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밤/정윤천
불이 난 집은 반드시 흥한다던 솜꽃 같은 위무의 말은 누가 지어낸 아름다운 미신이었을까요. ㅎ의 소식이 담긴 사발통문 곁으로 예전의 깻잎들이, 깻잎 닮은 봉투 한 닢씩 거두어 봅니다. 사거리에서도 가장 환한 자리에 일식집 간판을 걸었다는 ㅎ이, ㅅ(사장)이 되어 나타났던 것입니다. 일찌감치 모로 터져서 친구들 중에 맨 먼저 담배를 입에 대었던, ㅎ이, 학교에 오는 날보다 거르는 날이 많았던, ㅎ이, 이번에는 요리사 모자를 폼나게 올려 쓰고, ㅎ이, 멋적은 표정으로 한참을 반겼습니다.
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우리들은 방과 후에 서둘러서 병원으로 몰려갔다. 온 몸이 새까맣게 그을려 눈쌀을 잔뜩 찌푸린 홍식이는 타다 만 오두막이 되어 병상에 엎어져 있었다. 지붕이 있던 자리에서 그때까지 노린내가 풀풀대던 그에게 무슨 일이 났느냐며 채근을 해도 폐가 마냥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홍식이 아버지가 범인이었다. 변소에 뒹구는 구더기를 잡는다며 똥통 속에 휘발유를 한 통 뿌려놓았다. 휘발유를 뿌리면 구더기가 사라진다는 식의 '전설따라 삼천리'는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왔다. 홍식이란 놈 그날도 학교에는 오지 않았다. 국어책 대신 만화책을 챙겨들고 느긋하게 똥칸에 걸터앉았다. 그랬는데, 그만, 불씨 머금은 꽁초 한 대를 평소처럼 제 밑으로 던져주었다. 순식간에 '불난 집' 이 되었다.
술 한 상 사이에 두고 늦게까지 찧고 까불다가, 나서는 길엔 개업식 선물까지 챙겨주던 ㅎ이, 백화점 같은 말투를 곧잘 흉내내던 ㅎ이, 한편으론 대견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깻잎처럼 잠시 흔들거리며 걷다가, 누군가 먼저 불을 붙인 신소리 너머로 오래 전의 필름 한 통이 저절로 풀려서 눈에 밟혀옵니다. "암만 진즉에 알아 봐야 했어야. 불난 집은 옛날부텀 잘된다고 그랬어야" 한꺼번에 터진 폭소의 넝쿨손들이, 길 건너 ㅎ의 '오대양' 창틀까지 뻗자고 하였을 때, 십오야 달빛 아래의 꺼뭇꺼뭇한 깻잎들의 귀로 곁으론 하얀한 시간의 기척이 피어올랐습니다. 솜꽃이 피는 목화밭 두렁마냥 하얗게 부풀어 올랐습니다.
- <시평> 201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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