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흙을 빚어 만든 무거운 주전자에는 / 온형근

시인 최주식 2010. 2. 22. 23:50

흙을 빚어 만든 무거운 주전자에는 / 온형근

 

흙을 빚어 만든 무거운 주전자에는

한가득 녹차 우린 물이 담겨져 있다

녹차였을 더운 입김이 두꺼운 주전자를 빠져 나와

바깥 칭얼거림을 외벽에서 내벽으로 받아들이고

주둥이에 헛한 바람구멍이 뚫려 있음을 본다

따르는 동안 손잡이는 기운 적 없는 단단한 기립으로

한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 손을 쳐다보게 한다

바닥에 깔린 두툼한 연두색 타올이 고개를 내민다

들어 올려져 다시는 제 자리로 오지 않을 것처럼

조금씩 비껴 나면서 둥근 원이 눌리어 있다

주전자가 차지하고 있던 빈 자리는 어지러워

눌리어진 정교한 원이 강강수월래를 그으며 움직인다

원을 따라 돌다 숲이 되고 숲은 나를 먹는다

숲에서 나는 원이 되어 숲 가장자리를 맴돌며

자꾸 싸잡아 동심원 가운데로 원심력에 이끌린다

흙을 빚어 만든 무거운 주전자가 되돌아

원이 되어 숲에 갇힌 나를 내려 줄 때까지

식어버린 녹찻물을 따르는 소리는 청량하다

 

시집 <슬픔이라는 이름의 성역> 2004년 시와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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