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천변 풍경 외 1편 / 염창권

시인 최주식 2010. 2. 12. 22:54

천변 풍경 외 1편 / 염창권

 

물가에 앉아 있다가

자전거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가는 걸 본다

그 뒤에 따라오던 것이 무찔러 간다

길이 낯설다

내 앞으로는 줄곧 무색의 냇물이 흘러가고 있다

내재된 것이 많은 무거운 물이 냇바닥을 짓누르며 흘러간다

턱수염처럼 듬성듬성 돋아난 억새와 갈대군락에서

눈이 침침한 굴뚝새 한 마리 솟구쳤다가 금방 가라앉는다

간판 집에서 얇은 함석이 부딪는 소리가 햇살을 찌르고 간다

물가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은 미친 짓이다

무색의 물 낯바닥에 속아서 발을 담그는 것도 미친 짓이다

이걸 분명히 알고 있는지 흉내 내는 사람은 없다

나는 할 수 없이 그만 두기로 한다

누군가는 다리 밑 안 보이는 곳에 박스 하나쯤은

찔러두었을지도 모른다

안쪽으로 부풀린 주름이 상처 난 것들을 완충할 때마다

빈 박스처럼 뻑뻑하게 접혀지는 나날들-

두엇 달리는 사람이 내 앞을 지나갔으나

근육과 심장 쪽으로 내면의 눈을 박았기에

그들의 눈에는 거울 같은 공허가 담겨져 있다

냇가에서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길이 낯설다

길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지나간다

 

무중력의 시 / 염창권

 

무개념의 사색을 하던

풀잠자리 한 마리

날아가다가 급선회 하는 모니터 안에서

갑자기 빗방울의 세례 퍼붓고

천의 눈망울을 굴려서 일제히 반사시키는

월인천강의 물방울들 혹은 숫자의 반짝임

이처럼 아주 작고 둥근 시야의 세계에서

저 어린것들을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게 하여

낮은 것들이 더욱 낮아져서

겸손히 무릎 꿇게 하는

하오의 시간

그리고 화면 뒤쪽의 수식數式들

 

지상 중력이 미치지 않는 가상공간에서

상처 난 것들이 마구 떨어져 쌓이면서

상처가 상처를 으깨고 짓이기는

낙화만발의 중력장

이윽고 검은 손들이 서서히 들려 올라오면서

검은색 바탕의 화면을 부수어갈 때

문득,

그 검은 손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규약

혹은 그와 같은 수식에 의해

수면유도제를 투약 받는

풀잠자리 떼.

 

 <우리詩> '신작소시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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