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와 후기 / 박제영
함순례, 박후기, 두 시인의 이름만으로도 시가 되겠다, 그런 생각, 했더랬습니다 시를 쓰는 일이 순례라고, 순례의 후기를 적는 일이겠다고, 그런 생각, 했더랬습니다 시인이란 버려진 어린 짐승들을 등에 지고 뻘밭 진창을 맨발로 걷다가 걷다가 제 몸의 유전자에 순례의 후기를 비문으로 새기고 마는 참 미련한 족속들이라고, 그런 생각, 했더랬습니다 뜨거운 발과 나무의 유전자를 가진 두 시인의 시집을 읽던, 함박꽃 함박 피었던 어느 해 봄날 늦은 밤의 일입니다
그날 이후 몇 개의 계절이 지났습니다 버려진 것들은 버려진 줄도 모르게 버려졌으나 세상은 여전했으니, 그 사이 몇 몇의 시인들이 어린 짐승들을 업고 뻘밭 진창을 걸으며 후기를 적기도 했으나 어느 누구도 그따위 비문을 읽지는 않았으니, 순례와 후기, 마침내 두 시인의 이름만으로는 시가 되지 않겠다, 요즘은 그런 생각, 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원고청탁을 끝내 거절한 곡절이니, 부디 혜량하여 주시옵기를
『문학마당』 2009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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