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수족관,이끼 / 김성실
'개 불, 원산지:벌교'라고 적힌 팻말 앞에 유경은 섰다. 멍게와 해삼 따위들이 들어있는 투명 플라스틱 통 안에는 개불이 끼어 있었다. 미란이 부탁한 개불을 사기위해 수산물 도매점에 들렀다. 길쭉한 몸통 가운데가 뻥 뚫려있고 붉은 빛이 도는 개불은 보기에 망측스러웠다. 미란은 개불이 개의 성기와 닮았다고 했지만 유경의 눈에는 거머리의 피부를 벗겨놓은 것처럼 보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유경은 개불이 몸을 뒤틀며 헤엄치는 모습을 한참동안 눈으로 쫓았다.
거머리를 닮은 개불을 보면서 강 선배를 떠올렸다. 강 선배는 사고가 나기 며칠 전부터 거머리 죽이는 일에 열중했었다. 가무잡잡한 등에 윤기가 흐르는 그놈들은 독일이나 러시아에서 수입되어 온 양식 거머리라고 했다. 해로운 균을 옮기는 논 거머리와는 쓰임새가 달라 손가락 접합 수술을 받은 환자의 피와 고름을 빨아먹도록 깨끗한 물에서 키운 것이라고 했다. 환자의 피와 고름을 양껏 먹은 양식 거머리는 결국 그 자체로 병원균(病原菌)이 되어 죽을 운명이 되었다.
강 선배는 주둥이가 넓은 플라스틱 통 속에 알코올을 절반 정도 부은 다음, 피를 빨아먹고 개불만큼 커진 거머리를 핀셋으로 들어 올리고 한참동안 노려보기도 했다. 강 선배가 그놈을 70% 농도의 알코올 속에 넣으면 고통스럽게 피를 토하고 죽었다. 피로 불룩해진 둔중한 몸이 서서히 가라앉다가 갑작스럽게 배를 뒤집었다. 그 놈은 알코올의 독성 때문에 몸이 녹고 몸 안의 피까지 다 쏟아 내놓으면서 죽어갔다. 유경의 눈에는 강 선배가 어쩐지 거머리 죽이는 일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어 섬뜩하기 조차 했다.
개불과 거머리와 강 선배가 마구 뒤엉킨 탓에 속이 불편해진 유경은 욕지기가 일어서 장사꾼에게 개불 일 킬로그램을 담은 봉지를 대충 받아들고 급히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삭힌 홍어냄새와 생선의 비린내를 애써 참으며 시장 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진열대에 삶은 돼지머리와 족발을 올려놓은 가게들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시장은 살아있는 생선의 뱃속 같아 유경은 더 속이 울렁거렸다.
떡집은 시장 안쪽 끝의 새로 생긴 마트 근처에 있었다. 미란은 배달이 제 시간에 될지 걱정스럽다며 유경에게 대신 떡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아, 전화만 하먼 갖다 줄것인디 멀라고 복잡한 디를 찾아 왔다요?"
떡집 주인아주머니가 그렇게 말은 했지만 배달을 가지 않게 되었다면서 좋아했다.
"돌이라고 했제? 돌떡은 요것으로들 하제. 액땜하라고 빨간 고물을 쓴 것이여. 배달 비 빼줄 텐께 택시 타고 가시요이?"
아주머니는 붉은 수수경단과 송편, 붉은 팥떡과 무지개떡을 싼 박스를 손수 들고 마트 앞 큰 길까지 데려다 주었다. 택시를 기다리며 유경은 빠진 것이 없는지 생각했다. 방광이 딴딴해졌기 때문에 마트 화장실에 들어가서 참았던 오줌을 눴다. 진이 빠졌던지 가늘고 진한 색깔의 오줌이 끊겼다가 이어졌다. 뭉쳤던 방광이 비워져 따끔거리던 통증은 사라졌지만 열린 땀구멍으로 시장의 온갖 냄새가 고여 온 몸이 마치 상한 채소 줄기처럼 끈적거렸다. 돼지몸통을 잘라 걸어 놓은 정육점을 지나칠 때 마취에 걸려 멍청하게 수술대에 몸을 부리고 있는 환자의 몸이 떠올랐었다. 욕창환자의 살 썩는 냄새가 나는 젓갈 집이 겹쳐 떠오르자 변기에 기어이 토악질을 하고 말았다. 눈에 눈물이 돌고 어지러운 사이로 참았던 분노가 토사물보다 독하게 솟구쳤다.
2층으로 된 미란의 횟집은 돈을 들인 티가 났다. 2층으로 음식을 실어 나르는 엘리베이터도 설치했다. 직원들은 미란이 공을 들여 고른 유니폼을 입고 그 위에 앞치마를 둘렀는데 흡사 항공사 스튜어디스나 은행 직원처럼 보였다. 지나치게 잘 차려입은 직원들과 달리 미란은 옷에 여러 가지 얼룩을 달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미란은 주방과 홀을 쉴 새 없이 넘나들어서 눈에 띄게 살이 빠지고 얼굴에 주름이 늘었다. 새벽 2시까지 영업시간을 연장한 뒤로 어미노릇을 제대로 못한다고 아들에 대한 미안함을 자주 유경에게 말하곤 했다.
유경이 사온 물건을 재빨리 받아든 다음 미란은 조리대에 굴과 새우, 버섯, 당근, 미나리 등을 담은 바구니들을 늘어놓았다. 새로 지은 주방은 널찍했다. 조카 돌잔치여서 일손이라도 돕고 싶지만 유경은 요리에 자신이 없어 미란이 음식재료를 손질하는 것을 지켜봤다. 미란이 왼손으로 칼을 쥔 모습은 특이했다. 손잡이를 세 손가락으로 잡고 검지와 엄지를 칼 옆면에 댔다. 왼손으로 섬세한 일을 하다가도 매운탕을 끓여 낼 때는 오른손으로 힘 있게 칼을 잡고 생선을 가르고 토막을 쳤다. 조리사는 두 손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언젠가 미란이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유경은 두 손을 쓰는 것이야말로 효율성의 극대화를 노리는 병원에서 환영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새우의 등을 약간 자른 다음 검은 실처럼 길게 드러난 내장을 제거하는 미란을 보며 말했다.
"손님들은 많이 오니? 대출금은 제때에 갚고 있고…?"
유경은 물어 놓고도 괜한 질문을 한 것 같아 미란의 눈치를 살폈다. 미란이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뱉었다. 미란은 수돗물에 굴을 담근 다음 굴 씻는 일을 유경에게 맡기고는 냉장고 옆에서 양념이 된 쇠고기를 가져왔다. 미란이 시키는 대로 한손에 울퉁불퉁한 굴을 쥐고 솔로 굴 껍질을 박박 문질렀다. 두툼한 쇠고기를 도마 위에 펼쳐놓고 칼끝으로 잔 칼집을 넣고 있는 미란의 표정은 담담해 보였다.
수건을 깔고 굴을 왼손으로 누른 다음 미란이 건네준 오이스터 나이프라는 끝이 뾰족한 칼로 주둥이를 벌렸다. 유경은 굴의 살 깊숙이 칼을 밀어 넣고 굴의 눈을 떼어냈다. 굴 껍데기를 열고 닫는 근육을 굴의 눈이라고 불렀다. 껍데기에서 요령 있게 굴의 살을 떼어내려면 굴의 눈을 찾아야했다. 유경은 비닐봉지에 굴을 몇 개 넣고 한참동안 흔들었다. 이렇게 하면 스트레스를 받은 굴의 눈이 수축을 해서 쉽게 뗄 수 있다고 했다. 유경의 몸이 점점 뻣뻣하게 굳었다. 굴의 근육기둥을 굳이 눈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경은 굴을 씻다가 주방을 둘러보았다. 주방은 유경이 살고 있는 열 세 평짜리 아파트보다 넓었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유경은 재산을 셈해 보곤 했다. 전세금 몇 푼과 낡은 소형차 한대, 정규적인 수입이 없다면 몇 달 버텨내기도 힘들 초라한 퇴직금이 있었다. 전부 털어도 작은 옷가게나 분식집 하나 차릴만한 돈이 되지 못했다. 병원에서 피와 고름을 열심히 빨아 먹고서도 죽어야만 될 거머리 같은 신세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일이 아무리 힘겨워도 툭 털어버리고 나올만한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허리를 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굴 까기 쯤 별것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손목과 목이 뻐근해 지면서 땀도 났다.
"상 한 굴은 골라내서 버려야 해. 재수 없으면 설사를 하거나 마비가 올 수도 있고, 기억상실증에 걸릴 수도 있거든."
유경은 미란이 하는 말을 듣고 골라낸 상한 굴의 색깔을 자세히 보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파랗게 멍이 든 강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상한 굴을 먹고 기억상실이 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유경은 강 선배 사건 이후로 전에 없던 두드러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피부과 과장은 시집 못가서 스트레스를 받느냐고 엉너리를 치며 물었다. 제부가 홀에 손님을 맞더니 주방으로 들어왔다. 생선을 조리대에 올려놓고 칼등으로 머리를 쳐 기절을 시키면서 미안하다고 우스개 소리를 했다. 그는 새벽에 안개를 헤치고 서해안 포구를 다녀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기운이 넘쳐보였다. 사장이면서 실무경력 십 년이 넘는 솜씨 좋은 주방장답게 회를 뜨는 손놀림이 능숙했다.
오전 열한시가 넘자 이른 점심을 하려는 손님이 많아졌다. 장사를 하면서 점심시간에 돌잔치를 치를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유경은 가끔씩 회를 먹기 위해 삼십 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도 보았다. 함께 온 동료들과 떨어져 따로 테이블에 앉는 경우도 생겼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유경은 횟상을 받으면 고개를 박고 먹기에만 열중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자신이 가진 병에 죽을 듯이 집착하는 환자들이 떠올랐다.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유경은 가게를 나와 휴대폰을 꺼내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친절 서비스 교육 있으니 내일 오후 4시까지 교육실로 참석 할것. 의료 서비스에 대한 인터넷 시험을 3일안에 치를 것'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병원의 서비스정책에 적응해 갈수록 열정이 소진되어 갔다. 병원에서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간호사는 싹싹하고 웃기만 잘 하면 되는 직업인으로 여기는 환자나, 원하는 대로 즉시 해주지 않으면 환자의 권리 운운하며 이름을 적어가면서 겁주는 사람들한테 넌더리가 났다. 그들이 바라는 대로 있는 힘껏 친절을 다하고 나면, 그 다음에 그들은 또 무슨 주문을 할까.
산적꼬지에 쇠고기와 송이, 미나리와 당근을 바짝 붙여 꽂는 미란의 안정된 손놀림을 보았다. 미란은 예쁜 색깔을 내기 위해 이번에도 부침가루를 쓰지 않았다. 산적을 밀가루에 얇게 묻힌 다음 손바닥에 올려놓고 톡톡 두드려 가루 털기를 반복하는 동생의 모습을 유경은 바라보았다. 빛깔을 맞춘 산적의 끝이 칼날에 눌려 지나치게 가지런히 잘려나가고 있었다. 어쩐지 산적꼬지에 유경의 살이 꽂히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미란의 가게 주위에는 횟집들이 밀집해 있었다. 아파트나 대형 음식점들 사이로 화려한 모양의 생선이 그려진 횟집 간판들이 불쑥불쑥 솟아 있었다. 미란을 통해 앞집에 일본말로 '괴짜'라는 뜻의 '가부키모노' 횟집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프랜차이즈 가게라 본사에서 수산물을 포 뜨기 형태로 가공해 배송을 해 주면, 준비된 소스와 재료로 멋을 내고 생선을 썰어 내 놓는다고 했다. 미란은 살아있는 생선과 주방장이 없는 횟집은 괴짜가 아니라 가짜라고 딱 잘라 말했다. 가짜든 괴짜든 가부키모노라는 일식집이 앞에 떡하니 생기면서 미란은 이에 질세라 3단짜리 대형 수족관을 사들였다고 했다.
"수족관 고기들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아. 금방 횟감으로 식탁에 오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거든."
미란이 마른 걸레로 수족관을 꼼꼼하게 닦아내며 말했다. 수족관의 맨 위층은 돔이 가득했다. 30㎝도 넘는 타원형의 몸통에 활짝 펼친 등지느러미와 붉은빛의 비늘이 관능적으로 보였다.
"자연산과 양식 생선의 회 맛을 구분 하기는 힘들어. 턱 없이 비싼 값을 치르고 자연산을 고집하는 사람도 있어서 몇 마리 가져오기도 하지만 이놈들은 대부분 양식 산이야. 돔은 스트레스에 약해. 어쩔 때는 물만 갈아줘도 죽는 놈이 있어서 정말 신경 쓰여. 그런데 농어는 돔과 조금 달라. 주둥이들이 유난히 상해있지? 갇혀있다는 것을 잊어먹는 건지 답답한 건지 자꾸 수족관 유리를 들이받아서 그래."
유경은 농어의 찢긴 입술과 가물치처럼 검고 긴 몸을 보았다. 도도하고 유연한 몸놀림을 보다가 다시 강 선배가 떠올랐다. 강 선배는 환자나 동료들 앞에서 언제나 여유있게 웃고 행동했다. 강 선배와 근무를 하면 선배의 재담과 부지런함에 병동에 활기가 넘쳤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면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기 일쑤였다. 선배는 난처한 상황에 처한 동료의 문제를 나서서 해결해 주기도 했는데 유경도 선배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한번은 강 선배가 화장실에서 발작을 일으킨 협심증 환자를 구했다. 화장실 문이 안에서 잠겨버려 유경이 관리과 직원을 기다리다가 속이 다 타버렸을 때, 출근한 강 선배는 유니폼 치마를 찢고 화장실 위로 넘어가 환자를 데리고 나왔다. 강 선배의 하얀 허벅지와 긁힌 다리에서 방울방울 스며 나오는 피를 본 이후 유경은 강 선배를 달리 보게 되었다.
농어의 몸놀림에 기가 질린 듯한 우럭에게 유경의 눈이 꽂혔다.
"우럭 중에 눈에 백태가 끼고 구석에서 비실거리는 놈들은 오래 못 살아. 스트레스 때문인지 금방 죽거든. 그나마 제일 속이 편해 보이는 건 이 노인네들이야."
미란이 수족관 맨 아래 층에 시루떡처럼 쌓여있는 납작한 광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생선은 자신의 몸 위에 다른 놈이 앉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데 광어는 신경도 쓰지 않거든."
유경은 수족관을 닦는 미란의 부지런한 몸놀림이 어쩐지 과장돼 보인다고 생각했다. 유경처럼 미란도 수족관을 보고 있으면 슬퍼질까.
돔은 수족관 안에서 살기에 적합한 온도가 십 오도여서 농어나 광어와 함께 두지 않는다고 했다. 마스카라를 한 듯한 예쁜 눈을 가진 생선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몸을 뒤집고 수족관 위로 떠오르는 놈이 있었다. 버둥대는 돔이 뜰채에 잡혔다. 제부가 수족관 뒤에 있는 도마 위에 돔을 올렸다. 그는 돔을 기절 시킨 다음 칼을 들어 단번에 대가리를 자르고 배를 갈라 내장을 훑어낸 다음 수돗물로 피를 씻어냈다. 아직도 꿈틀대는 돔의 몸통을 들고 조리대로 갔다. 젖은 눈과 끔뻑거리는 주둥이가 남았다. 느닷없이 심장과 머리가 잘려나간 이 참상에 대해서 돔의 주둥이가 항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경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두드러기가 난 자신의 눈두덩을 피가 나도록 긁었다. 칼을 쥐고 날 생선의 배를 가르고 그 살점을 맛있게 먹어치우는 인간들이 진저리가 났다. 돔의 뱃살보다 얇게 느껴지는 가슴팍 밑에서 유경의 심장이 여리게 팔딱대기 시작했다.
12주 동안 토요일마다 여섯 시간씩 서비스 교육을 받고 난 뒤에 유경은 서비스가 운동경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경기 전에 몸을 풀어 주듯이 입과 턱을 움직거리며 표정과 마음을 관리해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그만 둔 직원들의 몫까지 일이 늘어서 유경은 늘 불안했다. 엉덩이를 빼고 머리를 90도로 숙여 인사를 하면서도 눈은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느라 급급했다. 유경은 어정쩡한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걸려서 자주 입술꼬리를 올리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희생하고 받아들이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무수한 언어와 행동들이 자판기 커피처럼 뽑혀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평가자는 환자로 가장을 하거나 보호자로 위장하여 보호자 침대에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표정이 어둡고 어깨가 구부정함.' 유경에게 내려진 평가였다. 44시간의 교육으로 유경은 눈썹과 입 꼬리만 올라가는 묘한 표정을 갖게 됐다. 보정 속옷을 입고 턱을 의식적으로 잡아당겨 굽은 어깨를 펴 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머리가 자꾸 어색하고 불편해서 왼쪽으로 기울었다.
약을 먹고 혼수상태가 된 환자를 방치했다는 보호자의 민원이 이어졌다. 환자가 먹은 약은 감기약이었고 혼수상태가 아니라 깊은 잠에 빠진 것이었다는 의사의 진단 내용이 간호 기록지에 남은 덕에 오해가 풀렸다. 환자가 깨어난 뒤에도 며칠 동안 보호자는 의료사고가 날 뻔 했다며 유경을 끈덕지게 괴롭혔다. 유경에 대한 병원의 평가서에는 두 개의 사건이 전과기록처럼 남았다.
병원에서 제시한 모범답안 내용대로 전화를 받는지 감청이 시작됐다. 병동 별로 순위를 매겨 매 달 발표가 됐고 유경의 병동은 두 번 교육의 대상이 되었다. 모두가 똑같은 높이의 음으로 일률적인 답변과 안내를 해 주는 것이 중요했는데 그때마다 유경은 실수를 했다가는 언제 뜰채에 잡혀 도마에 오를지 모르는 수족관 안의 생선이 된 기분이 들었다.
미란은 뜨거워진 팬에 기름을 두르고 산적을 얹은 다음 계란 노른자를 풀어 숟가락으로 살짝 뿌렸다. 계란에 산적을 담그지 않고 숟가락으로 뿌려 지지면 산적 아래쪽이 깔끔하게 붙을 뿐 아니라 산적 윗부분에 노른자가 남지 않아서 뒤집어 지져도 색깔이 고스란히 남았다. 미란이 예쁜 그릇에 모양을 낸 단무지를 담아 내 놓으면 손님들은 색다른 음식으로 착각했다. 생선회가 나가기 전이나 후의 기본반찬에도 싱싱하고 푸짐한 재료를 고집했는데, 큰 송이버섯 버터구이와 새우 찜은 손님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미란의 야무지고 빠른 손이 분주하게 움직일 때마다 여기 저기 널려있던 재료들이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가듯 어느 순간 먹음직스러운 다양한 요리가 만들어졌다.
미란은 손님이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어 했다. 손님을 접대할 목적으로 온 사람에게는 음식과 서비스로 체면을 세워주었다. 손님이 횟값을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가 보이면 마신 소주 값을 빼주거나 계산기에 적힌 금액의 뒷자리를 털어내 버릴 때도 있었다. 유경은 상견례를 치르는 손님들에게 미란이 다식이나 귀한 차를 내주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미란의 손에 군살이 배기듯 횟집 안주인답게 다북스러운 인정과 열정이 붙었다. 그때마다 유경은 가늘고 지나치게 말라서 나약하고 궁해보이는 자신의 손을 슬그머니 뒤로 감추곤 했다. 유경은 굴이 담긴 체를 소금물에 살살 흔들었다. 손에 소금물을 묻혀 두드러기가 돋은 입 주위와 목덜미를 두드렸다. 피부과에서 열 알이 넘는 약을 처방해 주었지만 꾸준히 먹어도 가려움증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았다.
다른 쪽 테이블에서 느닷없이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이 있었다.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경은 미란에게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이미 전작이 있었던 듯한 손님은 브레멘 흑맥주집 사장이라고 미란이 말했다. 술버릇이 나쁘고 종업원에게 가혹해서 주변 음식점 사람들이 꺼려한다는 것을 미란에게 잠깐 들은 적이 있었다. 유경은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아 걱정스러웠다. 유경의 예민한 신경돌기들이 하나둘씩 곤두서고 있었다. 긴장한 유경의 등을 미란이 쓸어내리며 요즘 장사가 잘 되지 않아 가게를 내놓는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내버려 두라고 말했다.
"병원 생활은 어때?"
유경은 미란의 질문에 머뭇거렸다.
"늘 그렇지 뭐…. 요즘은 병동 구석구석 청소를 해. 어느 병동이 깨끗한지 순위를 매기거든. 쉬는 날이나 휴가를 신청한 날도 소용이 없어. 수간호사가 호출하면 서울에 있어도 나가야 될 판이야."
병실 냉장고 청소를 하고 환자 식탁을 닦았던 어제의 일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횟감이 되어 사라지는 생선들처럼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병원을 떠났다. 회 맛을 아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서비스 맛을 알아버린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려하지 않았다.
미란이 수건에 얼음을 싸서 유경의 이마에 난 두드러기에 대주었다. 두드러기를 보고 있는 미란의 눈이 근심에 차 있었다.
"직장 생활이 다 그렇지 뭐. 우리 직원들은 아침 아홉시에 나와서 밤 열시쯤 퇴근하는 걸. 주방에 있는 양 실장이나 박 군도 기술 배울 목적이 아니면 월급이 적은 이런 곳에 있겠어? 그래도 홀에서 서빙하는 직원들은 팁이라도 받으니까 좀 나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조건이 좀 낫다 싶으면 다른 식당으로 냉큼 가버리는 걸."
주인하고 종업원의 마음이 같을 수는 없다고 미란은 말했다. 종업원들의 태도가 못마땅해서 잔소리를 한번 하고 나면 기분을 풀어 주려고 두 배의 노력이 든다고 했다. 그렇지만 직원들과 회식을 하고 노래방에 자주 간 덕분에 노래실력이 늘었다고 웃었다.
"나도 형편이 풀린 건 아냐. 빚 갚고 여유를 찾으려면 몇 년은 바짝 벌어야 돼. 저 가짜인지 괴짜인지 모를 일식집에 젊은 손님들을 많이 뺏겨서 고민이 많아. 수족관에 넣어둔 까치 상어 봤어? 고기들 놀란다고 내가 말렸는데 상호 씨가 상어가 새끼를 한 번에 삼, 사십 마리씩이나 낳는다고 애기같이 고집을 부려서 어쩔 수가 없었어."
미란이 잇몸이 드러나게 웃었다. 보조개가 들어가고 눈가에 자잘한 주름이 잡혔다. 목젖을 흔들며 낮게 웃는 미란을 보며 유경이 슬며시 웃었다. 웃다가 유경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유경은 병원에서 웃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었다.
"아파서 입원하는 사람에게 어서오십시오라니, 안녕 하시냐니? 내가 지금 백화점에 쇼핑하러 왔나요? 왜 자꾸 그렇게 웃어요, 기분 나쁘게!"
위암 진단을 받은 어머니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딸이 유경에게 호통을 쳤다. 유경은 무조건 사과했다. 친절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그 보호자는 비웃었다고 우겼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어린 아이들이 들고 있는 풍선에 그려진 피에로를 보면 유경은 피에로 같은 자신의 얼굴이 떠올라 씁쓸했다.
"간호사나 의사들이 웃으면 짜증나고 화가 난다는 환자나 보호자도 꽤 있어."
강 선배가 한 말에 유경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웃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진심이 아닌 친절은 들키기 마련이었다. 유경의 미소를 받은 환자나 보호자가 다시 굳어버린 유경의 표정을 발견하고 탓을 한다 해도 다시 웃으며 발뺌을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거리를 두고 다가가지 않으면 적어도 병이 깊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었다.
제부가 수족관 히터를 점검하고 있었다.
"처형, 이 물을 어디서 가져오는지 아세요? 해안 현지에서 정화시킨 바닷물을 실어 온 겁니다."
제부는 놀라지 않았냐는 표정으로 유경을 쳐다보았다.
"사정이 생겨서 바닷물을 파는 장사꾼한테 물을 사게 되면 일곱 배 정도 비싼 값을 치러야하거든요. 기름값과 인건비를 챙겨주고 바닷물을 사야 할 만큼 수족관의 조건을 바다처럼 만드는 일이 아주 중요해요. 물의 온도와 산소, 염도가 적당하지 않으면 수족관의 고기는 금방 죽어버리거든요."
유경은 제부가 하는 말을 듣고 수족관의 고기가 자신인 듯 느껴졌다. 유경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병원의 환경은 감쪽같았다. 숨통을 조이는 인공낙원에서 수족관에 시루떡처럼 쌓인 생선처럼 사람들 틈에 끼어 유경은 근근이 버텨왔다. 미란은 상어새끼를 기다릴 희망이라도 있어 좋겠다고 유경은 생각했다. 수족관에 상어를 키워 새끼를 보겠다는 무모한 꿈이라도 서슴없이 품을 수 있어 부러웠다.
유경과 강 선배는 운이 없었다. 그날 밤 근무자가 누구였든 당했을 일이었다. 닥터 P는 요구사항이 많은 환자들에게 늘 지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비스평가에서 환자들은 P가 불친절하다는 지적을 했고 그 사실이 직원들에게 알려졌다. P는 부서장에게 여러 번 불려가 질책을 받았고 한 번 더 실수하면 사직서를 쓰라는 경고를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전화를 잘 받지 않는 P때문에 간호사들이 환자들에게 시달리는 일이 많아졌지만 강 선배는 P에게 관대한 편이었다.
"주치의는 한 명인데 치료해야할 환자는 산더미잖아. 간호사에게 오는 전화만도 하루 60통이 넘는다더라. 잠이 모자라서 수술실에서 졸기도 한다는데 우리가 서로 도와줘야지."
강 선배의 이러한 관대한 태도는 유경에게 때로는 위로가 되었지만 선배의 의지대로 질질 끌려 다니는 느낌을 갖게 할 때가 더 많았다. 유경은 강 선배가 노동조합원들을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는 낯선 모습도 목격했다.
P는 하필 당직인데도 술을 마시고 있는지 없었다. 매 시간 갑상선 수술환자의 상태를 살펴보던 강 선배가 갑자기 유경을 불렀다.
"수술 부위에 붙여둔 거즈가 피에 흠뻑 젖었어. 환자의 목이 부풀어 오른 것이 아무래도 출혈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빨리 바이탈 사인 체크하고 응급처치 박스 준비해야 되겠어!"
강선배의 목소리는 다급해졌다.
"배욱철 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 보호자분도 빨리 일어나보세요. 환자분 의식이 없어요."
강 선배의 등살에 잠에서 깨어난 보호자는 곧 사태를 파악하고 다짜고짜 울기 시작했다. 유경은 재빨리 환자의 혈압을 쟀지만 턱 없이 낮았고 환자의 의식이 흐릿했다. 고개를 돌려 강 선배를 보니 창백해진 얼굴로 전화기를 붙들고 매달려 있었다. 10~20분이 지나도 P는 오지 않았다. 강 선배가 중환자실 자리까지 확보해두었으나, 처방을 내릴 의사가 없어서 환자는 어느 곳에도 가지 못한 상황이었다. 다른 병동 환자를 구명하고 달려온 응급구조팀이 신속하게 응급조치를 취해서 중환자실로 옮겼지만 환자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유경과 강 선배는 P에 대해서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의사가 연락을 받지 않았다는 기록은 큰 문제로 번질 것이 뻔했다. 병원을 살리자는 서비스 교육의 영향이기도 했다. 보호자들은 모든 기록을 복사해 갔고 책임을 강 선배와 유경에게 물었다. 보호자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욕설로 모욕을 당한 유경과 강 선배는 억울해서 울었다.
유경과 강 선배는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병원은 보호자들에게 위자료를 지불하고 입막음을 했다. 사건에 대한 소문이 퍼져서 의사들과 간호사들 사이에는 냉랭하고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지만 병원은 모르는 체했다. 더 강력한 서비스 교육과 평가가 이어졌다.
갑자기 식당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주인을 찾는 호프집 사장에게 미란이 달려갔다. 회가 싱싱하지 않다고 트집을 잡는 호프집 사장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소주병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가게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고 손님들이 움찔했다. 제부가 호프집 사장을 데리고 가게 밖으로 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호프집 사장이 '괴짜'집 때문에 미란이네가 망할 거라고 악담을 했다. 비겁하게 ‘괴짜’집에서 부릴 행패를 엉뚱한 곳에서 부린 듯 했다. 놀란 손님들이 가게에서 빠져 나갔다. 당황한 박 군과 양 실장이 합세해도 호프집 사장을 어쩌지 못했다. 호프집 사장이 수족관 열선을 잡아채자 다급해진 미란이 오늘이 아들 돌이라고 사정을 했다. 유경은 미란이 손질하다가 호프집 사장을 말리려고 뛰어 나간 통에 뜨다만, 회 위에 꽂힌 칼을 집어 들었다. 호프집 사장, 아니 P의 목줄에 칼을 들이대고 싶었다.
P는 새벽 여섯시 반쯤 병동에 나타났다.
"저어기, 간밤에 무슨 일 있, 있었어요? 아, 머리야. 두통약 있으면 아무거나 주세요. 폰탈이나 케롤 에프, 뭐 그런 거 없을까?" P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두통약 운운했다.
유경과 강 선배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P를 노려보았다. 눌린 머리카락과 불콰해진 얼굴과 어눌한 말투는 그가 지난밤 모든 연락을 끊고 술에 찌들어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는 호출 받은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할 수도 없었다. 늦게 출근한 외과 의사들 중에 과음한 닥터 P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명백했지만 P는 변명이나 사과도 하지 않았다. P가 사과를 했다면 강 선배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온 몸이 타버리는 것 같았어. 손과 발이 녹아내리고 몸뚱이가 재가 되어 단번에 바람에 쓸려가 버리는 것 같았어, 유경아…" 강 선배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병원에 입원한 강 선배를 만났을 때, 유경은 상상하지 못 할 정도로 망가진 강 선배를 앞에 두고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강 선배도 이제 환자인데, 간호사답게 친절하게 대해야 할까. 저 강 선배도 환자로 가장한 게 아닐까. 유경은 스스로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강 선배는 계단을 막 내려가려던 P를 붙잡고 유경과 강 선배에게 단 한마디라도 사과의 말을 하고 잘못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P는 강 선배와 심하게 다투다가 선배의 손을 냉정하게 밀치고 돌아서 가버렸다. 강 선배는 계단에서 굴러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됐다. P가 의도적으로 강 선배를 밀었다는 말과 좀 과하게 뿌리쳤을 뿐인데 강 선배가 P에게 복수하려고 일부러 굴렀다는 말이 직원들 사이에 돌았다.
강 선배를 씹는 말들이 나돌았다. 선배의 남편은 문병조차 오지 않았고 별거중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강 선배가 병원 측에 고액의 합의금을 요구했다는 말까지도 돌았다. 간호사들마저 강 선배가 다칠 만한 상황을 만들었다며 비난했다. 유경은 매일 고통스러운 불면에 시달렸다. 그렇지만 유경은 꼬박꼬박 출근을 했다.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병원을 홀가분하게 떠난 사람은 강 선배도 유경도 아닌 다른 간호사들이었다.
수족관이 깨지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바다인양 물과 온도로 생선을 속이고 있는 알량한 수족관을 부숴버리고 싶은 사람은 유경이었다. 칼날처럼 번뜩이는 눈을 교묘히 감추고 병원직원들을 달래고 회유하고 때로는 벼랑 끝으로 내몰아 천천히 진을 빼는 짓을 반복하는 병원의 모습이었다. 잠시 정신을 놓기라도 하면 날을 세운 칼이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유경은 병원 직원들이 스트레스를 피해보려고 서너 명씩 무리지어 다니는 것을 보곤 했다. 큰소리부터 치고 보는 환자나 보호자를 피해 화장실에서 숨을 고르고, 잘못을 떠넘기는 동료들의 이기심을 막아낼 단단한 방패를 만들기에 여념 없는 사람들은, 아무 때나 상대가 누가 되었든 편을 갈랐다.
병원을 그만 둘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사람들의 지적대로 유경은 돈을 벌어다 줄 남편도 없었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만한 자산이나 용기도 가지지 못했다. 강 선배의 편이 되기보다 입을 다물고 광어처럼 엎드려 있기로 했다. P가 몇 개월의 감봉으로 죄를 면하고 강 선배가 사직을 권고 받았다는 소문에도,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겹겹이 쌓여가는 죄책감과 분노를 삼켰다.
좁아터진 수족관이 박살이 나고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유경은 할 수만 있다면 가증스럽고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까지 쓸려 보내고 싶었다. 모든 사람들과 관계가 원만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강 선배 곁에 있기가 버거웠다. 모범간호사상을 두 번이나 받고 남이 할 일까지 나서서 하는 경우가 잦은 선배는 정말이지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유경은 자신 이야말로 조그만 충격에도 눈깔이 허옇게 멀고 아가미를 들썩일 때마다 지독한 비린내를 풍기며 죽어가는 생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수족관 깨지는 소리에 놀라 유경은 움켜쥐고 있던 칼에 손을 베었다. 유경은 주먹 안에 고인 피가 떨어지지 않도록 꼬옥 쥐었다. 사람들이 바닥에 떨어진 돔을 농어와 광어가 있는 곳으로 조심스럽고 신속하게 옮겼다. 제부가 가게 수족관과 유리파편들을 수습했다. 그 와중에도 미란은 돌 상차림에 산적과 해산물, 돌떡과 케이크를 놓았다. 둥근 상 곳곳에 돈과 연필, 실타래, 공책 등 돌잡이도 놓았다. 미란의 시어머니가 한복을 입은 조카를 안고 왔고 다른 가족들도 돌상에 둘러앉았다. 미란은 아들을 품에 안고 손님들과 종업원들에게 축하인사를 받았다.
제부는 커다란 바구니에 열 마리가 넘는 돔을 담아두고 주방에서 칼을 갈았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생선은 오래 살 가망이 없다고 했다. 큰 손해가 났지만 그는 돔을 잡아서 손님에게 대접하겠다고 했다. 제부가 목장갑을 낀 손으로 돔의 등지느러미를 조심스럽게 쓸어 눕혔다. 지느러미 가시에 찔렸다가는 온 몸에 통증이 퍼져 다음날까지 고생할 때도 있다고 했던가. 잘린 머리와 뼈와 지느러미와 꼬리들이 쌓여갔다.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달려드는 몸통 없는 대가리에 놀라 유경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물이 빠지고 돔의 모습도 사라진 텅 빈 수족관을 보았다. 생명이 없는 공간은 공허하고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유경은 그것이 믿기지 않아 깨진 수족관 안에 손을 넣고 바닥과 벽을 더듬어 보았다. 유경의 손에 미끄럽고 물컹한 것이 잡혔다. 이끼. 수족관 밑바닥과 옆면이 맞닿는 틈새에 초록색 물이끼가 끼어 있었다. 유경은 생선에 정신이 팔려 그것을 미처 보지 못했었다. 부지런하고 착실한 제부와 미란이 수시로 물갈이를 해주고 꼼꼼하게 청소를 해서 결코 눈에 보이는 이끼를 놓아둘 리도 없었다. 유경은 수족관 틈새에 들러붙은 이끼를 손톱으로 긁어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젖은 먼지 같고 비릿한 냄새까지 풍기는 비루한 존재. 유경은 이끼를 보고 두려움의 대상이 무엇이든 늘 숨어서 버텨내려 하는 나약한 자신을 보는 듯해서 화가 치밀었다. 칼에 베인 손의 통증이 등줄기를 타고 목덜미까지 뻗쳐 올라왔다. 하지만 유경은 수족관 밑에서 꿋꿋이 제 생명을 피어내고 있는 푸른 이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미란의 극성스런 손길을 피해서 열악한 틈새라도 뿌리를 박고 씨앗을 퍼뜨린 이끼의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유경은 자신이 강 선배에게 뿌리를 내릴 작은 틈새라도 되어 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터무니없이 강 선배를 지킬 배짱이라도 생긴 것일까. 강 선배가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유경은 비참하게 해부된 돔의 몸을 가슴 앞으로 끌어왔다. 칼로 대가리에 붙은 지느러미를 떼고 비늘을 긁어냈다. 여린뼈와 꼬리도 손질해서 수돗물에 씻었다. 땀구멍으로 소금기가 빠져나오고 생선의 비린내가 배어들었다. 머릿속까지 돋은 두드러기 위로 얇고 반짝이는 생선의 비늘이 돋는 것 같았다.
미란이 당근과 파슬리로 한껏 멋을 낸 접시에 생굴을 담아 유경의 앞에 내밀었을 때, 떡집 아주머니가 잠깐 떠올랐다. 꼬깃거리는 천 원짜리 몇 장에 묻은 마음의 위력을 아주머니는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유행이나 변화에 둔감하고 느린 시장이 살아있는 것의 뱃속 같이 느껴지는 진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유경은 엄청난 허기를 느꼈다. 속 뚫린 꿈틀대는 개불과 돔과 광어의 살을 입에 넣고 달게 꼭꼭 씹었다. 탕에 녹아든 생선의 뼈와 비린내까지 밥에 둘둘 말아 먹었다. <끝>
심사평 / 한승원
소설을 왜 쓰느냐,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와 우리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 골목에 들어 있다.
문학의 위기라는 오늘날 소설의 존재 이유는 절박하다.
소설은 작가가, 한 개의 거대한 비유의 덩어리를 통해서 독자에게 이것이 우리 삶의 실존 아니냐고 질문하는 것이다. 그 질문의 절실함을 기준으로 하여 응모된 소설들을 읽었다.
본심에 오른 소설 가운데서 '대사자 지열의 무덤 삼각 고임 천장에 그린 무늬' '사마귀' '수족관, 이끼' '뼈가 끓는 시간' '새털구름 사이로' '예티를 찾아서' 등 6편을 골라 깊이 읽었다.
'예티를 찾아서'는 작위적이고 행군의 상징성이 애매하고 리얼리티가 결핍되어 있다.'새털구름 사이로'는 광주 민중항쟁 뒷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리얼리티 치열성 새로움 등이 아쉽다. '뼈가 끓는 시간'은 문장력과 형상화시키는 힘이 있고, 뼈를 고는 시간에 어머니가 앓는 늑골의 아림이 가슴을 아프게 하지만 산만하다. '대사자 지열…'은 고구려 벽화 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공력을 많이 들인 작품이지만 단편소설로서의 짜임새가 부족하고 전체적으로 늘어져 있다. '사마귀'는 잘라내고 또 잘라내도 다시 돋아나는 사마귀처럼 질곡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삶이 가슴 아프다. 문장도 지적이고 형상화 시키는 능력도 대단하지만 결말이 다소 맥없다. '수족관, 이끼'는 주인공의 생명력과 실존이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 병원과 횟집을 번갈아 서술하는 문장력과 형상화시키는 힘도 무던하다. 주인공의 생명력의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느 작품보다 뛰어나다 싶어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었다. 모든 예술 작품은 결국 생명력의 예찬 그 자체인 것이다. 당선 작가에게 축하하고 건필을 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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