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동구(禪隕붇 洞口) - 서정주 (1915~2000)
선운사(禪隕붇) 고랑으로
선운사(禪隕붇)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동백꽃을 보러 갔다가 제철이 아니어서 주모가 걸쳐주는 목 쉰 육자배기나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을 걸치고 돌아섰다는 이 범상한 행각은 ‘선운사’라는 세파를 떨친 절 이름의 초월성과 동백꽃의 아름다움, 그리고 막걸리 집 여자의 목 쉰 육자배기가락이 갖는 신산한 세속성과 범벅이 되어, 우리의 상상력을 견고한 시간의 벽과 마주 서게 한다. 그리하여 봄의 육화(肉化)는 때 일러 아직 피지 않은 동백꽃의 시간을 작년 봄이나 그 이전에 피었던 꽃들과 겹쳐놓는다. 동백꽃 주막은 ‘막걸릿집 여자’가 깔아놓는 소리의 징검다리 건너편에 있다. <김명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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