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쉬어가는 글

함양과 체찰 / 신창호 엮음

시인 최주식 2010. 2. 9. 21:32

함양과 체찰
신창호 엮음
미다스북스
294쪽, 1만7000원

우리 선조 가운데 후손들이 가장 자주 만나는 분은 누굴까. 아마도 퇴계 이황(1501~1570)일 것이다. 1000원짜리 지폐속에서 퇴계는 매일매일 우리의 손끝을 넘나든다. 복건(幅巾)을 쓰고 조금은 초췌한 표정인데 걱정은 안해도 된다. 1983년에 그려진 영정이니 실물은 달랐을 것이다.

조선 중기, 동양의 지성이었다는 퇴계. 다들 자라면서 그 명성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을 터이다. 하지만 퇴계가 쓴 글 한 편 접하기 쉽지 않았다.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니 일원론(一元論)이니 하면서 율곡과 논쟁이 있었다는건 교과서에서 배웠다. 하지만 그게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가르쳐주는 선생님은 거의 없었다. 퇴계가 제자들과 주고받은 한문 서한을 한글로 쉽게 풀어낸 책이 나온건 그래서 반갑다.

퇴계는 말한다. “아직 공부가 무르익지 않았는데 지나치게 높은 자리에 처했다거나 시대를 헤아리지 못하면서 세상을 다스려보겠다고 나서면 반드시 실패한다.” 이거 어째 내공 형편없는 요즘 정치판을 말씀하는 것 같지 않은가. 퇴계는 또 말한다. “아주 고상하고 심오한 내용이나 원대한 것을 공부하여 이치를 빨리 터득하려고 하는 건 괜한 헛수고다.”

책에는 퇴계의 수수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묘사하는 대목이 많이 나온다. 퇴계의 시(詩)편들도 여기저기 소개돼있다. 그래도 결코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일정 수준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퇴계가 살던 시대로부터 흘러온 500년의 세월이 세상을 많이 바꿔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뿔싸, 성급한 후학(後學)들을 미리 예견하셨음인가. 퇴계가 일갈한다. “공부란 한번 껑충 뛰어서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걸쳐 해야하는 막중한 사업이다.”

김종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