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판화 - 성지문
1
바람도 한 줄 없이 그림자가 일렁인다
눈 먼 기억들을 바늘귀에 꿰는 어머니
남루를 깁는 낙타여 촛불마저 목이 탄다
불빛도 지루한가봐 그을음을 피우는 밤
머언 곳 동정 살피듯 창문쪽으로 떠는 귓볼
밤 새워 사막을 기워온 어머니의 무르팍이여
2
연을 날려보면 아득함에 소름 끼친다
솟구친 가오리연은 하늘 호수에 숨었을까
끊어진 연줄에서는 사금파리로 우는 햇살
청국장 끓이는 냄새 솔잎 타는 저녁 연기
갈라진 손등에 문댄 가난 시린 콧물 자국
주접든 개를 붙들고 마구 뛰던 텅 빈 운동장
3
누군가 올 것만 같아 공연히 들창을 열면
이마에 닿는 하늘 혀로 받는 꽃눈송이
부엌엔 밥물이 끓고 감자싹이 돋는 윗목
먼 겨울 우레에 잠귀가 들린 외할머니
더 이상 늘린 입성은 저승에나 있다는 듯
두 손을 호도알처럼 비며 내 귓볼을 어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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