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쉬어가는 글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

시인 최주식 2010. 5. 15. 20:42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
김서령 지음
중앙북스, 272쪽, 1만3000원

“나는 이제 명성에 대한 환상은 없다”고 말할 만큼 책의 지은이인 김서령(54)은 사람 인터뷰에 있어선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이다. 지난 20여년 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을 텍스트 삼아 읽어오며 “인간에게 동시대의 다른 인간만 한 학교는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소설가 최인호부터 서예가 김양동까지 주로 문화동네 인사 11명과 나눈 이야기를 모아놓고 “삶이란 오래 염두에 두고 나아가면 결국 원하는 곳에 닿는다”고 했다.

책 제목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는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의 『전시 조종사』에서 빌려온 구절이지만 선한 이들과 좋은 인연을 맺으며 살아온 인터뷰어가 독자에게 내미는 손길이기도 하다. 하루하루가 아니라 일생 전체를 관망하고 싶다는 태도로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은 김씨에게 인생의 광각 렌즈가 되어주었다.

지은이의 인터뷰 기사를 본 지인들이 대체로 ‘칭찬이 지나치다’고 주의를 준다는데 “성실하게 제 삶을 정면 돌파해 원하는 것에 다가가고 있는 사람을 영웅이라고 칭하는 데 인색할 필요가 있을까”란 그의 반문 또한 타당해 보인다. 최상의 텍스트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너절한 얘깃거리를 골랐을 리 없기 때문이다. 시골의사 박경철, 목수 이정섭, 광주요 대표 조태권씨 등은 탐구정신으로 똘똘 뭉친 김씨 앞에서 속을 열고 인연의 고리를 든든하게 이어주었다.

불국사를 품은 경주 남산 아래 터를 잡고 그림으로 맹렬정진하고 있는 화가 박대성씨를 묘사한 이런 대목을 보면 ‘지절치도록(진저리쳐지도록의 경상도 사투리)’ 사람을 파고드는 지은이의 마음이 느껴진다. “박대성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나는, 동그랗게 뭉쳐 움직이는 근육 한 덩어리를 발견했다. 흡사 골프공을 집어넣은 것 같다. 골프공만 한 크기로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는 근육, 벼루 셋을 바닥낸 서예가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손아귀 근육에 골프공이 생긴 사람은 듣느니 처음이다.”

속내를 하나라도 더 들으려고 아이처럼 조르고, 매화가 피었다고 훌쩍 찾아가고, 천자문 배우러 함께 다니면서 그가 나눈 교감은 사람 공부라 부를 만한 경지에 달한듯하다. 각 인터뷰 끝자락에 후기처럼 매단 ‘덧붙임’을 보면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하니 김씨에겐 ‘관인통선(觀人通禪)’, 사람을 보는 것도 결국은 선(禪)에 닿기 위함인가 싶다.

정재숙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