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이 피는 동안 / 손순미
붉은 비단처럼 요요한 작약이 핀다 이까짓 것! 어머니는 댕강댕강 작약의 목을 친다 밭고랑에 작약의 머리통 흥건하다 또, 지랄이야! 아버지의 화려한 정원은 끔찍한 현장이고 날씨는 환장하겠다 들판을 타고 산을 타고 천지사방 작약을 타던 어머니가 고질적인 혁명을 일으켰다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아욧! 백합나무 가로수를 따라 어머니의 흰 저고리가 나비처럼 날아간다 속수무책 아버지의 농업은 망하지도 못했다
물냄새 연한 유월, 비자나무 숲 산비둘기 처연한 울음 마을로 내려오고 붉은 작약의 주술이 들린 어머니는 위험하다 작약의 꽃 속에 빗물이 고인다 젖달라는 동생의 채근을 뿌리치고 어머니는 술냄새를 풍긴다 툭툭, 붉은 작약이 지고나면 어머니의 백일몽白日夢은 수습됐다 작약의 구근들이 밭고랑 가득 넘쳐났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다시 경작한다
'현대시학' 200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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