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파업한 이유/ 이선
한 남자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부음이다
돈벌이 없어도 아내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한평생 동고동락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훌훌 귀향길에 올랐다
세상의 남자들은 아내만 보면 밥통으로 보이는지
-밥 줘. 밥 줘 하다가
밥지기 아내에게 파업을 하라 한다
파업을 축하하는지 국화꽃 화환이 줄을 서고
사내는 하얀 국화꽃에 둘러싸여 빙긋이 웃음만 흘린다
먹지 않아도 하루 종일 웃을 수 있으니
분명 하느님 나라에 도착한 모양이다
그에게 명품 옷 한 벌 얻어 입어보지 못한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가 사준 검은 옷 한 벌 걸치고
립스틱 지워진 파리한 입술을 지긋이 문다
뼛속 마디마다 삼킨 눈물보
주르르 터져 봇물을 이루고도 남을 듯한데
조문객들은 그가 좋아하던 밥상을 펼쳐놓고
금방 새로 지은 밥이 맛있다고 야단법석이다
친구들과 회식 자리에서 김이 나는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 순간 그는 영원히 수저를 놓고 말았다
그녀는 하느님이 자기 십자가 무게를 덜어 주셨노라고
애써 변명하며 쓰린 가슴 훑어 내린다
끝내 일어서지 못한 그는 반듯이 누워
지인들에게 똑같은 표정으로 골고루 작별 인사를 한다
갓 지어낸 밥을 기다리는 남편들을 위해
아내들이 밥솥에 전기 코드를 꽂고 있을 무렵
파업신고서를 쓰는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린다
- 시집, 『환한 나이테』(시와에세이,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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