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생업 외 1편 / 김희업

시인 최주식 2010. 2. 7. 22:01

생업 외 1편 / 김희업

 

그녀가 생업을 꾸린 신전으로 초대했다

어디만큼 왔나, 문득 눈 떠보니

번지점프 하듯 아찔하다

실족하지 않는 비결을 묻자

마치 기둥을 감았다 풀었다 하며, 쇼걸처럼

매일 밤 온몸으로 실천해 보인

기둥과의 불륜에 있단다

기둥만 있다면

등나무,

그녀의 생업은 까딱없어 보였다

관능적으로 뻗어나갈수록 든든해지는 미학

아, 징그럽게 굽은 저 관능

기둥과 흘레붙는 것도 생업을 위한 거라면

당신은 순순히 받아들이겠는가?

온몸이 손,

저같이 집요한 약력 본적 없다

허공을 훔치는 도벽을 못 버리고

치솟는, 뿌리의 모순을 보거라

어느새 뒷모습 찾아보기 힘들다

꼬리 어디 감춰두고 끝없이 요동쳤나

하마터면 뱀이 될 뻔한 등나무

원죄에서 갓 벗어나

다음은 하늘을 엮을 차례

 

칼 회고전 김희업

 

당장 내게 들이대더라도

두렵지 않을 것 같다

이미 오래전 칼이 내 몸을 두 차례 다녀갔기 때문

처음엔 낯선 방문자로 다가와 불쾌하게 굴던 칼,

모면하려 버둥거리다,

하는 수 없이 내 몸 칼에게 건네주었다

실은 두려웠던 건 칼끝의 감촉

살아야 한다고, 혹은 살려야 한다며

내 몸 수술대에 눕히고

칼은,

몸을 쓰윽 건드려 보았던 것이다

두 번째 칼이 방문했을 때는

서로가 서로의 몸을 탐색하듯

어서 내 몸 더 깊숙이

어딘가 있을 희망의 성감대를 찾아내어, 내심

건드려 주었으면 했다

그날 이후로 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지만

아, 알 수 없는 깊이를 느낀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오르가슴이냐!

깊이가 깊을수록 칼은 본분을 다한 것

칼의 용도란 그런 거구나

꽃 진 자리처럼 몸에 흉터로 남아 두고두고

생의 단맛 느끼게 하던 칼의 향기자국

결국 칼이 나를 살린 셈

그때 죽음을 찌르고 칼을 선택한 것은

너무 잘한 일이라 여겨진다

 

시집<칼 회고전> 2009. 천년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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