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살인 사건 / 방수진
-메트로 PC방
쟁반위에 마른 오징어가
살갗을 그을린 채 죽어있다
다리 하나 찢어 씹을 때마다
오징어의 한 시절을 떠올린다
매끈한 피부 대신 얼룩만이 남은 너는
한때, 넥타이를 매고 건물을 신나게 헤엄쳤을 것이다
매회 진급 사원 후보 명단에 네 이름이 기록되었고,
아직 정곡리 입구에는 반쯤 색 바랜 플랜 카드가
입사의 영광을 펄럭이는데, 이제 도망갈 수도 없는 몸
마요네즈 없이는 차갑게 버려질 제 육체를,
부끄러움도 잊은 채 내보이고 있다
오전에 발견된 김씨는 제법 잘 구워진 오징어였다 삼 일간, 미동 없이 마우스로 적을 죽이던 김씨가 손발이 오그라든 채 노릇노릇하다 모니터의 요리솜씨는 역시 대단했다 오징어를 먹을 땐 누구도 말이 없다 김씨 위에 하얀 천을 입히고 사람들은 조용히 PC방 문밖으로 그를 옮겼다
다음 날에도 도시로 올라 온 오징어들이 길을 타고 흘러온다 한 탁자에 한 마리씩 눕힌 채 모니터의 소문 없는 요리가 시작될 것이다 개중 미처 적지 못한 유서가 그들의 가죽과 함께 씹혀질 것이고, 불 위에서 여덟 개의 다리는 제 아픔을 애써 가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곳에선, 말리고 구워 삼일이면 충분한 마른안주가 주문 없이도 종종 만들어진다
<현대시 펼쳐보기> 시향. 2010. 여름호
'♣ 詩그리고詩 > 1,000詩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경산수(眞景山水) / 성선경 (0) | 2010.08.23 |
---|---|
섬 / 복효근 (0) | 2010.08.23 |
노끈 / 이성목 (0) | 2010.08.23 |
카지아도 정거장 / 황학주 (0) | 2010.08.23 |
물비늘을 읽다 / 박정원 (0) | 2010.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