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트 / 최형심
정오를 털고 새들이 날아오른다. 비 그친 오후가 나의 등을 부욱 찢으면, 그는 능숙하게 머리와 발목을 몸통에 끼운다.
발목까지 숨이 차오르면, 음표를 빼곡하게 받아 적은 발자국들이 팔랑팔랑 넘어간다. 이제, 나는 익숙한 그 남자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앙상한 갈비뼈를 더듬는 손가락을 따라, 나는 재빨리 늙고 텅 빈 몸을 한 바퀴 돌아 나온다. 손가락이 숨구멍을 더듬어 몸속에 숨은 음악을 꺼낼 때, 익숙한 멜로디로 발목이 시려온다. 푸른 도나우강이 넘칠 듯 사내의 몸속을 흘러, 넘실넘실 골목을 돌아나간다.
노래의 물결을 따라 나는 바다로 가고 싶다. 철컥철컥 텅 빈 관이 음악을 만들듯 빈 기차로 달리고 싶다. 발자국에 대한 기억 없이, 흘러서 파도 끄트머리에 닿으면 첨벙, 발 대신 목을 뽑아 담그고 뜨거운 기적소리를 식히리라. 빈껍데기 속에서 종일토록 목을 뽑는 노래가 파도에 닿을 때, 이윽고 늙은 사내의 바다가 사방에 흘러넘치도록.
입을 떼자 메마른 식도까지 딸려 나온다. 사내가 숨 가쁘게 기침을 토한다. 목에 걸렸던 사분음표 몇 개가 나뭇가지 사이로 사라지고, 잎사귀 속으로 박수소리가 빨려 들어간다. 주섬주섬 동전이 든 모자를 챙기기 시작하는 야윈 손. 토막토막, 나는 가방 속으로 들어가 눕는다. 나는 그를 챙겨 떠난다.
<현대시> 201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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