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나무 밑 / 김충규
부음이 왔다 뼈를 무너지게 하는 어떤 부음에 비하면 견딜만하다
모과나무에 모과가 열리지 않는다 백 년 동안이나
앞으로 백 년이 더 오기 전에 모과나무와 나 둘 중 하나는 사라질 것이다
내가 먼저 죽으면 모과나무가 가장 먼저 부음을 전해들을 것이다
고양이가 자주 모과나무 밑에서 밤을 보냈다
아침에 고양이가 머문 자리에 새털이 널려 있곤 했다
그 깃털을 모으며 이것으로 무엇을 만들까
그 무엇을 누구에게 줄까
부음의 주인에게 마지막 선물로 줄까
하룻밤쯤은 고양이를 품에 품고 잠들어보고 싶은 모과나무 밑,
고양이가 피 한방울 안 튀게 어떻게 작은 새를 처리하는지
물어보고 싶은 모과나무 밑,
그런데 고양이는 한 번도 그 광경을 들킨 적이 없다
고양이에게 날개가 달렸다고 믿는 아침이 늘어갔다
내 무릎 속에서 시큰시큰 앓는 새를 고양이에게 들킬까 봐 두려웠다
그 새는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올 때면 더 심하게 앓아
그때마다 진통제를 먹어야 했다 다행히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올 땐 고양이도 모과나무 밑에 와
잠을 청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날은 새도 오지 않았으므로
나도 걸음을 걷는 게 힘들어 문을 꼭꼭 닫아놓고 밖을 잘 나가지 않았다
그런 날 고양이는 어디를 서성거리는 걸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날개를 펴고 어둠 속을 날아다니는 걸까
새로운 부음이 왔다 뼛속에 먼지 한 점 얹히는 듯 했으므로
뼈는 무사했고 내 무릎 속의 새가 앓는 소리 대신 퍼덕퍼덕 날개 펴는 소리를 냈다
모과나무 밑, 새를 품에 품고 고양이가 식어 있었다
시집 <아무 망설임 없이> 2009. 문학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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