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봄날 / 이수지

시인 최주식 2010. 4. 14. 22:31

봄날 / 이수지

기타를 치고 싶었다. 일어도 배우고 싶었다. 장래 희망 란에는 언제나 디자이너라고 적어 넣었다. 
우리 집 가장은 소주병과 약봉지였다. 삼청교육대에서 씀바귀 같은 절망을 키우고 돌아온 아버지는 어느 날 소주병이 되어 세상 밖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정부보조금으로는 뇌종양에 걸린 엄마의 약값조차 보조하기 힘들었다. 

학교에서 오자마자 빨아 널은 체육복, 하얀 체육복이 벌써 말라가네....... 봄날이 오긴 왔네, 
팔락팔락.......자꾸 잠이 오네, 운동화는 오래 전에 닳아버렸네.......  

돈 꾸러 갔던 엄마가 때가 훨씬 지나 돌아왔을 때 전기밥솥엔 저녁밥이 그득했다. 밥은 식어있고, 전기코드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불 꺼진 방문 앞에 한참을 목발처럼 서 있었다.  

피자마자 시들은 꽃무리처럼 누렇게 흔들리는 저녁밥, 
아무도 밥을 퍼먹지 못한 그 밤, 꽃잎 같은 밥알들이 흩어지며 소리 없이 강물로 흘러들어갔다. 강바닥에는 기타와 일어교본과 리본원피스가 가라앉아 있었다. 
강물 위에 밥주걱처럼 꽂혀있는 달빛, 바람이 불 때마다 수면 위로 무심히 퍼올려지는 밥 냄새......같은 봄꽃들,
아무리 퍼먹어도 퍼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봄밤.

'♣ 詩그리고詩 > 1,000詩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술빵 냄새의 시간 / 김은주   (0) 2010.04.14
장마 속의 잠 / 길상호  (0) 2010.04.14
무량법회 / 이홍섭   (0) 2010.04.14
너무 멀리 와 있네 / 임영조  (0) 2010.04.14
반달 / 이성선   (0) 2010.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