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편 소설

2005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 - 달의 나무 / 이은유

시인 최주식 2010. 2. 5. 23:52

2005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


 달의 나무 / 이은유
 
 
 사립 고등학교 생물선생이 우리 동네로 이사 온 건, 늦은 봄 어느 화창한 토요일이었다. 이렇게 화창한 토요일에 이 도시에서 제일 허름한 동네의 가장 낡은 집으로 누군가 이사 왔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그 특별한 이사가 있는 시간에 나는, 트럭 소리를 들으며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페니스를 만지고 있었다. 내 페니스가 단순한 배설기관으로 전락해버린 지는 꽤 오래 되었다. 마지막으로 아내의 몸에 들어갔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는 나비가 되어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배추벌레를 만지는 것처럼 서글펐다.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허파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이른 봄 대륙에서 불어온 황사가 아직도 느껴졌다.
 트럭이 멈추는 소리가 들리고 난 한참 후 나는 잠시 눈을 떴다. 창문이 눈부셨다. 아내가 외출하기에 더없이 좋은 토요일이었다. 아내가 보는 사람 민망스러울 정도로 다리를 절며 외출을 하면 나는 케이블 채널로 중국 영화를 보며 따분함을 달래야 한다. 날마다 모국어라도 듣지 않으면 죽은 배추벌레 같은 내 페니스가 너무 불쌍해지기 때문이다. 한국인 어머니에게서 이 나라 사람 피를 절반 물려받았다 해도 나는 엄연한 중국인이었다.
 짐칸이 열리고 장롱 같은 무거운 짐을 끌어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텁텁한 목소리가 골목을 뒤흔들었다. 나는 여전히 팬티 속에 손을 넣은 채 환상 속으로 빠져보려 애를 썼지만 다시 감은 눈 속에 하얗게 탈색된 빛만 가득 찼다. 또 다시 텁텁한 목소리가 날아오고 트럭에서 냉장고를 끌어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날마다 정오부터 두어 시간 동안 나는 잠을 잔다. 그동안 혼자 약국을 지키는 아내는 급한 환자가 아니면 언제나 이렇게 말을 한다. “약사님, 지금 주무시고 계세요.” 따라서 내 약국을 찾는 환자들도 햇빛이 정수리에 수직으로 꽂히는 한낮은 내가 오수에 젖는 시간으로 알고 있다.
 아내가 혼자 지키는 동안의 약국은 언제나 한가했다. 아주 가끔 가벼운 증상의 환자들이 약국 문을 밀 뿐이었다.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환자를 기다리면서도 아내는 심심해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확성기를 튼 채소와 생선과 과일 트럭이 지나다녔고, 정형외과를 끼고 있는 동네에서는 크고 작은 일들이 종종 벌어졌다. 시장에 가지 않고도 야채, 과일 생선, 계란 따위를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아내는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아내가 매일같이 돌보지 않았다면 약국의 화분들은 벌써 쓰레기차에 실려가버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내는 무언가 늘 채우고 사는 사람이었다. 냉장고를 채우듯 사소한 일들로 자신의 시간을 채우고 욕망을 채우고 몰래 금고에서 돈을 꺼내다 통장의 잔고를 채웠다.
 페니스는 결국 부활하지 못했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내가 금고에서 돈을 훔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녀는 날마다 삼만 원 정도의 돈을 금고에서 가져갔다. 아내는 나 모르게 돈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가져다줄 믿음과 사랑도 함께 꺼내갔다. 아내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줄 알지만 나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빨갛게 익은 석류 알을 터뜨리듯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태연하게, 아내의 손이 다녀간 금고를 열어 용돈을 주기까지 한다. 나는 아내와는 차원이 다른 민족의 후손이었다. 아버지라도 나처럼 했을 것이다.
 
 시계는 한 시 삼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내가 외출 준비를 하기에 시간이 부족하진 않을 것 같다. 거실 문을 열자 계단 아래서 조금은 들뜬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 올라왔다. 계단 앞의 대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살갗을 부풀리는 바람이 타고 올라오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어지러웠다. 아직도 어제 마신 술이 덜 깬 것 같았다. 하루도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없는 나였다. 발기부전은 순전히 결식과 술 때문이었다. 이것은 의사가 했던 말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내의 외출 시간은 오후 두 시로 정해져 있다. 친구들과 모임이 있는 날이 아니면 아내는 언제나, 낮잠을 잠깐 졸고 난 나와 중국 보이차를 한 잔씩 나눠 마시고 집을 나섰다.
 아내의 외출은 중국인인 아버지와 한국인인 어머니가 두 달 사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루아침에 저세상으로 가버리자 파출부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는 시간에 아내는, 내가 대학에 다닐 때부터 모아온 진열장의 미니어처를 모두 꺼내 곧잘 닦곤 했다. 나는 아내 앞에 널린 작은 술병들을 기가 막힌 표정으로 보았다. 갑자기 많아진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내가 나중에는, 하루 종일 화장실 변기를 윤기 나게 닦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무엇보다 아내는 아버지를 잘 보살펴주었다. 이국땅에서 죽음을 맞게 된 괴팍한 중국인 늙은이를 가엾게 봐주었다. 나는 할 일 없이 미니어처나 닦고 있는 아내를 보자 보답과 구원의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원래 중국의 명의 집안 자손이었던 아버지는 이 나라가 독립하고 난 얼마 뒤, 어린 나이에 혼자서 이 땅으로 건너왔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일가를 이룬 아버지는, 고집 세고 게으르며 자만심 강한 대륙성 기질에다 자수성가한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독선과 이기심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나는 전혀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른이 된 나는 아버지와 똑같았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버지는 그저 중국말을 가르쳐주었고, 가업을 조금이라도 이어받기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의술을 조금 물려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내에게 외출을 권하는 나는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위엄과 너그러움을 갖춘 척 한 나는 아내에게 용돈을 주면서 말했다. “학원 같은 데서 뭐라도 배워보는 게 어때?”
 약국에 아내는 없었다. 밖을 내다보았지만, 골목에는 트럭도 아내도 보이지 않았다. 웬일인지 아내의 휴대폰만 진열장에 놓여있었다. 자주 찍힌 번호로 아내는 십 분 전에 통화를 했다. 나는 재빨리 폴더를 덮었다. 이내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는 후회가 들었기 때문이다. 휴대폰을 제자리에 놓으며 문밖을 내다보는데 마침 아내가 몹시 다리를 절며 아주커 치킨 가게를 돌아 나오는 게 보였다. 꽤 떨어진 거리에서 눈이 마주친 아내에게 나는 진열장의 먼지를 쓸어보였다. 그리고 아내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건조해서 먼지가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아내는 봄날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그런가, 한쪽만 쌍꺼풀이 진 눈과 불그스름한 입술의 얼굴이 몹시 해맑고 화사해보였다.
 “차들이 지나다녀서 더 그래. 저 골목으로 트럭이 들어가는데 바퀴 밑에서 안개가 일어난 것 같더라니까.”
 아내는 치킨 가게 골목을 가리켰다. 저 골목으로 대형 포장이사트럭이 들어갔다고 했다. 조금 덥다 싶은 봄날에 거대한 짐을 끌고 허름한 동네로 이사 온 작자가 누구인지는 관심 없었지만, 나는 아내에게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 아버지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대형트럭씩이나? 짐이 많나보네?”
 “작은 트럭 한 대는 갔어. 남자가 사립 고등학교 생물선생이라는데, 책은 없고 묵은 살림이 많아. 그 집으로 어떻게 다 들어갈 수 있을라나 몰라. 한옥은 넓기만 하지 별로 쓸모가 없는데.”
 아내의 말을 들으며, 나는 치킨 가게 골목의 한옥을 떠올렸다. 이 동네에서 장미나무가 제일 많은 집. 구월에 금목서의 등황색 꽃이 향기를 뿜어내는 집. 그 집은 장미와 금목서가 아니면 봐줄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낡은 목조건물에 불과했다. 아파트나 전세를 끼고 살 수 있는 반듯한 집 다 놔두고 그런 집으로 이사 왔다는 사립 고등학교 생물선생이라는 위인이 문득 궁금해졌다. 아내는, 조각처럼 잘 생기기만 했지 보면 실망할 것이라고 했다. 오후 두 시였다. 아내는 다리를 절며 오후 두 시의 외출 준비를 하러 올라갔다. 아내의 옷자락이 스친 아마릴리스가 흔들렸다. 화사하다 못해 요염한 꽃은 그러나 향기가 나지 않았다.
 
 그 날 저녁 생물선생이 약국을 찾아왔다. 그는 피 묻은 화장지를 풀어내며 장롱을 옮기다 문창살의 부러진 나무에 손을 찔렸다고 했다. 나는 진열장 위에 후시딘 연고와 대일밴드를 꺼내놓으며 그를 보며 물었다. “오늘 낮에 이사 오신 분인가 봅니다.” 그는 흰 이를 드러내며 예. 하고 짧게 대답했다. 웃는데도 길 가에 혼자 서있는 미루나무처럼 쓸쓸해보였다.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고, 옷은 먼지투성이였다. 아내가 보면 실망할 거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사 하느라 힘든 하루를 보내서 그런 건가 했지만, 마음 깃들일 곳을 찾지 못해 얼굴에 오래 길들여진 표정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다시 생물선생을 볼 수 없었다. 미루나무의 잔영이 맑은 소주잔에 가끔 떠올랐지만 한 주가 지나자 그마저도 잊어버렸다. 아내는 날마다 귀가 시간이 늦었고 파출부가 차려준 저녁은 여전히 맛이 없었다. 아마릴리스가 한창일 때였다. 나는 중국영화 대신 꽃 속에 파묻혀 지내고 있었다. 그날은 이상하게 어느 토요일보다 환자가 드문 날이었다. 여전히 날씨는 좋았다.
 문득, 향기 없는 주홍색 꽃은 아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아내의 사타구니를 더듬듯 화분 속으로 손을 넣었다. 유난히 골짜기가 깊고 숲이 짙은 아내였다. 늘 따뜻한 샘물이 고여 있는 아내의 아랫도리를 떠올리자 몸이 뻐근해졌다. 그러나 내 페니스까지는 힘이 뻗치지 못했다. 페니스가 다시 발기한다 해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다리병신의 중국 사대주의는 끝났다고 선언했던 아내의 몸이 열릴지는 알 수 없었다.
 엉큼하고 음탕한 느낌을 주는 이 꽃들은 모두 아내가 사온 것이다. 아내는 가끔 어딘가 흐트러진 표정으로 아마릴리스 화분을 안은 채 택시에서 내리곤 했다. 그런 날은 반드시 남자를 만나고 온 날이었다. 그런 날은 아내의 말투와 몸짓에 밖을 돌아다닌 동안의 지문이 어렴풋이 묻어났다.
 오늘도 아내에게서는 들뜬 활기가 술 냄새 만큼 풍겨날 것이었다. 아내 앞에서는 대범하고 강한 중국인인 척 하던 내 목에 뜨거운 불덩이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다리를 꺾고 주저앉으며 화분을 노려보았다. 내 영혼의 무거운 육체는 그러나 정오의 침묵 앞에 쓰러져버렸다.
 생물선생을 다시 만난 건 장마가 시작된 어느 날이었다. 눅눅한 물비린내와 어둠이 푸르스름하게 깔리는 저녁 무렵 그는 모기약을 사러왔다. 밖에는 종일 쏟아지다 그치기를 반복하던 비가 이슬비로 변해 날리고 있었다. 여전히 쓸쓸한 표정의 그가 모기약을 사들고 약국 문을 나서다 말고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바로 앞 포장마차를 가리키며 한 잔 하시겠어요? 하고 물었다. 아마릴리스도 거의 다 지고 무료했던 나는 두말없이 그를 따라갔다.
 그는 오리매운탕을 주문했다. 매운탕이 나오기 전 탁자에는 오이와 메추리알이 놓여졌다. 생물선생은 내 잔에 술을 채웠다. 나도 그의 작은 유리잔에 고독을 증류한 빛깔의 소주를 8할 채웠다. 생물선생과 내 시선이 오리매운탕의 더운 김 속에서 마주쳤다.
 “아까 몹시 출출해보였습니다.” “네. 참, 한옥은 많이 불편할 텐데요?” 생물선생은 술잔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미친놈이라고들 하셨을 겁니다. 오늘 아침 대문 위 옥상에 올라갔다가, 지붕의 깨진 기와 사이에 작은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 걸 보고 저도 한숨을 쉬었으니까요.” 그는 나를 바라보고 다시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금목서 때문입니다. 그놈의 나무 한 그루 때문에 아파트로 가자는 아내를 졸랐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우리 학교 화학선생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보름 쯤 전에 이사 간 전 주인의 아들이 내 앞에 앉아있는 생물선생과 같은 학교에 있다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생물선생이 나무 한 그루 때문에 그 낡은 집으로 이사 했다는 것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꼭 금목서 곁에 살고 싶었습니다.”
 금목서는 원래 중국에 사는 나무다. 나도 가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한옥의 금목서를 보고 마당이 있으면 한 그루 심어보고 싶다고 흘리듯 말하던 아버지에게서 그렇게 들었다. 귀족적으로 생긴 나무는 기후가 비슷한 영호남 지방에서 정원수로 더러 심는 나무라고도 했다. 금목서 곁에 살고 싶어 구질구질한 집으로 이사를 할 정도라면, 생물선생에게는 미루나무 같은 얼굴을 갖게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을 법했다.
 “저는 학교에서 정 선생으로 불립니다. 하지만 제 아버지가 저와 같은 직업이었다면 강 선생이라고들 했을 겁니다. 외할아버지가 어머니와 이모님 두 분 밖에 두시지 못해 제가 대를 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약사님. 어렸을 때부터 두 집안을 오가다보니 제 존재가 물 위 기름처럼 느껴지더란 말입니다. 이쪽 집안을 가면 뿌리가 덜 내려진 나무 같고, 또 저쪽에 가면 모래처럼 엉기지 못하고. 참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나무 곁에 살면 덜 외로울 것 같았습니다.”
 생물선생이 말을 마친 순간, 내 머리로 뻗치던 술기운이 급속히 하강하는 것 같았다. 콧등이 시큰해지고 있었다. 눈 가장자리가 뜨뜻해졌다. 나는 그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의 잔이 내 잔에 가볍게 부딪쳤다. 나는 그의 눈을 그윽하게 들여다보았다.
 “나도 금목서라면 믿겠습니까?” “약사님이 금목서라면…. 혹시?”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니는 이 나라 분이시지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나는 아버지와 중국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생물선생의 형님이 되었다. 소주는 다섯 병이나 비워져있었다. 그때까지도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칵테일 말고 무엇을 또 배우는 건지 아내의 귀가는 너무 늦어지고 있었다.
 
 매일 저녁이면 생물선생과 나는 포장마차에서 만났다. 내게 아마릴리스 따위는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나는 생물선생의 퇴근시간을 기다렸고 하루하루가 활기 넘쳤다. 오랜만에 숨통이 트이는 날들이었다.
 그런 어느 저녁, 모처럼 일찍 귀가한 아내가 갑자기 새로운 칵테일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사극 드라마를 보고 있을 때였다. 화면에서는 건장한 사내가 말을 달리고 있었다. 사내는 남자 주인공에게 급한 편지를 전해야 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말이 달리는 장면은 이십 초도 넘게 반복해서 나왔다. 나는 지루해서 아내를 보고 아버지처럼 말했다. “저게 무슨 중요한 장면이라고 저렇게 오래 나올까? 중국 영화라면 저 장면을 저렇게 길게 하지 않고도 의미를 잘 전달하는데.” 그때 아내의 눈빛이 약간 새파래진 것 같았다. 자주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그것은 나만 아무렇지 않은 상황이었다. 화면을 외면하고 벌떡 일어난 아내는 새침한 목소리로, 지루한 데 칵테일 한 잔 마실 테야? 하고 말했다. “이번에 새로운 칵테일을 배웠거든.” 하는 아내의 말에 내가 세이커도 없는데 했더니 그런 건 없어도 된다고 했다.
 아내는 조금 전 안고 왔던 쇼핑백에서 여러 개의 병을 꺼냈다. 나는 수족관과 미니어처 진열장을 마주보고 앉아 아내가 칵테일을 만드는 걸 지켜보았다. 한 가지 스피리츠에 리쾨르는 네 가지나 되었다. 아내는 글라스에 1 메저 컵의 아마레도와 화이트 카카오와 발리와 갈리아노와 바카디 151을 차례로 붓고 머들러로 저었다. 그리고 글라스를 기울여 일회용 가스라이터로 불을 붙인 다음 살짝 태워 갈색을 띤 황금빛 술을 만들었다. 캬라멜과 초콜렛 향이 감미롭고도 그윽한 술을 건네면서 아내는 누군가를 유혹할 때나 흘렸을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아내에게 술 이름을 물었다. 아내의 대답은 간단했다. “파우스트.” “파우스트? 괴테의 희곡 이름이군.” “이 술을 마실 때는 숨을 쉬면 안 돼.” “왜?” “그건….”
 아내는 눈빛을 생각에 담그며 말꼬리를 길게 뺐다. 아내가 말꼬리를 길게 늘여 빼는 경우 대부분은, 모국어임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어휘를 찾지 못할 때였다. 나는 아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손을 들어올렸다. 향기로운 냄새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내는 다시, 숨을 쉬면 안 돼. 라고 말했다. 나는 아내를 힐끗 쳐다보고 들어올린 잔을 입술에 댔다. 숨은 꾹 참은 채였다. 그리고 천천히 술을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부드럽고 달콤했다. 하지만 냄새를 마실 수 없는 술은 음료수나 다를 바가 없었다. 또 아내의 말이 너무 궁금하기도 했다. 다시 잔을 입에 대면서 나는 살짝 코를 열고 말았다. 파우스트의 향은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그윽한 악마의 향기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멍하니 허공에 시선을 놓고 있는데 마치 내가 귀족적인 나무 앞에 있는 것 같았다. 섬세한 결의 껍질, 곧은 줄기, 메타세콰이아와는 또 다른 귀족적인 잎사귀. 고귀한 나무는 어느 새 커다랗게 자라 황금빛 별 같은 등황색 꽃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코끝에는 꽃에서 풍기는 향기가 맴을 돌았다.
 아내는 아홉 개의 꼬리를 치마 밑에 감춘 구미호처럼 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독하지? 그러게 숨을 쉬지 말라니까.”
 아내가 이런 말을 할 때 나는 두 번째 파우스트에게 코를 열었다. 냄새는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자극적이고 퇴폐적이며 구원의 희망을 갖지 못한 냄새였다. 내 사타구니에 축 늘어진 작은 혹을 만지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오랫동안 발기하지 못하는 나의 페니스. 아내의 몸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는 나의 몸. 아내가 오기 전에 이미 두 병의 소주를 마셨던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몽롱하게 떨어져버렸다.
 
 그 후로 나는 두 번 다시 파우스트를 마시지 않았다. 난생처음 마셔본 술이 그립기는 했다. 술의 잔향도 내 코와 머릿속에 남아 줄곧 맴돌았다. 옅어진 냄새는 아내의 몸처럼 나를 나른하게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모처럼 노을이 약국 창문에 비치는 날 저녁인데도 나는 조제실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도무지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저녁이었다. 까닭 없이 무기력 하다는 것 말고는 아무 이유도 없었다.
 그때, 여느 날처럼 생물선생은 불이 켜지는 가로등 밑을 걸어왔다. 호리호리한 그의 몸피가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의 몸에 걸쳐진 린넨 셔츠 때문이었다. 그는 고개를 젓는 나를 보고 근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괜찮아. 그냥 나가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나는 그를 조제실로 불러들였다. 그가 들어오자 조제실은 아주 작은 밀실처럼 보였다. 동쪽에 아주 작은 창문이 하나 있고 약국으로 연결된 통로 외에는 한약을 넣어두던 약장과 양약을 넣어두는 약장으로 채워진 작은 방. 음모나 불륜, 어느 것이든 나쁜 짓을 하기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양장피 한 접시와 소주를 배달시켰다. 우리가 저녁마다 만나는 이유는 술 한 가지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이 어느 새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도 나처럼 저녁 전이었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그가 한약장을 만지며, 지금도 한약을 취급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약국을 개업할 때 아버지가 물려준 것이라고 대답했다. 의약분업이 실시되기 전까지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약장을 열었다 닫곤 했다. 그도 아버지가 생각난 것 같았다. 그는 어렸을 때 이야기를 했다.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는데, 그는 외할아버지를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서 진짜 외할아버지의 아들이 되자 외할아버지가 더 멀게 느껴지더라고 했다. 아버지라고 하기도 그렇고 외할아버지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때부터 몹시 외로웠다며 그는 내 손을 잡았다. 그의 맑은 눈은 촉촉하고 손은 뜨거웠다. 내 심장으로 뜨거움을 전하는 신경의 열전도율은 빨랐다. 내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이상야릇한 느낌이었다. 석 달 전에 금목서가 있는 한옥으로 이사 왔던 그에게, 저녁마다 찾아와 포장마차로 이끌던 그에게, 이런 감정의 나무가 자라고 있었던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때 환자가 왔다. 가벼운 두통을 호소하는 환자는 타이레놀을 찾았다. 내가 천이백 원짜리 타이레놀을 파는 동안 생물선생은 밖에 나갔다 돌아왔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 속에는 소주가 들어있었다. 그가 또 술잔을 채웠지만 양장피처럼 분위기는 다 식어버리고 서먹서먹할 뿐이었다. 말없이 술잔을 내려다보는 시간이 지루해진 나는 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때 생물선생이 말했다. “아까 형수님 봤습니다. 택시에서 소나타로 옮겨 타는 모습이 틀림없이….” “그만 해.” “알고 계셨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중국인은 흔적 없이 소문을 쓸어 덮을 수 있을 만큼 대범해야 했다. 아버지라도 그랬을 것이었다. 말없이 그리고 연거푸 소주를 입 속에 들이부었다. 하지만 소주는 파우스트처럼 나를 기절시키지는 못했다. 소주에는 파우스트처럼 정신을 질식시키는 화이트 카카오 향이 없었다. 어느 모로 보나 파우스트는, 악마와 겨루기 벅찬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술이었다.
 
 손이 저절로 떨린다는 것을 발견한 건 무더위가 절정에 이른 어느 날이었다. 그 날 나는 소나기라도 좀 내려주었으면 좋겠다고 환자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환자는 약국 아래 전파사 옆의 정형외과 외래환자였다. 삼십대 중반의 남자는 왼손 중지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먼저 시원한 박카스를 건넸다. 그러다 나는 무심코 내 손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멈추려고 해도 멈추어지지 않았다. 나는 태연하게, 재빨리, 환자가 보지 못하도록 감추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당혹스러웠다. 잠깐 아버지를 떠올렸지만 내 뇌리에서 아버지는 입을 꼭 다물고 있기만 했다.
 너무 많은 술을 마셨기 때문이었다. 나는 빨리 마모되는 기계처럼 벌써 고물로 변해가는 부분이 늘어가고 있었다. 페니스가 주저앉아버리고 손이 떨리고, 이 다음에는 어떤 부분이 망가져서 나를 절망스럽게 할까, 두려워졌다. 그 날 이후로는 더 이상 이상야릇한 짓을 하거나 아내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생물선생. 갑자기 귀가 시간이 빨라진 아내. 생물선생과 술을 마시는 거나 아내와 한 방에서 단순히 잠만 자는 거나 별반 다를 것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나는 앞으로 더 많은 술을 마시게 될 것 같았다.
 내 손은 더욱 떨려왔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만나는 장면을 포장마차 남자도 목격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소문은 빨리 퍼져갔다. 아무도 그 말까지는 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내도 자신의 소문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웬만한 여자라면 이쯤에서 외출을 그만두겠지만 아내는 달랐다. 나는 아내를 잘 안다. 절대 그럴 일이 없는 아내였다. 아내는 두 다리가 멀쩡한 여자보다 훨씬 아랫도리 근육이 발달한 여자였고 중국인인 우리 부자에게 오랫동안 상처를 입어온 여자였다. 가끔은 홀로 서늘하고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지만 동네 여자들의 냉랭한 시선쯤은 무시하고 다녔다.
 주위의 냉대와 무성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활보하고 다니는 아내는 원래, 암내를 숨기고 나를 홀린 여자였다. 해질 무렵이면 홀로 철길을 걷던 아내를 본 순간부터 든든한 다리가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건 내가 대학교 사학년 때였다. 그때 아내는 그래도, 물처럼 단순하고 맑은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달라졌다. 아버지가 죽고 난 다음부터, 중국말을 배우지 않게 된 후부터. 달콤함과 부드러움 뒤에 독기를 감춘 칵테일처럼 암내를 들키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할 만큼 뻔뻔스러워졌다.
 아내는 이제 처음 만날 때의 여자가 아니었다. 아내는 내 손을 보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냐는 듯한 힐난의 눈초리로 오히려, 앞으로 생물선생과 만나지 말라고 했다. 눈치 빠른 여자가 단순하게 술을 마시지 말란 뜻으로만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하루 종일 혼자 약국에 갇혀 지내다 사람과 섞이는 것은 그때뿐이라고, 나는 아내에게 딱 잘라 대답했다. 포장마차에서 보내는 저녁 시간마저 없다면, 나는 숨이 막혀 죽게 될 거라고. 술을 마시면 손이 떨리는 것은 없어지니까 염려할 것 없다고. 아내의 아름다운 얼굴에 이 말을 던져주고 생물선생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악마는 엉뚱한 곳에서 손을 내밀었다.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얼굴로 내게 얼굴을 들이댔다. 어떻게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는가, 너무도 나는 망연했다.
 며칠 동안 생물선생과 술을 나눌 수 없게 된 어느 날, 나는 아내의 남자를 보게 되었다. 그 날은, 생물선생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이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서울 삼성 의료원의 영안실을 다녀와야 했고, 점심을 먹고 출발한 여행에서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포장마차의 불빛만 환하던 자정 무렵. 택시에서 내리던 나는 대문에서 포장마차와 이발소 사이 골목으로 급하게 사라지는, 적송처럼 우람한 등을 가진 사내를 보고 말았던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신화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날, 나는 꽃이 다 지고 잎뿐인 아마릴리스가 있는 약국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오그라든 내 페니스를 붙잡고, 역류하는 혈관의 피를 이 악물고 가라앉혔다. 내 인생을 멋대로 셰이크 해버린 아내는 이층에서 냄새를 지우고 있었을 테지만, 나는 조제실 어둠 속에서 기억의 파일을 삭제하는 기능을 찾느라 밤새도록 고심했다.
 아버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와 함께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함께 잠을 자고 밥을 먹어야 할지, 얼굴은 어떻게 마주 대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보았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기억의 삭제 파일을 찾아내고 엔터 키를 두들겨댔다. 그럴수록 뇌리에서 지우고 싶은 영상은 자꾸 복사되어 불어났다.
 생물선생을 다시 만날 때까지도 내 머리에서는, 아내와 사내가 우리 방 침대 위에서 뒹구는 화면이 돌아갔다. 아내의 몸을 애무하는 사내와 사내의 몸을 자극하는 아내. 바닥으로 떨어지는 이불. 증기 기관차처럼 헐떡이는 숨결. 내 머릿속은 두 남녀의 타액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흥분한 동물의 타액에서는 비 오는 날의 비린내 같기도 하고 시큼하게 상해버린 음식 같기도 한 냄새가 났다. 방에서도 거실에서도. 나는 여러 병의 페브리즈를 마구 뿌려댔다. 아내가 이미 모든 냄새를 지워버린 방은 청정했지만, 내게는 이상한 냄새가 자꾸 맡아졌다.
 
 벌써 며칠째 나는 밤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상한 냄새 때문에 도무지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보름달이 환한 밤이었다. 포장마차에서 나온 나는 불 꺼진 이층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아내가 방에 있는지 혹은 그새라도 애인을 불러들여 또 그 짓을 하는 건 아닌지 온갖 불온한 상상을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한참 후 나는 그림자를 앞세우고 골목을 올라갔다. 치킨 가게를 지나자 오른쪽으로 작은 골목이 검은 동굴 입구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작은 골목 입구에 멈춰 섰다. 생물선생이 사는 한옥이 저 앞에 보였고 골목 끝에서 향긋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물처럼 그렇게 불어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향기를 쫓아 골목으로 들어섰다. 원룸을 지나고 다세대 주택을 지나고 한옥이 나타났다. 다세대 주택의 그림자에 묻혀 어둡던 골목이 갑자기 환해졌다. 한옥 맞은편, 양옥집 정원의 나무 그림자만 골목에 늘어져 있었다. 한옥을 지나면 다시 골목은 어둠이었다. 한옥 앞에서 향기는 더욱 진해졌다. 나는 벽돌이 곧 떨어질 것 같은 낡은 담 너머 마당을 넘어다보았다. 남루한 그늘이 깊은 고택의 고요한 뜰 안, 술 취한 사람의 낙서처럼 뻗은 덩굴장미 사이에서 두 그루의 나무는 보름달의 음기를 가득 받고 있었다. 우아하게 뻗은 가지와 솔잎보다 부드러운 잎사귀와 은하수 성운처럼 무리 진 꽃송이들이 서늘한 밤공기를 달콤하고 향기롭게 셰이크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내 눈 가장자리가 뜨뜻해지더니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물기가 번진 눈에 등황색 꽃이 커다랗게 보였다가 가물가물 작은 점으로 흐려졌다. 달에서 안개가 풀려나와 나무를 감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나무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무를 만지고 싶어 손을 뻗었다. 손을 너무 뻗쳤을까, 어디선가 유성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만 놀라지 않았다. 내가 잡고 있는 담이 무너진다 해도 점점 짙어지는 푸른 안개가 나를 숨겨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무는 이제 뿌연 형체만을 달빛에 드러내고 있었다. 다시 유성 하나가 반짝 켜지고 키 큰 남자 하나가 안개 속에서 내게 다가왔다. 그는 언제 여기까지 나를 쫓아 나온 것일까, 나는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나보다도 그가 더 성급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 밤중에.” “이 나무가 불러서 왔어.” “이 나무가요?” “밤새도록 취하고 싶은 향기네.” “그저 취하고만 싶으십니까?” “나무를 안아보고 싶네만…” 내가 하는 말이 귓속에서 환청처럼 들렸다. 그때 또 다시 바람이 불어와 고여 있던 향기를 널리 퍼뜨렸다. 파우스트처럼 황홀한 냄새였다. 그는 내 손을 잡았다. 뜨겁고 촉촉한 손이 나를 잡아당겼다. 나무의 형체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굳이 어둠을 찾을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깊은 그늘 속으로 나를 밀어붙였다. 그의 악력은 자력이 강한 자석처럼 거역하기 힘들었다.
 금목서의 향기가 그윽한 속에서 나는 조금 전의 유성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이미 나무가 사라졌고 마주 선 그 키 큰 남자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고 내가 있는 곳도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나는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뜻밖에 그의 혀는 잘 불려서 삶아놓은 해파리처럼 부드럽고도 따뜻했다. 여자보다 더 섬세한 그의 손은 순하고 유연하게 나를 어루만졌다. 그는 1 메저 컵의 리쾨르였다. 난생처음 맛보는 리쾨르 덕분에 내 몸은 빠르고도 뜨겁게 상승되었다. 죽은 배추벌레처럼 늘어져있던 페니스가 꿈틀거리는 것도 같았다. 나는 그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그러자 내 귓속으로 그의 뜨거운 입김이 쏟아졌다. 현기증이 났다. 그의 뜨거운 입김으로 팽창한 나는 그가 중국사람 같고 내가 한국사람 같았다. 우리가 있는 곳이 지구 아닌 어느 별나라일지도 모르는데 중국이나 한국이 그게 뭐 그리 중요 한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후 며칠 동안 나는 생물선생을 만나지 않았다. 몸은 현실에 담겨있으면서도 머릿속은 먼 행성을 떠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점은 생물선생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 사이 아내는 다시 돈을 훔치고 다리를 절며 늦은 귀가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아내가 외출한 사이 이층에 올라가 그녀의 책을 읽어보았다. 칵테일 책은 화장대 한쪽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놓여있었다. 손때가 나지 않은 책은 중간 부분에 딱 한 줄 빨간 볼펜으로 밑줄이 그어져있었다. 같은 성질의 스피리츠를 혼합하지 않는다. 곡물을 원료로 한 위스키와 진, 위스키와 보드카, 코냑과 알마냑은 결코 혼합하지 않는다. 는 말이 아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었다. 책을 덮었다.
 나는 소주와 이과두주를 섞어보고 싶었다. 미니어처 진열장이 있는 거실로 나서는 내 눈에 아버지의 사진이 들어왔다. 나는 술을 찾으러 가는 대신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심사평(문순태^소설가/광주대 문창과 교수)

 

소설적 구성에 무리 없어”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모두 6편이다. 이 중에서 소설적 서사구조가 약한 `미인, 발을 내밀다', 비문이 많고 밀도가 낮은 `무협소설을 읽는 남자', 인간관계의 `부식’이라는 좋은 알레고리를 살려내지 못하고 구성에서 상투적인 허점을 보여준 `보일러' 등 3편을 제외시켰다.
 `몸의 기억'(이가흔), `쥴리엣 세인트 표류기'(김솔), `달의 나무'(이은유)는 문장의 밀도가 높고 소재도 신선한 편이며 구성력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세 작품은 각각 장단점을 갖고 있다.
 `쥴리엣 세인트 표류기'는 심사위원의 시선을 끄는 작품임엔 틀림없다. 산부인과 의사이며 이중격투기 링 닥터로, 불임치료를 받고 있는 화자는 비밀리에 입국한 한국계 미국 포르노 여배우 쥴리엣 세인트의 겨드랑이 구멍(자궁) 치료를 맡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추상화시키고 있는 곳이 많아 비소설적이라는 지적을 면할 수가 없다. 신체의 어느 곳에도 이식이 가능한 인공자궁으로 불임을 치료한다는 발상 자체가 황당하다.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한 관념은 보편적 진실을 잃게 된다.
 `몸의 기억'은 요즘 유행하고 있는 몸 철학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어려서 성폭행을 당한 상처 때문에 정신적 황폐감에 빠진 화자는 낙태수술이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끝내 아파트 놀이터에서 갓난아기를 유괴하기에 이른다. 오전 9시15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시간 순서 진행이라는 단조로운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몸 철학에 대한 독자적이고도 새로운 해석이 아쉽다.
 `달의 나무'는 화교 2세로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발기부전환자인 중년남자의 권태롭고 무기력한 삶의 일상을 통해, 정체성과 인간관계를 설득력 있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바람을 피우는 절름발이 아내는 잘 만들어진 소설적 인물이다. 화자와 술친구가 된 생물선생의 역할이 약하고 금목서나 칵테일의 알레고리가 미흡한 점이 아쉽다. 결말부분의 작위성이 지나쳐 흠으로 지적할 수가 있다.
 `몸의 기억'과 `달의 나무'를 놓고 고심 끝에 소설적 구성에 무리가 없고 나름대로 주제를 살려낸 `달의 나무'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소설가^광주대 문창과 교수〉

 

--------------------------------------------------------------------------------
당선소감

 

글쓰기 핑계 생겨 기뻐

 

 미숙아를 낳은 것 같아 부끄럽다. 그러나 앞으로도 글을 쓸 수 있는 끈이 생겨 기쁘다. 아주 늙어서까지도 내게는 이렇게 부끄러워하고 행복해하며 글쓰기를 계속 할 수 있는 핑계가 생긴 것이다.
 당선 소식을 듣고 하룻밤을 자고 눈을 뜬 새벽에 문득 바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경찰차를 타고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던 딸의 말도 떠올랐다. 바다는 표정이 산보다 단순해서 별로라고 했으면서, 잠에서 깨자 마자 바다를 생각했던건 아마도, 지금 그 단순함이 그리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당선 소식을 듣고 생각나는 얼굴이 많았다. 무엇보다 교통사고로 지금 병상에 누워있는 남편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다. 남편이 어깨를 수술한 날 늦게 신문사로 허겁지겁 달려가 원고를 냈던 기억이 떠오른다. 마음 속으로 수십 번도 넘게 성호를 그으며 달려간 시간이 아마 일곱 시가 훨씬 넘었을 것이다.
 그리고 채희윤 선생님, 이승우 선생님, 김현주, 늙으신 내 어머니, 민족문학작가회의 아카데미 회원 여러분. 모두 고맙습니다. 매 시간 지각이었지만 그래도 하나의 화분처럼 아무도 모르는 사이 선생님들께서 뿌려주신 물로 잎이 자라고 꽃이 피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작품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전남일보사에 감사합니다.

      약력

 1997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광주^전남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