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반 / 김혜경
상담에 필요한 다섯 종류의 견본교재와 사은품, 계약서와 전단지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가방은 아이를 들쳐업은 무게만 하다. 생이 이만한 무게라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한쪽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가방을 추켜 올린다. 바지 속에 구겨 넣은 셔츠가 옆으로 비어져 나와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체중이 줄어 바지가 헐렁해진 탓이다. 미끈거리는 나일론 소재의 셔츠는 벌써부터 뒷덜미로 흘러내린 땀을 흡수하지 못해 등에 착 달라붙고 있다. 내가 맡은 아파트구역까지 가려면 이십 여분은 더 걸어야 한다.
유료주차장 부근, 자투리땅에 울타리를 이루고 심어져 있는 옥수숫대가 보인다. 울타리 앞에 가방을 내려놓고 목덜미의 땀을 훔쳐내고 바지춤을 살피는데 눈에 옥수수 뿌리가 들어온다. 땅 위에 드러난 뿌리. 대여섯 가닥으로 나뉘어 기중기에 달린 집게 모양을 한 채 흙을 가득 움켜쥐고 있다. 고작해야 대바늘 굵기인 그 빈약한 뿌리가 어떻게 줄기를 올리고 잎을 키우며 열매를 달고 있을까. 뒤편으로 철로가 뻗어 있는 터에서 말이다.
불쑥 머리 하나가 옥수숫대 사이로 솟아오른 건 그 때다. 나는 놀라 입을 벌리며 뒷걸음질친다. 누군가 옥수숫대 사이에서 빠져나온다. 미끄러지듯. 그 유연한 몸놀림이 겹쳐있는 옥수수 잎사귀만을 가볍게 흔들어 놓는다. 키가 큰 여자다. 밭주인 같지는 않다. 민소매 티셔츠와 무릎아래까지 내려오는 플레어 치마를 입고 농작물을 가꿀 사람은 없으니까.
몸을 돌려 횡단보도 쪽으로 걸어가며 뒤돌아보니 여자는 아직도 옥수숫대 앞에서 옷을 추스르고 있다. 드러난 한쪽 허벅지가 보인다. 치마 밑단이 속옷에 끼여 말려든 걸 여자는 모르는 모양이다. 지나치는 사람들 몇몇이 힐끔힐끔 그녀를 쳐다보고 웃는다. 어깨가 저려온다. 여자는 잠방잠방 철로 쪽으로 향한다.
철로를 따라 열차를 타고 삼십분쯤 가면 섬이 있다고 한다. 그 섬에는 아직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다만 섬을 지나 너른 바다를 가다보면 태평양 어디쯤에서 고기잡이배를 타고 있을 남편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떠나기 전에 이혼서류를 내밀었다.
"찍어."
"뭘?"
"도장 말야."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휘갈겨 쓴 듯한 서류에서도 술냄새가 진하게 풍겨났다.
"빚쟁이들한테 시달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러구 살순 없잖아."
물기가 스며 있는 그의 목소리는 술기운과 함께 비틀거리고 있었지만 어딘지 단호했다. 그 즈음 나는 문밖에서 발자국 소리라도 들리면 아이를 끌어당겨 방문 뒤로 숨어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이 집안을 가득 채웠다. 온종일 밖에서 헤매고 있을 남편의 귀가가 늦어지면 불안은 공포로 바뀌어 안절부절못했다. 오늘 동창을 만났는데 일이 잘 될 것 같아. 선배 말이 조금만 기다려 보래, 자리가 날 것 같대. 트럭을 한 대 사서 장사를 해보면 어떨까. 한밤중에 들어온 남편이 하는 말은 횡설수설이었다. 입에서 단내가 맡아졌다. 그래도 그는 끊임없이 할 일을 찾고 있었다. 그런 그가 난데없이 이혼서류를 내미는 심사는 뭔지 나는 서류를 집어들고 찢어버렸다.
초록신호등이 깜박이다 붉은색으로 바뀐다. 자꾸 약해지려는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앙 다물어본다. 이제 일을 시작했으니 서너 달 돈을 모으면 시골 친정에 맡겨 놓은 아이도 데려올 수 있으리라. 신호등 너머로 상가건물이 낮게 펼쳐져 있다. 그 뒤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저층의 아파트 숲이 보인다. 한편에 20층 높이의 고층아파트가 이편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동네가 본래 뻘이었어."
선배의 사무실을 처음 방문하던 날, 선배는 오층의 사무실 통유리 앞에서 고층 아파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뻘을 개간해서 땅을 만든 탓에 고층 아파트는 세울 수가 없는데도 저처럼 높은 아파트가 들어선 걸 보면 업자들이 농간을 부린 모양이야. 말하자면 이 세상에는 돈만 내밀면 안 되는 일이 없는 거야."
선배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매서운 데가 있었다. 회사에 입사해 이년만에 지부 하나를 따낸 실력에 어울리는 말투라고도 생각했다. 그 회사에서 선배는 조기교육이론을 바탕으로 한 교육용 제품을 판매했으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고층 아파트와 반대편인 저층의 주공 단지로 발길을 옮긴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아이들을 태운 노란색 승합차 한 대가 막 돌아 나오고 그 뒤에 젊은 여자가 서서 손을 흔들고 있다. 승합차 안에 탄 아이 중 한 명이 뒤 유리창에 붙어 손인사를 한다. 꿈에서 들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쟁쟁거리며 되살아난다. 나는 멀어져 가는 승합차 안의 아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아이 엄마인 듯한 젊은 여자를 좇아간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지역 담당 교사인데 유아용 한글 교재와 영어 교재를 갖고 나왔습니다. 아이가 참 똘똘하게 생겼던데 어머니도 외모가 아주 세련되...... 동행 교사가 했던 말을 기억하며 낮게 중얼거린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젊은 여자가 대꾸도 없이 쳐다보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린다. 여자는 총총히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땀으로 흥건한 손을 꼭 쥐어 본다. 가방에서 전단지 하나를 꺼내들고 현관의 초인종에 손을 갖다댄다. 누를까 말까 내 손은 몇 번을 주저하고 있다. 문 저편에서 됐다거나 바쁘다고 잘라버리는 말이 나오면 이편에서 어떤 말로 대응할 것인가 하는 멘트를 머릿속에서 열심히 뒤적인다. 선배는 매끄럽게 말이 이어져 일단은 고객과 상담을 성사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누누이 당부했고, 나는 그 멘트를 열심히 외워뒀다. 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거미줄로 엉켜있다. 어떻게 해서라도 문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전단지를 꼭 쥐고, 내렸던 손을 다시 올리게 한다.
"거, 누구요?"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늙수그레한 경비가 뒷짐을 지고 다가온다.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는 다짜고짜 언성을 높인다.
"잡상인 출입금진 거 몰라요? 빨리 나가요!"
"전단지만 꽂으려고."
"그러니까 그놈의 전단지며 스티커며 그 때문에 우리 할 일이 엄청 늘었단 말이요. 아니 그렇게 지키고 있는데도 어느 틈에들 파고드는지, 내 참."
그는 혀를 끌끌 차며 다가든다. 나는 가방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무의식중에 몸을 튼다. 그 바람에 가방이 휘둘리며 열려있던 주둥이로 내용물이 쏟아져 내린다. 두껍게 양장된 견본 교재 모서리가 발등을 툭 치고 나동그라진다. 통증이 눈으로 비어져 나온다. 눈이 아리다. 경비는 헛기침을 두어 번하더니 떨어져 있는 내용물 하나를 주워 주섬거리는 내 앞에 내민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겠지만 나도 내 할 일이 있는 거요. 어쩔 수 없소."
자못 엄숙한 어조로 그는 내 등을 떠민다.
어디로 갈까. 밖으로 나온 나는 가방에 채 넣지 않은 전단지와 교구를 끌어안고 두리번거린다. 젊은 여자가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고 있다. 여자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다. 앙상한 장미가 서너 그루 심어진 잔디밭이 젖어있다. 잔디밭에서 흘러내린 물이 길바닥을 적신다. 물방울이 바닥 한편에 놓인 호스 주둥이에서도 떨어지고 있다. 중간쯤에서 둥글게 말아놓은 호스는 어디서 뻗어 온 것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지나쳐 텅 빈 놀이터 쪽으로 걸어간다. 발바닥이 끈적거린다. 멀리 하늘에 낮달이 떠 있다. 오른쪽이 깊이 패여 있는 낮달 아래 아파트 꼭대기가 불쑥 솟아 있다.
그날, 사무실에서 선배는 내게 결혼 전에 유치원에서 보조교사로 일한 적이 있어서 일하기가 수월할 것이라고 운을 떼었다. 먼저 열흘 간 있을 교육을 받아보라며 일정표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교육을 받겠다는 말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 일은 상담교사라 불리지만 유아용 교재를 파는 영업직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할 수는 없었다. 당장은 기십만원씩 하는 시설에 아이를 맡길만한 형편도 안 되었고 그렇다고 이웃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선배가 속삭이듯 말했다.
"작년에 저 아파트 16층에서 한 여자가 뛰어내렸어.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말이 있는데, 혹시 모르지 너무 높이 올라갔던 게 화근이었는지. 내려갈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잖아. 안 그래?"
나는 대답대신 창 밖으로 눈을 돌려 여자가 뛰어내렸다는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누구 손에 들어갔을까. 은행에서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 받아 마련했던 것인데 대출금을 갚지 못해 경매에 부쳐진 아파트였다. 낙찰이 이루어진다 해도 돈은 고스란히 남의 몫이 될 게 뻔했다. 그동안 남편이 하던 출판사는 부도가 났다. 몸도 마음도 지친 남편은 횅한 눈 속에 어둠 한 자락을 담고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는 아이를 보자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
그리고 말이 없었다.
내려갈 곳이 없어도 길을 잃을 것 같던 남편이 떠올랐다. 하지만 난 아니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를 돌아보던 선배의 입가에는 착잡한 미소가 머뭇거리다 이내 사라졌다.
다음날 마른침을 삼키고 아이를 데리고 나가 선배의 사무실에서 교육을 받았다. 삼, 사십대의 여자들로 자리가 꽉 찬 교육장 안은 열기로 후터분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대부분이 제품에 관한 설명이었으며 구매 욕구를 일으키는 화법과 영업자세에 대한 내용이 이어졌다. 제 어미 심정을 아는 것인지, 막대사탕을 입에 물린 탓인지, 아이는 힐끔힐끔 내 눈치만 살필 뿐 시종일관 얌전했다.
아이 얼굴이 스친다. 나는 굳어지는 얼굴을 펴려고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다가 이내 입술 꼬리를 양끝으로 편다. 얼굴 전체가 당겨지는 느낌이다. 종아리도 위아래서 사뭇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어 놀이터 한쪽에 있는 의자에 가 앉는다. 눈에 들어온 놀이터 놀이기구는 모래사장 속에 박아 놓은 듯하다. 움푹한 바닥이 모래로 가득 채워져 있다. 햇빛이 모래알갱이를 낱낱이 헤쳐놓고 있다. 가방을 내리자 긴장이 풀리며 혈관 속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 같다. 아득한 현기증이 몰려온다. 뿌연 눈앞에 옥수수 밭에서 본 여자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통 넓은 치마가 물결처럼 일렁이며 멀어질 때까지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두 다리와 긴 팔은 흐느적거리는 연체 동물을 연상하게 했다. 단단한 뼈가 없어 오히려 유연해 질 수 있는 다리와 피가 없어 또한 투명해질 수 있는 몸을 가진다면, 진흙탕이라도 거침없이 헤쳐나갈 것 같다.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다. 호스가 굵은 물줄기를 내뿜고 있다. 호스를 잡고 있는 사람은 옥수수 밭에서 나온 그 여자다. 줄을 잡아당기듯 호스를 잡아당기며 다가온다. 놀이터 모래사장에도 물이 쏟아진다. 그녀의 몸은 흠뻑 젖어 있다. 끄트머리에서 얼마쯤 내려 잡은 호스를 휘휘 내두르더니 둥글게 돌린다. 물방울이 튀어 나는 의자 끝으로 옮겨 앉는다. 물줄기가 사방으로 흩어져 놀이터 한가운데로 물이 고인다. 여자의 웃음소리가 섞여든다. 저쪽에서 경비원이 뭐라고 소리치며 달려온다.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다. 여자가 그것을 봤는지 호스를 홱 집어던지고 뒤돌아 뛴다. 발이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나뒹군다. 치마가 젖혀져 속옷이 보인다. 경비가 숨을 헐떡이고 호스를 들었다 놨다하더니 정신 없이 뛰어가는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미친년 아녀. 그 소리가 고인 물 속에 떨어진다. 뒷수습을 하고 호스를 들고 가는 경비의 시선이 내게 쏠려 있는 게 느껴진다. 빠른 속도로 물을 흡수하고 있는 모래. 자잘한 거품까지 모래 틈으로 폭 빠져든다.
아이를 멀리 친정에 데려다 놓고, 일선 교사를 따라 현장 교육까지 마치자 선배가 음식점으로 나를 앞세웠다.
"일단은 돈을 만들어야지. 이 바닥에 발 들여놓는 사람들 다 거기서 거기야. 밑천도 별난 재주도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영업이니 기죽지 말란 말이다. 그건 그렇고 정말 이혼을 한 거니?"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선배가 물었다.
"응."
"난 도대체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다. 서류상의 이혼이라니."
선배의 말에 나는 내가 찢어버렸던 서류가 새로 만들어져 며칠 후 방바닥에 펼쳐져 있던 것이 떠올랐다. 예금통장, 가재도구까지 압류된 뒤였다. 남편의 어깨는 시소처럼 한쪽으로 기울어 갔다. 그는 가족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들쳐업고 일가친척을 찾아다니고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훑으며 그래도 믿거니 했던 친구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되돌아온 건 그들이 던진 차돌멩이 같은 말에 찍힌 가슴의 푸른 멍이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말의 배반을 뼛속 깊이 묻었다. 아이는 밤마다 열에 시달렸다.
"배를 타기로 했어, 내일 모레 출항이야."
"......."
"이혼하면 내가 진 빚이 당신과는 아무 상관없게 돼.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은 없지만 당분간 애는 당신이 좀 맡아 줬음 해."
한쪽으로 기울었던 남편의 양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순간 크레인 꼭대기에서 시위를 했다는 남자가 생각났다. 뉴스에서도 신문에서도 다루지 않은 시위를 남자는 129일간이나 하다 결국 땅으로 내려와 몸에 불을 붙였다. 그제야 그의 죽음을 알리는 뉴스가 방송되었다. 나는 남자가 딛고 섰을, 허공에 솟은 크레인 탑을 그려보았다. 그 자리에 남편이 서 있는 듯했다. 굵은 빗줄기라도 들이치면 추락할 것 같은 위태로움이 축축한 눈빛에 배어있었다. 일을 해도 남편이 진 빚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을 거였다. 남편이 바라는 것은 가족이란 울타리 밖으로 튀어 나가고 싶은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면 남편의 어깨는 가벼워질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때 잠들어 있던 아이가 보채기 시작했다. 약을 먹여 재웠으나 몸에 미열이 있었다. 아이를 들어올려 가슴에 꼭 껴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남편은 화장대 서랍에서 도장 두 개를 꺼낸 뒤 서류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채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한낮의 짱짱한 햇빛이 새어 들어와 방안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선배는 서류상의 이혼이란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남편이 내 곁에서 떠난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해도 한갓 종이 쪽지 하나로 우리가 영원히 헤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위장 결혼이란 말이 있다면 위장 이혼도 있는 법이니까.
"아무튼 내가 간섭할 일은 아니지만 여기에서 네가 성공을 하고 봐야 돼. 성공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 이번 교육생 중에서 거의 80프로만 입사할 것이고 그 중 절반은 한 달만에 떨어져나가게 돼 있어. 사람을, 것도 생판 모르는 남을 내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일이니 쉽지는 않을 거야. 내가 도와줄 테니까 나만 믿고 따라와."
선배는 도와 준다고 했다. 매출액뿐만 아니라 실적이 있는 증원자를 길러내면 앞으로 몇 몇의 지부를 관리하는 사업단장이란 자리까지 오를 수 있다고 얼굴 가까이 대고 말했다. 나는 선배의 입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 말대로 나는 밑천도 별 재주도 없이 서른 세 해를 살아온 게 사실이었다. 그렇게 살던 여자들은 집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남은 삶을 이어갈까. 선배의 입술은 립글로스를 발라 반짝인다. 둥글게 모아져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는 입. 한번 물면 여간해서 떨어지지 않는 거머리가 생각났다.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피까지 빨아먹으려고 주둥이를 떼지 않는 그 질긴 거머리의 입이 부러웠다.
그때 종업원이 주문한 음식을 가져와 식탁에 내려놓았다. 선배는 구겨진 얼굴을 펴며 음식 그릇을 앞으로 잡아당겼다. 왼손에 낀 반지가 음식점 천장의 형광등불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반지와 한 세트를 이루는 보석이 박힌 목걸이도 그녀의 겹을 이룬 턱밑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고교 오년 선배인 그녀가 삼십대 후반의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이유는 몸에 달고 있는 보석보다도 탱탱하고 윤기 있는 피부 때문인 듯했다. 매달 두 차례씩 유명 피부관리실에서 마사지를 받고 일년간 다닌 수영장 출입을 뒤로하고 근래 들어 실내 골프장을 드나든단다.
가방을 메고 의자에서 일어서는데 오토바이 소리가 들린다. 아파트 입구를 들어서서 놀이터를 비껴가 멈춘다. 우편배달용 오토바이다. 집배원이 한 뭉치의 우편물을 들고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간다. 문득 우체국에 다니는 고교 친구의 얼굴을 떠올린다. 언젠가 돈을 빌리러 갔을 때 친한 사이일수록 돈 거래하는 거 아니라며 잘라 말하던 친구다. 하지만 당시의 서운했던 마음을 도려낸다. 이번에는 다르다. 돈을 빌리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정당하게 교환할 수 있는 물품이 있다. 더구나 애를 위한 교육용 책이다. 나는 수첩을 뒤적거려 낡은 전화번호를 찾는다. 번호를 누르자 상냥한 직원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려온다. 친구는 다행이 자리에 있었는지 기다리라고 한다. 그 사이 내 머릿속은 소란스럽다. 우리 아이보다 일년 먼저니까 올해 여섯 살, 그 나이에 맞는 교재가 그림 동화책 전집이 있고 캐릭터로 배우는 교육용 잡지, 사고발달 워크북...... 상담에 필요한 내용을 헤집고 있는 사이 밝은 친구의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안부를 묻자 더 없이 반가워한다.
"어머, 잘 했다. 일을 하고 있다니. 요즘은 안팎으로 벌어야 사는 세상이잖아."
"그래."
"부모의 경제력이 아이의 경쟁력이라는 말도 있잖니. 우체국 다니기 지겹지만 애가 커 가니까 함부로 그만둘 수도 없다 얘."
나는 말을 꺼내기가 훨씬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목을 가다듬는다.
"그래. 그래서 말인데 우리 회사가 교육......"
잠깐만, 하는 친구의 목소리. 어수선한 사람들의 잡음이 들리는 걸로 봐서 손님이 온 모양이다. 기다릴 수 있다.
"우체국 보험이라고 들어봤니?"
"뭐라고?"
나는 목소리를 높여 다시 묻는다. 우체국 보험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친구는 실적을 내지 못해 큰일이라는 하소연까지 말을 잇는다. 나는 시종일관 응, 그래, 라는 짤막한 대답만 한다.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한 건 내쪽이다. 그리고 전화를 끊는다. 가방을 메고 일어서는 내내 헛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바람 새는 웃음은 비어 있는 배에서도 들린다.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아파트 단지를 빠져 나와 상가 건물이 밀집된 지역에 들어선다. 삼사 층 짜리 건물에는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광고간판으로 눈이 시끄럽다. 아침부터 거른 빈속의 위장이 미식거리고 어질어질해 몸을 가누기가 어렵다. 뜨거운 국물이라도 훌훌 마시고 싶지만 분식집은 좀체 보이지 않는다. 장난감 가게가 눈에 띈다.
벽유리 넘어 인형과 자동차, 모형 비행기, 조립한 대형 잠수함이 알록달록 진열되어 있다. 그 옆에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관도 겸한 모양인지 갖가지 포즈를 취한 전시용 사진 가운데 눈웃음을 한 어린애의 사진. 나는 가까이 다가서서 사진 속 아이와 눈을 맞춘다. 아이가 씨익 웃는다. 무스를 발라 뒤로 넘긴 머리 밑으로 이마가 둥글게 드러나 있다. 이마에서 두둑한 코로 손이 옮겨가고 젖살이 붙어 통통한 볼을 어루만지다 뽀얀 목덜미를 감싼다. 팔로 끌어당긴 아이를 품에 안는다. 살냄새가 맡아지며 푸근한 기운이 가슴에 번진다.
아이를 친청에 맡겨 놓고 돌아설 때 발걸음은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렸다. 다리에 힘을 주고 돌부리만 골라 밟았다. 뾰족한 돌부리가 발바닥에 느껴지며 혈관을 타고 올라와 가슴에 박혔다. 엄마, 꼭 올꺼지? 맨날 맨날 기다릴 께. 휴대폰을 꺼내들고 친정집 번호를 누르다가 그만둔다. 못다 누른 번호는 주머니 속에 집어넣는다. 흐릿한 시야로 휴대폰의 액정 화면이 어둡게 가라앉는다.
순간 역한 비린내를 맡는다. 헛구역질이 올라온다. 벽유리에 높이 올린 팔이 비친다. 뒤돌아보니 건너편 횟집 앞에 옥수수 밭에서 나온 여자가 쭈그리고 앉아 있다. 비린내는 횟집 앞에 설치한 대형 수족관에서 풍겨오는 듯하다. 높이가 가장 큰 수족관에서 크기가 점차 작아지는 수족관 세 개가 연결되어 있다.
여자의 옷은 흙이 묻어 무늬를 이루고 있다. 뒤통수를 보이고 있는 그녀의 짧은 커트머리는 삐죽하게 뻗쳐 있다. 통이 넓은 치마가 그대로 땅에 펼쳐져 횟집에서 흘러나온 물이 치마 끝을 적시고 있는 데도 그녀는 한쪽 팔만 들어 올린 채다. 무언가를 확 잡아 올릴 것 같다. 대형 수족관의 한 귀퉁이를 두들겨보기도 하고 고개를 거꾸로 박을 듯 기울이기도 한다. 수족관 속에는 수포가 뿌글뿌글 솟아오르고 밑에는 갯바위 닮은 광어가 겹을 이루며 엎드려 있을 뿐이다.
잠시 후 여자는 자리를 뜬다. 그녀가 입은 치마 끝에서 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길게 자국을 남긴다. 그녀는 예의 팔랑거리는 걸음걸이로 상가 깊숙한 골목을 향해 멀어진다.
나는 가방을 앞자락에 껴안고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에 웅크린다. 물소리가 세차게 들리더니 물방울 하나가 튀어 손등으로 내려앉는다. 움직일 줄 모르는 광어는 움직여지지 않는 내 입속의 혀 같다. 뻐끔거리는 입이 힘겹게 숨을 내쉬는 듯하다.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 두 개가 몸 색깔처럼 짙은 갈색 대가리 위쪽으로 쏠려 있다. 둥글 넙죽한 몸 한편을 바닥에 착 붙이고 있는 광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투명하면서도 단단한 가시. 수족관 유리 바닥에 미세한 균열을 낼 수 있는 가시가 몸 둘레에 촘촘히 돋아나길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얼굴 근육과 움츠러드는 혀를 펴려고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막걸리, 막걸리, 막걸리라고 중얼거린다. 현장을 동행한 교사가 알려준 방법이다. 그들은 낯선 사람의 앞을 막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기름칠한 듯 술술 말을 꺼냈다. 입가에 미소를 지니기 위해서는 얼굴의 근육을 풀어야하며 위스키란 말 대신 막걸리가 최고라고 했다.
아파트가 경매 처분되자 필요한 살림만 챙겨 이사를 한 곳은 보증금 없는 월셋방이었다. 낡은 연립주택 지하를 개조해 만든 방은 컴컴한 계단을 내려가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낮에도 어두운 긴 계단은 미끄러져 내릴 것처럼 경사도 심했다. 통풍 역시 바랄 수 없는 곳이었다. 어둠 속에 고여 있는 습기는 쾨쾨한 냄새를 풍겼다. 새시 유리에 판자를 덧댄 미닫이문을 열면 부엌이었다. 방 길이 만한 길이로 폭 좁은 부엌에는 왼쪽 끝에서부터 보일러, 한 자 짜리 씽크대. 그 위에 널빤지가 대어져 있었다. 전에 이 방을 썼다던 고시생의 솜씨 같았다. 이사하면서 사들고 온 휴대용 가스렌지를 널빤지 위에 올려놓으니 딱 맞았다. 씽크대의 절반 높이 만한 수도가 갈고리 모양으로 바닥 한편에 꽂혀 있었다. 군데군데 시멘트가 떨어져 내린 벽에는 그을음이 묻어 얼룩덜룩 했다.
나는 남편이 등에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내려오는 것도 모르고 멍하니 서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몰라 손에 든 걸레만 이리 접고 저리 접고 했다. 그는 끙 소리를 내며 방문을 열고 허리를 잔뜩 굽힌 채 방안에 짐을 부렸다. 이불은 책상 위에 올려놓았고 책상 옆으로 옷가지를 담은 상자를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하지만 남편이 떠나고,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옷상자는 하나하나 버려져 그 자리는 회사에서 나온 열 두가지 종류의 교육용 책자 견본이 자리잡았다. 그 틈에 끼여 있는 탁상용 달력. 고시생이 쓰던 책상 서랍에서 나온 작년도 달력이었다. 날짜마다 붉은 싸인펜으로 가위표가 그어져 있는 그것을 버리려다 도로 서랍 속에 넣었다.
이사를 하고 일주일 남짓 될 무렵, 남편이 떠나기 하루 전날이었다.
"우리 맛있는 거 먹자."
법원에서 나온 남편은 마지막 만찬처럼 음식점을 찾았다. 나는 음식점 대신 남편을 끌고 재래 시장에 들러 장을 봐왔다. 평소에 외식보다는 집에서 만드는 음식을 즐겼던 그였다. 그는 집 가까이 슈퍼에서 막걸리를 샀다. 맥주는 밍밍해서 싫고 소주는 그 쓴맛이 싫었으나 막걸리는 달짝지근하면서도 구수하다는 내 말을 듣고 나서였다. 어쩌면 나는 그가 따라준 막걸리 맛에서 그에 대한 사랑의 농도를 확인했는지도 모른다. 걸쭉하면서도 변하지 않을 그 농도.
나는 부리나케 끓인 동태찌개를 상 한가운데 내려놓았다. 냄비에서는 국물이 보글보글거렸다. 그 소리 속에 피어오른 김이 마주 앉은 남편과 내 얼굴로 눅눅한 습기를 남기고 흩어졌다. 남편이 가득 채운 막걸리잔을 내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꼭 배를 타야 되겠어, 당신."
당신이라는 말이,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불렀을 당신이라는 말이 어색해 나는 재빨리 다음 말을 토해 냈다.
"여기서도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는 거잖아. 아무리 고향 사람이 탄 고깃배라지만 생전 해보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왜 배를 탄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그래, 나 먹여 살리라는 말은 안 할게. 같이 벌어서 보탤 테니 가지 마."
"이미 끝난 일이야. 더 이상 땅에 발붙이고 서 있을 데는 없어."
그는 젓가락을 들어 동태토막을 뒤적거렸다. 동태살을 뒤덮은 거뭇한 껍질에 고춧가루가 점점이 묻어 있었다. 그가 젓가락으로 껍질을 거둬냈다. 고추장을 많이 풀었던지 살이 붉게 물들었다. 그 붉은 살이 힘없이 떼어졌다. 속까지 붉었다. 쉴 틈 없이 살점을 떼어내는 남편은 맛을 보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국물을 두어 숟가락 뜨다가 내려놓았다. 맵고 짰다. 막걸리잔을 들어올리고 한모금 마셨다. 시큼했다. 떼어먹은 통태 토막은 뼈가 드러났다. 붉은 국물에 잠겨든 하얀 뼈. 순간 참을 수 없는 비린내를 맡았다. 속이 울렁거려 화장실로 달려갔다. 일층으로 오르는 계단 밑, 우겨 넣은 종이상자 같이 생긴 화장실에서 몸을 웅크려 고개를 숙였다. 먹은 것도 없이 속에서 무언가 울컥울컥 튀어 올랐다.
가방 속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 폴더를 열고 귀에 가까이 대자 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달라붙는다. 조용히 해. 엄마가 통화중이잖아. 저편의 아이 목소리를 더듬고 있는 사이 말소리가 이어진다. 광고지보고 전화했어요. 며칠 전에 선배가 앞장서고 내가 뒤따라가며 광고지를 꽂았던 일이 떠오른다. 우선 부지런히 돌아다니라며 선배는 재빠르고 정확한 솜씨로 문틈에 광고지를 꽂아 넣고 우물쭈물하는 나를 잡아끌었다. 우리 아이가 세 살인데 알맞은 교재가...... 저편의 목소리가 길어지는 사이 나는 대답할 말을 찾아 줄을 세운다. 교재를 소개하는 동안 휴대폰은 오른쪽 귀에 바짝 밀착된다. 입을 다물면 안 된다. 아이의 발달 정도를 알아보는 테스트가 있어요. 첫아이라면 성장에 궁금한 점이 더 많으실 테고, 훨씬 효과적인 교육이...... 스무 고개를 넘듯 목을 타넘은 말이 방문 일정을 얻어낸다. 내일 오전 11시. 푸르지오 3차 305동 303호. 수첩에 적어 넣은 문구를 확인하고 전화를 끊는다. 광어 한 마리가 뜰채에 건져진다. 횟집 주인이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회 쳐드릴까요?"
나는 힘주어 대답한다.
"드디어 하나 건졌어요!"
횟집 주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먹고 사무실로 들어가 전단지를 공책 크기로 접는다. 아파트 경비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나 또한 그들이 지키는 아파트를 찾아갈 수밖에 없다. 남편이 하던 사업이 부도나자 한밤중에 서울서 울산까지 도망을 간 적도 있었다는 선배도 지금은 잘 나가는 지부장 아닌가. 그 붉은 입에 숨겨진 주머니가 있을 것이다.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찰진 말이 담긴 주머니 말이다.
경비의 눈을 피해 아파트 자동유리문 비밀번호를 누른다. 저층의 아파트 단지에는 없는 유리문이 이 20층 아파트에는 달려 있다. 뭐든 높을수록 지킬 게 많은 법이라며 선배가 알려준 비밀번호를 누른다. 초조하게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번호는 정확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층에 내린다. 계단을 밟고 내려오면서 차례차례 현관문 틈으로 전단지를 밀어 넣는다. 우울증에 걸린 여자가 떨어져 내렸다는 층에서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지나쳐 계단으로 향한다. 계단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들이마신다. 멀리 보이는 철로 위로 옥수숫대 같은 게 움직이고 있다. 그 여자, 옥수수 울타리에서 본 그녀의 팔이 머리 위로 솟아있다. 갑자기 그것이 가방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보이지 않는 가방. 가방이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치켜든 팔. 여자의 팔이 흔들린다. 여자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광고지를 든 채 손을 올려 마주 흔든다.
발이 따끔거려 밑으로 눈을 내린다. 책 모서리에 맞았던 부위가 발갛게 부풀어올라 있다. 순간 옥수숫대의 뿌리가 스친다. 땅속에서 양분을 빨아올리고 있을 그 빈약한 뿌리 하나를 뚝 떼어 나는 한쪽 어깨에 짊어진 여백의 가방 속에 슬며시 넣는다. 나를 향해 보이던 무수한 사람들의 등. 그들의 어깨에도 자신만이 간직한 가방이 걸쳐 있을까. 때로는 질퍽거리고, 가끔은 따끔거리고, 혹은 단단해 무게를 알 수 없는 삶. 그러나 꽉 물고 놓아주지 않는 찰거머리의 입 같은 가방을.
밑에 층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때를 놓칠 수 없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꼬리를 살짝 올린 후 전단지를 펴들고 뛰어 내려간다. 발바닥이 뜨거워진다.
[심사평]
구성.소재에 대한 치열함이 생명력
예심을 걸쳐 올라온 작품들은 비교적 고른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 이럴 경우가 심사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한다. 그래서비교적 흠이 없는 작품, 안정된 작품으로 결정된다. 일단 국현의 <누드 크로키>,기혜경의 <흡반>, 최은선의 <고속도로 횡단하는 법>,안정빈의 <무지개 위에 앉아서>, 김종일의 <다리>를 결심에 올렸다.
<다리>는 힘이 있는 소설이고, 다리로 연상되는 이중 상징도 좋았지만 일상사로 떨어진 것이 흠이었다. <누드 크로키>는 습작이 잘 되어 있는 작품이었지만, 화자의 눈이 폭넓지 못하며 진행이 좀 단순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무지개 위에 앉아서>와 <고속도로를 횡단하는 방법>은 비슷한 종류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문장도 세련되고 의식의 깊이도 충분히 보여주고 있으나, 소설이 갖는 이야기성과 진술의 방법에 있어서 가감법에서 실수한 것으로 보인다. 주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무엇을 살려야하고 무엇을 소거해야 하는 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요구된다. <흡반>은 매우 안정적인 점에서 당선작이 되었다. 물론 처음 부분의 옥수수밭의 여자와 인물과의 관계가 모호하게 그려졌고, 군데군데 자의식의 노출이 보이기는 하지만 구성과 소재에 대한 작가의 치열한 접근이 이 소설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로 하여금 당선작으로 무난하다는 결정을 내리게 했다.
신춘은 좀더 새롭고, 힘있는 작가를 발굴하기 위한 제도라는 점을 응모자들은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임철우.채희윤>
[당선소감]
나는 초등학교 6년 동안 일년에 한 번 꼴로 전학을 다녔다. 집안 사정상 이사를 자주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새로운 환경에 마냥 신나했지만, 새로움이 잦아질수록 더럭 겁이 났다.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골목, 그 골목길을 기억하기 위해 외워야 할 가게 이름, 몇 번째 가로등, 무슨 색 대문......
외우지 않아도 이사한 집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자랐을 때 나는 말수가 줄어들어 있었다. 상대가 먼저 말을 걸기 전에는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설사 입을 열더라도 한 두 마디가 고작이었다. 도대체 네 속에는 뭐가 들어있니? 누군가는 나무랐다.
나는 타인과 소통을 한다는 게 다만 겁이 났을 뿐이었다. 그들 속에 섞일 것 같지 않아 뒤로 물러서고 주변에서 서성거리다 결국 돌아서곤 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했다. 두려움이 커지면 도망칠 궁리부터 했다.
그 길에 만난 것이 소설이다.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무작정 썼다. 꽤 오래 전에.
미련스럽게, 둔하게. 그러나 놓지 않고 소설이란 길을 닦아 나갈 것이다.
오롯이 한 길만을 걸을 수 있도록 채찍과 격려를 주셨던 김양호 교수님, 김인자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늘 손잡아 준 의영, 함께 공부했던 소설 세미나 회원들께도 고맙습니다. 내게는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고 처음으로 말합니다, 진숙언니.
더불어 영글지 않은 소설을 당선작으로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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