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아랫목 외 1편 / 장재원
천지에 미만한 봄기운은 얼음나라에도 찾아와
지하철 찬 콘크리트 바닥에 잔뜩 웅크려
시들새들 죽은 싹을 다시
지상으로 밀어 올렸네
겨우내 세한도 풍경처럼 서 있어야 했던 소나무가
어느 날 씻긴 난촉들같이 푸른 기운을 새로 띠고
멀리 언 땅 속 깊이 뿌리를 뻗어
함께 그림 속 풍경으로 웅크려 있어야만 했던 사내를
연초록 색기色氣 오르는 자신의 가지 아래로 초청한 것이네
빙하의 바람길 뚫린 지하 동굴에서 올라와
따뜻한 봄의 아랫목 온기로 되살아난 사내는
나무에 몸을 기대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화사한 빛의 세례에
행복하네
오래간만에 신용불량자 훈장도 내동댕이치고,
돈 번다고 떠난 아내,
복지원에 맡겨진 아이들도 모두 불러 모은
따스한 안방에
휘파람새, 산비둘기는
연둣빛 봄 잎사귀 펼치는 희망 노래 들려주네
저만치 목련나무도
겨울 딛고 올라온 노숙자 아저씨
잘 버티었다고, 새 봄 와 일거리 많아질 거라고
눈부시게 맛깔스러운 찐 달걀 무더기로 매달아
속껍질 벗기고 있네
어머니. 3 / 장재원
곡식 자루와 팔다 남은 포목 보따리 머리에 이고 양재기 장사 친구와 함께 고개를 넘을 때 한 고개, 두 고개, 세 고개, 늦가을 깊은 산골짜기엔 해 떨어지자 어둠 깔렸다네. 마중 나오는 사람들은 아직 기척도 안 보이고 희미한 산길을 더듬거리며 돌아오는 걱정스런 눈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쿨럭거리는 병든 남편, 허기진 어린 사남매도 눈에 아른아른.
두 번째 고개를 넘자 옆에서 누가 뺨을 갈겨도 모를 어둠 속에는 큰 산짐승의 파랗게 빛나는 두 개 호동그런 눈빛이 자로 잰 듯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네. ‘돌아보면 안 돼’ ‘그냥 걷기만 해’ 서로서로 다짐하며 온몸에 왕소름 돋고 머리털은 고슴도치 가시 될 때 금방이라도 사나운 산짐승이 뒷덜미를 덮칠 것 같은 무서움에 온몸이 얼어붙는 어머니들.
그 한백년 같기만한 시간 가까스로 다잡은 정신이 수호신 되어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고 서로 부축하여 다시 일어나 오금저린 걸음 떼놓길 수차례 드디어 저만치 앞에 마중 나오는 사람들의 호야불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긴 안도의 한숨과 함께 무너진 몸뚱이는 마치 물 속에서 막 건진 듯 흠뻑 젖어 있었다고. 아직도 무서운 큰 산짐승이 따라오는 양 돌아보시며 진저리치시는 어머니, 애오라지 기다리는 피붙이 살붙이의 사랑이 힘이었다고, 그것이 죽음도 이기는 독이 될 수 있었다고 어머니, 이 밤 조용히 들려주신다네.
시집「왕버들나무, 그 여자」2008 리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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