다면 단 한 번만으로도 끝났을 텐데……그럼 깨끗했을 거야. "
  하지만 왠지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찬란한 햇빛 아래서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남편이 오른손목에 입술을 오랫동안 가만히 대고 키스를 해 주었으면 하고 잠깐 바랐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쓴 남편의 표정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잘 들여다보면 삶에는 어느 순간, 균열의 순간이 있는 것이다. 돌아보니 그 여행이 그랬다. 카페에서 다시 차에 올라탄 그들은 노르망디 지방의 에트르타라는 바닷가 마을로 목적지를 정했다. 파리에서 가장 가까운 바닷가였고 또 근사한 형의 사암절벽으로 유명해서 그들이 두 번쯤 갔던 곳이었다.
  그들은 해변을 버려 두고 절벽 위 높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 위엔 온통 초원아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작은 교회가 보였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미풍이 선선했고 절벽 아래로 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녔다. 석양이 지기 직전의 바다는 흑 진주 빛으로 차갑게 번들거렸다. 언덕으로 오르는 왼편 길옆은 가파른 절벽이어서 몇 곳은 두 발이 오그라질 정도로 위험하게 느껴졌다. 곳곳에 경고문이 써 있기도 했다. 뒤에서 남편이 떠다밀면 곧장 바다로 떨어질 것 같았다. 그녀는 뒤에 바짝 선 남편을 돌아보다가 공연히 놀라며 그에게 먼저 앞서게 했다. 그가 앞서자 이번엔 그녀가 그를 떠다밀고 싶은 이상한 충동이 느껴 질까봐 두려워졌다.
  노을을 구경하려고 언덕에 오르는 관광객들도 제법 있었다. 평평한 곳에 이르자 남편은 자리를 잡고 화첩을 꺼냈다. 그녀는 남편을 버려 두고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교회라고도 할 수 없는 작은 돌집은 망자들의 영혼을 모신 집이었다. 에트르타 바닷가에서 사라지거나 죽은 영혼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관광객들을 따라 그저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자꾸 뒷목이 서늘해졌다. 돌 건물 특유의 냉기일까. 어둠이 내리고 있고 망자들의 영혼을 모신 곳이라 그럴까.
  기어이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희부윰한 빛 속에 한 계집아이가 서 있었다. 커다란 눈망울에서 빛이 쏘아져 나왔다. 중년의 프랑스인 부모가 아이 옷소매를 끌고 교회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 아이는 몸은 돌리고도 눈은 그녀에게 고정한 채로 부모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보랏빛 노을이 장관이었다. 언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아니는 여전히 교회에서 나오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석양을 받은 풍성한 아이의 머리칼이 금발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니 아이는 동양 아이였다. 아이의 두 눈이 그렇게 빛났던 건 두 눈에 가득한 눈물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이 아이의 어미랍니다. 이 앤 아멜리라고 한답니다. 열두 살이지요. 실례지만 당신은 혹시 한국 분이 아니신지요?"
  아이의 엄마라고 소개한 나이 든 부인이 아이의 어깨를 감싸쥐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아인 한국에서 입양을 한 아이구요. 우린 끌레르몽페랑 근처 시골 마을에서 왔답니다. 중부 산악지대죠. 동양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죠. 실례가 되었다면 용서하세요. 이 아인 자신의 모습과 닮은 동양 여자를 오늘, 생애 처음으로 보게 된 거랍니다."
  아이의 두 눈에서 후두둑 눈망울이 떨어지자마자 다시 눈물이 검은 두 눈에 샘물처럼 가득 고였다. 아이는 눈물 고인 눈으로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아이답지 않게 너무도 복잡하고 무거운 눈맞춤을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언덕길을 내려오고 말았다.
  그러다 그 아이를 다시 만난 건 그날 밤, 그 마을 특산의 해물 요리를 파는 레스토랑에서였다. 창가의 식탁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바닷가재를 나이프로 지그시 누르고 포크로 살을 파고 있을 때, 그 여자아이를 데리고 그 부인이 다시 나타났다. 아이는 이제 눈물을 달고 있진 않았다.
  "어머, 여기 계셨군요. 당신을 찾았답니다."
  부인이 그녀를 보고 반갑게 알은 체를 했다.
그녀가 외면하듯 고개를 숙여 버리자 이번엔 부인이 남편을 붙들고 물었다.
  "한국 분들이 맞지요?"
  "예……."
  남편이 엉거주춤 대답했다.
  이번엔 부인이 그녀를 보며 간곡하게 말했다.
  "저희를 좀 도와주세요. 우린 이곳에 삼일 정도 머무를 겁니다. 큰 실례가 되지 않으면 계시는 호텔에 저희도 방을 잡을 테니 계시는 동안만이라도  저희 아이에게 어머니의 나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면 어떨까 하구요. 참 예쁘죠? 저는 오늘 마음이 무척 아프답니다. 이 조그만 아이의 가슴에 감추어진 깊은 고통을 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진작에 아이가 언젠가 부딪칠 존재의 비밀에 대한 혼란에 대해 아무준비가 없었던 게 부끄럽습니다. 아이가 원한다면 한국의 엄마도 찾아주고 싶어요. 당신을 만나서 저도 무척이나 반갑답니다. 무언가 아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남편과 다시 올게요. 우린 이 옆 그랑블루 호텔에 있답니다. 아멜리, 너는 여기 잠깐 있거라."
  부인 허둥대며 나갔다.
  남편이 아이를 끌어다 옆자리에 앉혔다. 아이는 열 두 살이라지만 보통의 프랑스 아이들보다 아주 작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화난 투로 "일어나" 한마디만 남기고 일어섰다.
  "당신, 왜 이래?"
  그녀가 급하게 계산을 치를 때까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앉아 있던 남편이 그녀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걸자 튕겨 나왔다. 그녀는 거칠게 차를 출발시켰다. 아이에게 눈길을 주려하지 않았지만 백미러 안에 레스토랑 창유리에 붙은 동글납작한 아이의 부모가 보도로 스쳐 지나갔다.
  어둡고 한적한 해변도로를 정신없이 달릴 동안 남편도 한마디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송진 냄새가 났다. 해송의 냄새일까, 유화를 그리는 남편의 몸에서 늘상 풍기는 테레핀유 냄새일까. 갈증이 났다. 길옆에 차를 세우고 그녀는 남편의 몸을 와락 껴안았다. 몸이 몹시 떨려서 남편의 두 팔이 그녀를 꽁꽁 묶어 주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남편은 차 밖으로 나가 천천히 오줌을 누었다. 


 
           *       

     

  나는 그녀가 왜 그날 밤, 코끼리 사암으로 유명한 그 해변 도시를 쫓기듯이 떠났는지를, 그리고 수년 후 안개비 내리는 세느 강변의 낡은 아파트 부엌에서 바퀴벌레의 알주머니를 터뜨리는가를 생각해 보곤 한다.
  삶에는 추억이라든가 기억이라는 이름의 구슬들이 널려 있는데 그것을 어떤 실에 꿰어서 목걸이를 완성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신의 몫일까. 운명의 몫일까 생각해 본다. 분명한 것은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우리는 미로와 같은 삶의 궤적을 방황하면서도 완벽한 목걸이를 만들어 보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꼭 꿰고 싶은 구슬을 놓치는 적도 있을 것이다.
  지금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아랫배에 나 있는 한 가닥 가시 돋힌 철삿줄 같은 그녀의 상흔에 입술을 대고 있으며 그녀는 곧 그가 그녀의 몸 속으로 들어올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눈을 감아 버린다.
  그녀의 몸은 이제 남자의 페니스로 핀업 된 한 마리 곤충인지도 모른다. 또는 끈끈 이에 붙어서 더듬이와 사지를 버둥거리는 바퀴벌레인지도 모른다. 그런 몸과는 달리 감각은 전류처럼 저희들끼리 스파크를 일으킬 것이고, 그녀의 영혼은 잠시 어딘가를 떠돌지 모르겠다. 시간과 공간이 진공처럼 정지한 곳 눈을 감으면 그곳에 갇혀 있는 한 여자를 알아볼 수 있다.

                                

     *

 

  이 도시에 작은 동물원이 하나 있습니다. 동물원이라면 으레 그렇듯 원숭이 우리도 하나 있지요. 그 우리 안엔 원숭이 가족이 살았는데요. 암수 한 쌍과 새끼 네 마리였답니다.
  다른 동물원 여느 원숭이들과 마찬가지로 햇빛 좋은 날엔 길게 하품을 하며 해바라기를 하고, 서로의 이를 잡아 주며 다정하게 살았답니다. 특히나 그 한 쌍은 흉내내기의 명수였습니다. 방문객들의 몸짓은 물론 가끔은 암수가 마주보고 앉아 서로의 흉내를 내곤 했지요. 마치 서로가 서로의 거울인양 말이죠. 새끼들도 온갖 재롱을 떨며 방문객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겠지요.
  그런데 어느 날  암컷이 없어졌답니다. 사육사가 저녁에 먹이를 주고 문을 열쇠로 잠그는 일을 잊었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사라진 것은 아마도 새벽녘쯤인가 봅니다.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의 새벽 이내 속에서 한 산책객이 어슴프레한 그 짐승의 실루엣을 보았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하도 심상해 보여 그는 새벽 거리를 배회하는 부랑견쯤으로 보아 넘겼답니다. 어쩌면 암컷은 정말로 산보를 잠시 나갔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암컷은 우리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도시에서 암컷을 보았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암컷이 없어진 날의 T.V 뉴스를 기억합니다. 늙수구레한 사육사는 말했습니다.
  "날이 어두웠고, 원숭이들은 숙소로 돌아가 먹이를 먹으면 곧 잠을 자는 습관이 있어요. 자물쇠만 잊고 안 채웠다 뿐이지 문은 얌전히 닫혀 있었어요. 우리 안에서는 문이 열려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을 텐데……일부러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문을 열어보지 않는다면 겉보기엔 다를 바가  없었거든요. 암놈이 꼭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암놈이 없어지고 나서도 문은 그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요. 짐승들은 일단 빠져나가면 그 흔적이 남거든요. 문이 휑뎅그레 열려 있다든가……그런데 문은 아귀가 잘 맞도록 닫혀 있었고……감쪽같았어요. 우리를 빠져나가며 암놈이 원래대로 닫고 나간 모양이에요. 그래서 진작 몰랐던 겁니다."
  암컷은 어디에 갔을까요. 그녀는 정말 탈출을 시도했던 걸까요. 그녀는 갇혀 있는 우리 밖이 자신의 고향인 아프리카의 평원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어쩌면 그녀는 짧은 여행을 떠났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지금, 원숭이 우리의 문은 더욱 완강한 자물통으로 잠겨 있답니다. 그런데, 말이죠……불행히도 원숭이는 잠긴 문은 못 연답니다…….
  강에서 새벽안개가 피어오를 때쯤이면 이상하게 잠을 설치게 된답니다. 잠긴 우리 밖에서 서성거릴 것 같은 암컷의 환영 때문에……

 

         *

 

  커피향 때문이었는지……잠을 깬 여자의 의식에 아주 잠깐 혼란이 왔다. 여자는 프랑스에 있던 집, 세느 강 지류를 낀 파리 근교의 자기 집인가 생각했다. 뭔가 비밀스런 하루를 예고하듯 커피향에 젖은 아침 안개가 흰 베일처럼 내리던 곳. 그러나 잠이 깼다고 생각하는 순간. 여자는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새날을 맞고 있다는 걸 알았다. 분명 어제가지 머물던 큰오빠네 집도 아니다. 그곳은 늘 성난 증기기관차 같은 압력밥솥의 김 뿜어내는 소리로 하루가 열렸다.
  여자는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커다란 창문의 열어놓은 버티컬 블라인드 사이로 눈부신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빛은 크림색 벽과 침대 시트와 장식 없는 방을 하얗게 표백시켜 놓았다. 벽에 마티스의 복제화가 한 점 걸려 있다. 벗은 여체들의 검은 실루엣이 어울려 원무를 추고 있다. 그리고 거울……거울 속의 여자는 하얗게 벗은 모이다.
  그때 밖에서 남자의 휘파람소리가 들렸다. 도마질 소리도 들려왔다. 제법 익숙한 솜씨로 리디미컬 하게 오이 같은 걸 써는 경쾌한 소리다. 여자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깐 어지럼증이 일었다. 어지럼증이 가라앉자 이번엔 두통과 지독한 갈증이 목을 죄었다. 그때서야 간밤에 너무 술을 많이 마셨단 생각이 들었다. 아아, 스타카토처럼 단속적인 기억. 너무 많이 마신 술 때문에 마른 모래무덤 같던 몸의 기억. 어린 날 해변에서 파 놓은 두꺼비집 같던 몸. 언젠가 허물어질 위태로운 검은 구멍. 남자의 몸이 두꺼비집에 손을 넣듯 텅 빈 여자의 몸에 무심하게 들어왔고 여자는 마른 모래더미처럼 무너져 내렸던 것일까. 옷을 찾았으나 아무 데도 없다. 망설이다 여자는 그냥 벗은 채로 나간다.
  남자는 알몸에 초록색 에이프런을 두른 뒷모습으로 싱크대 앞에 서 있다. 무언가에 괭장히 몰두하고 있다. 올라간 그의 어깨근육과 질끈 묶은 에이프런 끈 밑에 들어 난 알 궁둥이가 단단하게 뭉쳐 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난다.
  "어? 일어났어? 지금 셀러드를 만들고 있어. 프렌치 드레싱으로 하려구."
  남자는 셀러드유를 조심스럽게 계량스푼에 따르고 있었다. 유리그릇에 식초, 소금, 후추를 더 넣고 휘젓던 남자가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본다. 손끝을 입에 대고 쪽 빠는 남자의 턱 밑이 거무스름하다. 어제 파르스름하니 면도하고 행수냄새가 배었던 남자의 턱은 밤새 수염이 자랐다. 꺼칠한 남자의 턱을 어루만지고 싶은 충동이 짧게 일었다. 남자의 턱은 특별하다. 턱 끝이 복숭아처럼 갈라져 있어 아주 도발적이다.
  "내 옷 어디 놔뒀지?"
  "왜, 옷 입으려고? 또 벗을 텐데. 몇 년 치 한꺼번에 하려면 아직 멀었어."
  남자는 싱긋 웃었다. 삼 년만에 만난 남자는 그닥 많이 변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독신이었고, 다만 그 동안 좀더 넓은 아파트로 옮겼고, 그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뒷편 정수리 부근엔 새치가 제법 눈에 띄었다.
  "어제 너, 너무 많이 마신 거 알아? 생각나? 어휴, 나 이제 이사가야 할 것 같아. 동네 창피해서. 비명을 지르고 막 큰 소리로 울부짖으면서 나쁜 짐승! 나쁜 짐승! 너 습관이 좀 변했더라. 무척 폭력적이던데? 짐승은 데려 너였는데. 야수처럼 이렇게 손톱으로 긁은 것 좀 봐. 쓰라려."
  남자는 손가락으로 목뒤를 가리켰다. 남자는 그걸 기억해 나고는 오히려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남자의 목 뒷편 어깨에는 붉은 줄이 몇 가닥 어지럽게 그어져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한 장면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어쩌면 그런 환영이었을까? 불을 켜지 않았는데도 가로등 때문인지 달빛 대문인지 어둡진 않았다. 남자는 곯아떨어진 여자를 그냥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어제의 섹스는 너무도 취한 여자에게는 그저 물리적으로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섹스였다. 그건 마취된 육체에 가해지는 우스꽝스런 폭력. 남자의 섹스는 난폭했다. 난폭, 아아, 여자는 남자와 섹스를 할 때마다 아귀진 그의 손아귀에 목을 졸리는 순간을 생각했다.
  발버둥을 치면서도 어느 순간 눈을 뜬 여자는 흠칫흠칫 놀랐다. 벽에 걸린 쇠창살 그림자 때문이었다. 완강한 감옥이었다. 그 안에 광란하는 두 짐승의 그림자. 그 감옥은 바로 바깥의 가로등 불빛을 받아 영사막 같이 된 흰 벽면에 반쯤 열린 버티컬 블라인드의 그림자가 만든 것이었다. 두 짐승의 울(鬱)처럼 완강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버티컬 블라인드 그림자는 절묘하게 그들을 가두어 버렸다. 꼭 우리에 갇힌 짐승들 같았다. 자신이 챔팬지나 오랑우탄처럼 변해 버린 것 같았다. 마치 광기에 휘몰린 두 짐승들이 몸부림치는 것 같은 장면을, 여자는 그림자극을 보듯 냉정하게 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니 반대편엔 거울이 보였다. 어두운 우물의 표면처럼, 거울은 아무런 선입견 없이 정확하게 그들의 반영하고 있었다. 그렇게 잔인한 모습은 아니었던 것이다. 거울이 진실하다는 데 여자는 안심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어제, 여자는 삼 년만에 남자의 휴대폰으로 전화했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나라의 동물원 이야기를 쓴 편지를 부친 지는 오 개월만이었다. 낡은 수첩을 꺼내 이름 없이 번호만 적어 놓은 열자리 숫자를 누르기까지 여자는 망설였다.
  그러나 남자는 말하곤 했다. 십 오 년 전에도, 십 년 전에도, 팔 년 전에도, 오 년 전에도, 그리고 또 삼 년 전에도.
  "오고 싶을 땐 언제든지 와. 난 항상 열려 있으니까. 아니, 난 문이 없어. 난 황야에 서 있는 정자야. 세상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짓고 문을 달고 열쇠로 채우고 싶어하지. 네가 저물녘의 새처럼 깃들이길 원한다면 내 정자의 처마에서 언제든 쉬어."
  그 말 때문이었을까. 세상의 어떤 남자도 그렇게 말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하긴 여자가 한국에 나와서 그를 만날 때는 해질녘의 새처럼 늘 지쳐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처마 밑에서 단 하루를 달게 쉬고는 떠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여자는 전화하는 게 두려웠다. 여자는 다시 떠날 때가 없었던 것이다. 여자에게 남자는 늘 돌아가기 위해서만 머무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며칠 전 남편의 편지를 받았다. 여자가 집을 떠나온 지 58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편지였다.
 "우연히 당신의 옷장을 보고 깨달았소. 한 달 간 가 있겠다고 하더니 겨울옷뿐 아니라 여름옷까지도 모조리 챙겨 갔더군. 당신의 여행이 장기화되든 어쨌든 당신의 자유요. 또는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나로선 어쩔 수 없소. 당신은 자유로운 여자니까. 그러나 당신에 내게 끝내 말없이, 홀로 늘 호시탐탐 늘 떠나갈 궁리를 했다고 생각하면 끝없이 괴롭소. 서로가 소통을 하려고 노력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오.
  그러고 싶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오. 지금도 당신이 나와 소통하길 원치 않는 다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소. 다만 지금의 나로선 당신의 여행이 빨리 끝나길 바라오. 마음속에 당신을 향한 쪽문을 잠시 열어 두리다. 그러나 명심하오. 나는 기약 없이 당신을 가다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소. 무심하게 비 내리는 속수무책의 2월 오후요. "
  여자는 편지지를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남편이 있는 나라의 비 냄새가 아련히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너무 가늘어서 우산을 펼 수도 접을 수도 없는 그 곳의 이슬비를 생각했다. 그 비를 맞으면 아무 것도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의 편지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비 내리는 속수무책의 2월 오후요……. 여자는 너무 멀리 그곳으로부터 떨어져 있고 도 다른 인력의 지배로 자신이 알지 못할 곳으로 끌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늘 뭔가를 망설였고 남편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여자가 늘 떠나길 망설이는 새였다면 남편은 오래된 정원의 마로니에처럼 그 땅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남편은 질리지도 않고 그림을 그렸고 죽을 때가지도 그곳에서 그럴 것이라 믿어졌다. 그러나 남편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여자가 보기엔 그는 세상에 대해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남자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전의는 모두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여자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파리의 한 면세점의 한국부 남성용품 코너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온 남자들에게 주로 향수와 넥타이와 지갑을 팔았다.
  얼마 후 외환 위기가 닥치고 한국여행객이 씨가 마르자 여자는 면세점에서 해고되었다. 그 이후로 막막해진 여자는 비 내리는 저녁이면 낡은 88년식 뿌조 205를 몰고 벵센느 숲이나 블로뉴 숲을 돌았다.
  파리의 허파라고 불리는 동쪽과 서쪽에 있는 그 숲은 밤과 낮의 모습이 판이했다. 낮이면 맑은 하늘을 쪼이며 유모차를 끌거나 개를 산책시키는 시민들도 이슥한 밤이면 사라졌다. 밤의 숲은 결핵환자의 엑스레이 사지에 찍힌 검은 공동(空洞)처럼 음울해졌다. 여장 게이들과 밤에 피는 꽃들이 독버석처럼 돋아나기 시작한다. 여자가 주차해 있는 곳으로 슬슬 차를 몰고 온 사내들이 이렇게 물어왔다. "꽁비앵?(얼마지?)"
 어느 날인가의 말다툼 이후로 여자는 남편을 몸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래 참다못한 남자는 결혼이라는 성적 계약을 얘기했고 여자에게 계약위반임을 비난했다. 여자는 남편을 한참 쳐다보고 나서 씹어뱉듯이 부르짖었다.
  "계약? 넌 나한테 화대를 제대로 지불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
그러자 남편이 떨리는 날숨 끝에 뱉었다.
  "더러운 창녀 같은 년!"
  남편은 폭발할 듯 위태로운 몸짓으로 집을 뛰쳐나갔고, 여자는 찢어진 잠옷의 앞섶을 내버려 둔 채 밤새도록 창 밖을 내다보았다. 서서히 안친 안개가 걷히고 여자네 아파트 앞을 휘몰아 흐르는 세느 강의 구불구불 길다란 지류가 거무스름하게 드러났다. 꼭 벗어놓은 창녀의 검은 스타킹 같애. 언젠가 여자는 남편에게 강을 바라보며 이런 비유를 쓴 적이 있었던 걸 기억해 내었다. 여자는 자신의 남은 생이야말로 벗어놓은 창녀의 스타킹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자 온몸이 저리게 쓸쓸해졌던 것이다.
  늦겨울 날씨 치고 어제는 무척 추웠다. 남자에게 전화를 했을 때, 남자는 대낮인데도 당장 만나러 오겠노라고 했다. 차를 가지고 온 남자가 "어딜 가지?" 했을 때, 여자는 "바다로 데려가 줘"라고 했다. 날은 추웠지만 하늘이 기막히게 푸르고 무엇보다 햇빛이 투명하게 맑았다. 길가의 나목들의 그림자가 건물 벽에 길게 누운 나른한 오후, 여자는 운전하는 남자의 오른쪽 어깨에 살포시 기대 잠들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그러나 남자는 운전 중이었다. 그걸 알았을까. 남자는 여자의 왼손을 끌어다 자신의 오른쪽 무릎 위에 두고 쓰다듬었다. 기어를 바꾸기 위해 남자의 손이 가끔씩 떠나갔다.
  살짝 잠이 들었던 여자가 눈을 떴을 때, 이미 하늘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차가 시내를 빠져 나오는데 너무 막혔어. 바다는 너무 멀어. 대신에 자유로를 달려 이리로 왔어. 봐, 겨울 강이야. 노을이 지는 게 장관이잖아. 강을 바라보며 드라이브나 하자. 넌 금방 떠날 테지. 우린 시간이 없어. 바다로 가기 위해 운전을 하느라고 시간을 버릴 순 없잖아?"
  여자는 운전하는 남자의 프로필 너머 후경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차창 너머 임진강을 바라보았다. 강은 넓은 품안에 바람에 서걱이는 갈대밭을 다독이며 황혼 속에 취해가고 있었다. 그 강을 배경으로 운전하는 남자의 얼굴은 조각처럼 굳어있다. 이 남자였나. 팔을 벌려 서까래가 되고 처마가 되어 여자를 깃들게 하는 남자가. 남자의 집, 그 황량한 정자, 벽이 없으므로 문도 없어 늘 바람처럼 허허롭던 남자의 집.
  하지만 여자는 스무 살에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한 이후 남자가 자신을 가두어 주길 바랐다. 이 남자의 감옥이라면 갇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남자 몰래 죄를 잉태했는지도 몰랐다. 여자는 남자 몰래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남자는 바람을 막을 집을 지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리 어려도 여자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에게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도.
  결국 아이는 여자의 부모의 강권으로 하늘이 다른 어느 먼 나라로 입양 보내졌다. 태어난 지 일주일 만이었다. 오랫동안 궁리하여 아이에게 '누리'라는 이름을 붙여 주리라 마음먹고 있던 터였다. 이름도 미처 지어주지 못했던 아이는 여자에게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그래서 여자에겐 최초의 태동의 기억과 함께 아랫배의 아이가 열고 나온 흔적만이 희미하게 남게 되었다.
  "황혼이 되면 무슨 생각이 드니?"
  여자는 대답대신 한숨을 쉬었다.
  "우리 어머니, 황혼녘만 되면 큰형 네 집 현관문 앞에서 당신 신 내놓으라고 떼쓰셨다.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치매로 한 오 년간 고생하셨지 노인네 때문에 몇 겹으로 안정 장치를 달아 놓은 현관문을 달그락거리며 해거름만 되면 발을 동동 구르셨지. 실제로 어머니는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서 집을 나간 적도 있었어. 그때마다 우리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평생을 사셨던 고향으로 가고 싶어한다고 생각했어. 그러나 어머니는 솔미재라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지명에 줄곧 집착하면서 그리로 해 지기 전에 가야 한다고 우기시는 거였어. 늘 황혼녘만 되면 맨발로 동동 발을 구르면서 어린애처럼 떼를 쓰셨지.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 정신 놓은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솔미재가 어딘지 알 수 있었지. 문상 온 이모님과 형이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가 슬쩍 솔미재를 이모한테 물었던가봐. 이모가 한참 혀를 끌끌 차면서 에이그, 망령아 나도 곱게 날 것이지. 무덤까지 가져가면 좀 좋아, 그러며 마지못해 털어놓는 말이, 어머니가 한동네 살던 아버지에게 시집오기 전에 남몰래 사랑한 총각이 강 건너 솔미재에 살았다는거야. 무슨 사연이 있는 줄은 모르지만 깊은 산, 숯 굽는 가마에 혼자 사는 총각이었대. 아버지와 날을 받아 혼례를 올리기 이틀 전날 밤, 어머니는 이모에게만 몰래 기차표를 보여주었대. 그런데 다음날 태풍 때문에 비가 억수로 와서 마을의 강이 다 불어나서 어머니는 솔미재고 기차역이고 다 갈 수가 없었던 거야. 홍수로 어머니네 마을이 고립되었던 거야.
  나는 요즘 그런 생각이 들어. 한평생 어머니의 마음의 고향은 어디였는지……슬픈 얘기지 않니?"
  여자는 지독하게 취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다.
  "만약 이담에 당신은 황혼녘에 신을 찾아 신고 어디로 가지?"
  "난 포기해야지. 갈 데가 너무 많아서……."
  남자가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남자가 차의 속도를 서서히 줄여 갓길에 세웠다.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서쪽 하늘을 빼고는 사위에 조용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남자가 몸을 돌려 여자의 머리칼 깊숙이 손을 집어넣어 기습적인 입맞춤을 했다. 뜨겁고 격정적인 키스였다. 남자가 갑자기 시트를 젖혔는지 여자의 다리가 반사적으로 꺼떡 올라갔다. 내려졌다. 남자의 몸이 여자에게 실리면서 여자의 꼭 낀 투피스의 어디선가 솔기가 튿어지는 소리가 났다. 지나가는 차가 전조등을 번쩍이며 스쳐갔다.
  잠시 후 여자의 몸에서 떨어진 남자의 얼굴은 루즈가 번져 분장이 서투른 삐에로 같았다. 남자가 담배를 물어서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여자에게 말했다.
  "떠나는 자들은 몰라."
  뭘 모른다는 것인지. 남자는 골이 난 듯 담배를 뻑뻑 빨아 댔다.
  여자는 남자가 투정을 부리는가, 했다. 그러나 그건 전혀 그답지 않다. 그도 나이가 들어 외로움을 타는 걸까. 남자는 여자가 머무르건 떠나건 늘 그 점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수많은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를 떠나게 한 요인이 아닐까, 여자는 가끔 생각하는 것이다. 남자는 어떤 여자도 구속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여자를 떠나게 했다고.
  여자의 루즈가 남자의 얼굴에 뭉개진 대신 남자의 향수 냄새가 여자의 목덜미에 들러붙었다. 여자는 다년간의 면세점 점원경력으로 그 냄새가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에고이스트'라는 걸 안다.
  여자는 남자가 에고이스트라고 생각해 본다. 남자는 천성적으로 고독을 좋아한다. 여자를 구속하고 길들이길 싫어하는 남자. 그런 남자에게는 늘 허기진 야성이 전해져 온다. 바로 그것이 강렬한 스파크처럼 여자의 몸을 점화시키곤 했다.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남자의 흰 목욕가운을 걸치고 나오다 여자는 목욕실 수납장에 여자용 팬티가 서 너 장 개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렌즈 소독액과 여자용 향수도 들어 있다.
  샤워를 끝낸 여자는 남자와 아침 식사를 했다. 커피는 맛과 향이 훌륭했고, 토스트는 알맞게 구워졌고, 계란프라이는 터지는 않고 고소했다. 드레싱이 알맞은 셀러드도 오래 휘젓지 않아 재료의 싱싱함이 그대로 살아 있어 훌륭했다.
  "아 참, 목욕탕 여자용 화장수를 쓰지 그랬어? 원한다면 팬티를 꺼내 입어도 되는 데 말야. 깨끗하게 삶아서 빨아 놓은 거거든."
  "누구 건데? 함께 사는 여자가 있는 거야?"
  "아니, 그냥 버리기 뭣해서 모아 뒀지."
  "당신다워."
  "참, 네 손수건과 머리핀도 어디 서랍에 들어있을 텐데. 오 년 전에 떨어뜨리고 간 거였어."
  "그거 단 여자한테 빌려준 적 있어?"
  "응, 머리핀은 얼마 전까지 혜규라는 여자가 집에 오면 가끔 썼었어. 그 여자완 결혼할 뻔했었는데……."
  "그럼 저 물건들은 다 혜규란 여자 거야?"
  "아니. 섞였어."
  여자는 셀러드를 오물거리며 하하, 웃었다.
  "그런데 왜 결혼 안 했지?"
  "그 여자, 나랑 석 달 정도 살았는데 도망가더라. 내가 만나 여자 중에 섹스를 가장 잘 하는 여자였는데. 모한적이고 아방가르드한 테크닉도 있었고. 지금도 생각이 많이 나."
  "언젠가 그 여자도 당신의 정자에 가끔은 쉬러 오겠지."
  "그러겠지."
  남자가 쓸쓸하게 웃었다. 남자가 곧 뒤돌아서 셀러드 접시와 커피잔을 치우다 말고 여자를 번쩍 안아 식탁 위에 앉힌다. 남자는 여자의 무릎에 고개를 묻는다.
 "가끔 네 생각했어. 혹시 이제나저제나 나와서 한 번 다녀가지 않을까. 몇 년만에 태풍처럼 나타났다 홀연히 가 버리면 내 마음이 얼마나 쑥대밭이 되는지 넌 모를 거다. 널 안을 땐 늘 마지막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살면서 기다려져. 내가 가끔 네게 찾아가면 참 좋겠는데, 하는 생각도 해봐. 다 부질 없지. 나 이제 늙었나봐. 옛날 같지 않게 외로움을 타니 말이야. 하지만 난 우리들의 이런 관계를 사랑해. 떠나기 위해 몸을 바쳐 사랑하는 관계."
  까칠한 뜨거운 턱이 허벅지 살에 닿자 여자는 남자의 뜨거운 머리통을 껴안고 식탁 위에 몸을 누인다. 여자의 어깨는 작은 식탁 끝에 닿아 있고, 머리는 식탁 밑으로 늘어졌다. 긴 머리칼이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여자는 물구나무 선 것처럼 거꾸로 비친 창 밖 풍경을 내다보았다. 하늘이 흔들리는 어항 속처럼 불안했고 천장 위의 알전구 들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에 여자는 눈을 감았다. 남자는 오늘 하루 종일을 여자와 이렇게 보낼 것이다. 여자는 다시 자신이 모래밭의 두꺼비집인 것처럼 생각됐다. 속의 공동(空洞)을 넓히느라 손을 넣어 모래를 파내고 속을 비우는 찰나 무너져 내리는 모래집. 남자는 갈퀴 손처럼 여자를 한없이 비우고, 여자는 부서져 내리고. 남자는 더 깊어지는 허기로 결국엔 나가떨어질 것이다. 늘 그랬다.
  집착이 없는 관계. 이게 무슨 사랑이야? 여자는 남자에게 한 번도 그걸 묻지 않았다. 남자도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언제부턴가 여자 스스로도 남자를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이년이나 삼 년을 주기로 남자를 찾아왔다. 중독인가? 결핍인가? 그건 달이 차면 기울고, 매달 멘스를 하듯 생리적이고 본능적인 충동일 것일까. 늙어 정신을 놓고 죽음을 기다리게 될 때, 황혼녘이 되면 여자도 신을 찾아 신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헤맬 것인가. 여자는 자신을 좀더 비워 내기 위해 남자를 몸 속 끝까지 받아들인다. 여자는 눈을 감고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듯, 양손으로 식탁다리를 필사적으로 거머쥐었다. 그때 가느다란 멜로디가 어디서 울려 나왔다. 곧 식탁 다리의 삐걱대는 소리가 잦아들더니 남자가 여자의 몸에서 내려갔다. 남자가 거실의 소파 쪽으로 몸을 옮겨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접어드는 소리가 났다. 휴대폰 안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적요한 집안으로 앵앵거리며 새어 나왔다.
  여자는 눈을 떴다. 햇빛이 차암 좋네, 여자는 속삭여 보았다. 남자는 햇빛 잘 드는 거실 창 옆, 괘종 시계 밑에 기대어 서 있다. 시계는 거꾸로 보아선지 도무지 몇 시인지 얼른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연신 오른손으로 땀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순간 남자의 앞머리칼에서 튕겨 나가는 땀방울들이 햇빛에 반사되는 것 같았다. 남자는 잠깐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햇빛은 땀으로 번들대는 남자의 나신을 아름답게 부각시켰다.
  "그래, 알았어. 오늘은 곤란해. 내가 다시 연락할게. 아냐, 지금 짐이 아니라니까."
  여자의 목고개가 고통스럽게 아파 올 무렵 남자가 식탁 위에 성큼 올라앉아 여자의 목고개를 받쳐들고 무릎 위에 안았다. 남자가 여자의 긴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말라 쥐고 입술로 빨면서 말했다.
  "신경 쓰지마. 꼭 바람난 남편 잡도리하듯 하는 여자는 질려. 너도 남편한테 그러니?"
  여자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남자의 아래턱을 만지작거렸다. 살짝 갈라진 곳을 엄지손톱으로 긁기 시작했다. 남자의 성가신 듯 고개를 흔들었다.
  "혼자 있다는 게 얼마나 고통인지 넌 모를 거야. 요즘엔 나도 결혼하고 싶어. 등이 시릴 정도로 쓸쓸함아 느껴질 때가 많아. 여자가 없어도 아이라도 하나쯤 있으면 할 때가 다 있으니까. 혈육의 따스함 나이 먹어 가니까 뭐 그런 게 그립기도 해."
  남자가 이제 늙어 가는 것일까.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어리석다고 여자는 생각해 본다. 여자는 남자가 가여웠다. 여자는 수년 전 에트르타에서 만났던 한국 소녀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지금쯤 제법 처녀 골이 날 그의 아이가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자라고 있다는 걸 말한다면 이 남자의 표정은 어떻게 변할까.
  다시 여자의 머리채가 식탁 밑으로 출렁, 하고 내려오고 식탁 다리가 심하게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미처 치우지 못한 설탕그릇이 덜덜거리다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여자의 머리칼이 성난 물결을 탄 수초처럼 흔들렸다.
  여자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비어져 나와 눈썹 쪽으로 흘러갔다.

 

                                                             *

 

  그녀는 섹스를 끝내고 잠깐 잠이든 남편을 바라보고 있다. 남편의 이마엔 땀이 나 있다. 손으로 땀을 닦아 머리칼 쪽으로 쓸어준다. 아마에 세 가닥 주름살이 언제부턴가 더욱 깊어져 있는 걸 본다. 머리칼을 쓸다보니 앞 머리칼 속엔 흰 머리칼이 듬성듬성한 것도 보인다. 인생의 황혼 무렵, 이 남자도 자신이 흘려버린 구슬을 찾아 신을 찾아 신고 헤매 일 것인가. 가슴속에 짜르르, 연민이 끓어올랐다.
  격정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한순간의 깊은 상처는 긴 세월 동안 흉터를 남긴다. 함께 하는 세월 동안 남편은 그녀의 흉터를 핥아 줄 것이고 그것이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저 아름다운 하나의 습관, 견딤, 의리라 한들 어떨까. 생이라는 건 질긴 것이다. 구슬을 꿰는 실처럼. 하루하루 끊임없는 애증으로 엮어진 질긴 실인 것이다.
  남편은 집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삼계탕을 끓여주고 싶어했다.

 

                                                              *

 

  나는 지금 그녀를 보고 있다. 그녀는 강변을 향한 아파트 부엌 창에 상반신을 드러내고 있다. 창을 열어 놓고 담배를 피고 있다. 슈미즈 바람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는 그녀의 벗은 어깨가 부풀었다. 내려온다 얼굴은 상기되어있지만 평온한 모습이다.
  비인지 안개인지 모를 입자가 강 주위를 떠다닌다. 이 비오는 날, 멀리서 보면 집 앞에 있는 그녀는 꽤나 아늑해 보인다. 부엌에선 삼계탕 끓는 소리가 자작자작, 빗소리에 잦아들고 있을 것이다. 소리 죽여 우는 여자의 흐느낌처럼, 격렬한 섹스를 끝내고 잠든 남자의 박동소리처럼 고요히 끓고 있을 것이다. 삼계탕이 끓고 있는 동안 그녀는 고즈넉한 평화로움에 젖는다. 살아서 펄떡이는 것들을 모두 슈트 냄비에 안치고 서서히 고아내는 일. 살의나 열정보다는 평화로움에 길들여지는 일. 그건 바로 용서하는 일인지 모른다.
  그녀는 이제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타이머에서 종소리가 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