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다기(茶器) - 마경덕
잡지사 사무실 한 켠에
묵은 다기(茶器) 세트가 있었습니다
다관과 찻잔은 실금으로 쩍쩍
터져 있었습니다
찻물이 스며들어
더러 차향(茶香)에 손이 젖곤 하였습니다
뭉근한 물 한 잔에
실금을 둥둥 띄워 마셨습니다
이 빠진 찻잔도 쓸만했습니다
누군가 희고 깔끔한 다기를 보내 왔습니다
우려낸 차는 한층 푸르렀지만
마음이 젖지는 않았습니다
새 찻잔을 부실 때 과장님이 말했습니다
살살 씻어요 부딪히지 않게
실금은
다기(茶器)의 터져버린 핏줄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상처였습니다
고로쇠나무 - 마경덕
백운산에서 만난 고목 한 그루. 밑둥에 큼직한 물통 하나 차고 있었다. 물통을 반쯤 채우다 말고 물관 깊숙이 박힌 플라스틱 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둥치에 구멍을 뚫고 수액을 받던 자리. 시름시름 잎이 지고. 발치의 어린 순들, 마른 잎을 끌어다 푸른 발등을 덮고 있었다.
주렁주렁 링거를 달고 변기에 앉은 어머니. 기저귀를 갈아주는 자식놈에게 부끄러워 얼른 무릎을 붙이는, 옆구리에 두 개의 플라스틱 주머니와 큼직한 비닐 오줌보를 매단 어머니. 호스를 통해 세 개의 주머니에 채워지는 어머니의 붉은 육즙肉汁. 오십 년 간 수액을 건네준 저 고로쇠나무.
무꽃 피다 - 마경덕
비닐봉지를 열어보니, 후다닥 무언가 뛰쳐나간다. 가슴을 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꽃이다. 까만 봉지 속이 환하다. 비닐봉지에 담긴 묵은 무 한 개 꽃자루를 달고 있다. 베란다 구석에서 뒹굴던 새득새득한 무. 구부정 처진 꽃대에 보랏빛 꽃잎이 달렸다. 독하다 참말 독하다. 물 한 모금 없이 꽃을 피우다니. 손에 얹힌 무, 몸집보다 가볍다 척, 제 무게를 놔버리지 못하고 주저주저 망설인다. 봄이 말라붙은 무꼬랑지 쥐고 흔들어댄 모양이다. 창을 넘어와 봉다리를 풀고 무를 부추긴 모양이다
눈을 뜨다 만 연보라빛 무꽃. 여기가 어디라고 덜컥, 꽃이 되었던가. 어미 살을 파먹고 꽃이 된 무꽃. 쪼그라진 젖을 물고 있는 무꽃.
비타민E - 마경덕
말랑하다. 꾹 누르면 끈적한 기름이 흐를 것 같다
설명서를 펼쳐본다
- 수족저림 시력보호 월경불순 노화방지
방금 목례를 건네던 그 여자 누구지? 건널목에서 마주친 얼굴이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덩달아 웃었고 파란불이 깜박였고 여자는 황급히 스쳐갔다. 언제부턴가 길거리에 줄줄 나를 흘리고 다닌다. 휴대폰은? 지갑은? 핸드백을 탈탈 턴다. 낡은 수첩, 찌든 동전. 명함 몇 장이 쏟아진다. 언제 어디서 닿았던 인연일까? 생각이 나를 잡아당기자 내가 뚝, 끊어진다. 깜박 퓨즈가 나가고 생각은 나를 꺼버린다. 내가 나를 읽을 수 없다니! 서둘러 되짚어가는 길, 어디쯤 나를 두고 왔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뒤진다. 몸 구석구석 마모(磨耗)가 심하다. 기름칠을 해야 한다.
오이는 씨가 없다 - 마경덕
벌 잡아라 벌. 여기저기 다급한 고함소리
농장주인 애가 탄다 푸른 덩굴 속으로 사라진 벌
오이꽃에 앉으면 농사를 망친다
벌과 사랑을 나눈 오이, 뱃속에 씨가 생겨 꼬부라진다
동네슈퍼, 랩에 싸인 백다다기 오이
쭉 뻗은 오이는 순결의 상징이다
한번도 사내를 안아보지 못한 숫처녀들
머리에 마른 꽃을 꽂고 있다
쩍, 배를 가르니 뱃속이 비리다
짐승들 이야기 - 마경덕
그 모피공장엔 짐승이 우글거렸네 사람인척 하는 짐승 같은 사람과 짐승처럼 묵묵히 일만 하는 사람들과 죽은 짐승들의 눈(眼)이 쌓인 모피창고가 있었네. 숨쉬기조차 힘들게 날아오르는 짐승의 털을 마시며 배고픈 짐승들, 배부른 짐승의 하룻밤 술값 정도에 금방 길들여졌네. 숱한 밤이 뜬눈으로 들들들, 미싱에 박혀죽고 먼지 쌓인 바닥에서 죽은 짐승들의 물 먹인 껍데기는 고무줄처럼 팽팽히 당겨졌네. 여우 한 마리 팔딱, 재주를 넘어 열 마리 여우로 둔갑 했네. 수입산 백여우 뱃가죽을 칼로 찢으며 끈질기게 살아남은 짐승들, 늘어난 가죽에 빗질을 하며 눈부신 빛을 달고 있었네. 죽어서 더 빛이 나는 껍데기에 밤새 날개를 달았네. 겁 많은 순한 짐승들, 백여우의 탐스러운 꼬리에 손 베이는 줄 몰랐네. 수없이 죽어간 짐승들의 슬픈 눈에 그 해 여름, 펄펄 눈이 내리고.
조개는 입이 무겁네 - 마경덕
조개는 나이를 등에 붙이고 다니네. 등딱지에 너울너울 물이랑이 앉아 한 겹, 두 겹, 주름이 되었네. 끊임없는 파도가 조개를 키웠네.
저 조개, 무릎이 닳도록 뻘밭을 기었네. 어딜 가나 진창이네. 평생 몸 안에 갇혀 짜디짠 눈물을 삼켰네. 조개는 함부로 입을 열지 않네.
조개장수 아줌마. 쪼그려 앉아 조개를 까네. 날카로운 칼날이 앙다문 입을 여는 순간 찍, 조개가 마지막 눈물을 쏟네.
“지랄한다, 이놈아가 오줌빨도 쎄네.”
조개 까는 아줌마 쓱, 손등으로 얼굴을 닦네. 조개껍데기 수북하네.
매 맞는 소 - 마경덕
해는 설핏한데 소 한 마리 밭을 간다. 이른 봄, 들머리판에 끌려 나온 두살바기 소. 늙바탕의 아낙과 사내가 매달렸다. 갓 밭일을 배우는 소. 발놀림이 서툴다. 쟁깃날에 씨도리 배추꼬랑지 딸려 나온다. 오며 가며 입질을 하는 소. 이랴 워워 이랴 내지르는 소리에 벌씸벌씸 콧김만 내뿜는다. 앞에서 고삐를 끄는 아낙 힘이 부친다. 어허! 이 놈의 귀가 언제 뚫릴꼬. 싸릿대로 소의 등짝을 후려치는 사내. 소는 가갸거겨를 배우는 어린애 같다. 처음 받아쓰는 글씨처럼 비뚤비뚤 빈 밭에 줄을 긋는다. 바지를 걷어라. 매를 든 아버지. 내 종아리에도 싸릿대가 지나갔다. 헛농사 지었다고 낙심하던 아버지. 저물도록 헛갈이 하는 소. 날 밝으면 다시 된매 맞을 천둥벌거숭이. 맷자국 아물면 소가 될 것이다.
굴뚝 - 마경덕
모딜리아니의 슬픈 목
아니, 오지 않는 그 무엇을 기다리는
수도승의 목
그댈 하늘처럼 믿고
목을 매다는,
어리석은 나의 목
눈을 감고
텅 빈 지붕 위에 꼿꼿이 서있다
저문 하늘로
쿵, 쓰러져 눕고싶은
문 닫은 공장의 쓸쓸한
굴뚝
우리는 사막을 건너간다 - 마경덕
일렬로 앉아 집으로 간다 땅굴 지나 다리 건너 붉은 십자가 밑 지나간다. 비석처럼 늘어선 도시의 십자가, 거대한 묘지를 떼 지어 지나간다. 종일 도시의 사막을 떠돌던 무리들, 신문을 덮고 귀마저 닫고 목하 기도 중. 손잡이에 매달렸던 전갈을 닮은 사내는 어느 사막으로 떠났을까. 지팡이 하나로 더듬더듬 세상을 헤매는 저 맹인, 캄캄한 사막에서 수없이 모세의 지팡이를 생각했으리. 뒤따라 온 아이는 때 절은 쪽지와 껌 한 통을 무릎마다 놓고 간다
우린 지금 눈을 감고 회개 중, 전철이라는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가며.
누군가 골목을 건너갔다 - 마경덕
움푹 파인 발자국이 골목을 걸어간다. 막 포장을 끝낸 질척한 골목을 지나간, 발을 잃어버린 오래된 발자국, 딱딱한 콘크리트 발자국 화석이 쉬지 않고 골목을 걸어간다. 구두가 운동화를 껴안고 큰 발이 작은 발을 업고 박성희 미용실, 월풀 빨래방 현대슈퍼를 돌아나간다. 사라진 발을 기억하는 발자국들. 빈 발자국을 따라가는 내가 아프다. 어느 날 찾아 온 사랑은 나를 딛고 가버렸다. 버거운 영혼이 가벼운 영혼을 밟고 저벅저벅 앞만 보고 가버렸다. 누군가 길에 마음을 빠뜨리고 한참을 찾으러 오지 않는다.
골목은 발자국 흉터를 가지고 있다.
미나리 눈뜨다 - 마경덕
사발에 담긴 뿌리만 남은 미나리. 목 베인 자리 자꾸 가렵다. 피맺힌 자리 그리움이 아문다. 잘 삭은 상처가 움을 틔운다.
빠끔, 한 잎의 귀를 열고 두근대는 움미나리 호기심이 세상을 파랗게 물들인다. 한 움큼의 뿌리, 한 움큼의 힘이 거뜬히 중심을 들어 올린다.
상큼한 미나리 날 끌어당긴다. 잘라내도 다시 푸른, 만져지지 않는 그대를 파먹고 여러 날을 버틸 수 있으리.
슬픔을 버리다 - 마경덕
나는 중독자였다
끊을 수 있으면 끊어봐라, 사랑이 큰소리쳤다
네 이름에 걸려 번번이 넘어졌다
공인된 마약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문 앞을 서성이다 어두운 골목을 걸어나오면
목덜미로 빗물이 흘렀다
전봇대를 껴안고 소리쳤지만
빗소리가 나를 지워버렸다
늘 있었고 어디에도 없는, 너를 만지다가
아득한 슬픔에 털썩 무릎을 꿇기도 했다
밤새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데도 닿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너에게 감염된 그때, 스무 살이었고
한 묶음의 편지를 찢었고
버릴 데 없는 슬픔을
내 몸에 버리기도 하였다
넥타이 - 마경덕
머리를 조아린 습관대로 목은,
바닥을 향해 기울어있다
처진 머리통을 치켜올려 몸뚱이에
단단히 묶는 일을 수십 년
거울 앞에서 의식처럼 행하던 사내
고개 위에 올려진 하루의 무게에
목은 ㄱ자 모양으로 꺾여 있다
술집과 노래방을 거쳐 온 얼큰한 어깨 위로
고였던 말(言)이 흘러내린다
어디쯤에서 사내의 다리가 사라졌을까
무게만 남은 머리 하나
비틀비틀 사내를 끌고 간다
붙잡을 변변한 줄 하나 없이
친친 끈으로 마음을 묶던 사내
헐거운 머리 하나
바닥으로 쿵 떨어진다
소나무 - 마경덕
내원사 계곡. 백 년 묵은 소나무 한 그루 쓰러져 있다. 가지를 찢고 뿌리를 뽑아 올린 바람은 간 곳 없고 솔이파리 누릇누릇 땡볕에 타고 있다. 소나무는 눈을 뜨고 서서히 죽어가는 제 몸을 바라본다. 물소리는 뿌리를 적시지 못한다. 저 놈의 목에 밧줄을 걸고 기중기로 끌면 일어 설 수 있을까
병든 노모에게 속옷을 입힌다. 거웃이 사라져 밋밋한, 여섯 번의 열매를 맺은 그곳, 시든 꽃잎 한 장 접혀있다. 졸아든 볼기에 미끈덩 여섯 개의 보름달을 받아 안은 찰진 흔적이 남아있다. 노모가 눈으로 말한다. 내가 베어지면 그 등걸에 앉아 편히 쉬거라. 머리맡에 고요히 틀니가 놓여있다. 앙상한 두 다리 분홍양말이 곱다. 기울어 가는 소나무, 반쯤 뽑힌 뿌리에 링거를 꽂는다.
부레옥잠 - 마경덕
물고기도 아닌 것이
부레를 달고 있다
목줄기에 바람을 뭉쳐 달고
바람보다 가벼운 부레옥잠
물 속에 뿌리를 찔러 넣고
물을 딛고 일어선다
푸릇푸릇 기어가는
잎사귀 하나 당겨보니,
너른 연못 내 손에 끌려온다
날아라 풍선 - 마경덕
끈을 놓치면 푸드득 깃을 치며 날아간다
배봉초등학교 운동회, 현수막이 걸린 교문 앞에서 깡마른 노인이 헬륨가스를 넣고 있다. 날개 접힌 납작한 풍선들. 들썩들썩, 순식간에 자루만큼 부풀어오른다. 둥근 자루에 새의 영혼이 들어간다. 노인이 풍선 주둥이를 묶는다. 하나 둘, 공중으로 떠오르는 새털처럼 가벼운 풍선들. 절정에 닿는 순간 팡, 허공에서 한 생애가 타버릴, 무채색의 가벼운 영혼이 끈에 묶여 파닥인다. 평생 바람으로 떠돌던 노인의 영혼도 낡은 가죽부대에 담겨있다.
함성이 왁자한 운동장, 공기주머니 빵빵한 오색풍선들, 첫 비행에 나선 수백 마리 새떼 하늘로 흩어진다. 뼈를 묻으러 공중으로 올라간다.
밤송이 - 마경덕
수많은 호위병이 겨누는 날이 선 창(槍)을 보아라. 사력을 다하는 충실한 부하들은 빈틈없이 성을 에워쌌다. 둘러봐도 출구가 없는,
완벽한 저 가시의 城
누군가 고슴도치 갑옷을 빌려 입고
칩거 중이다
몸값 - 마경덕
가스렌지 위에 석쇠를 올려놓고 쥐포를 굽는다. 연탄불에 구워야 제 맛인데 연탄화덕이 어디 흔한가. 연탄아궁이가 기름보일러에 밀리더니 기름도 가스에 밀려난 시대. 헐하던 쥐포값 껑충 올랐다. 쥐치어는 불가사리와 거름으로 쓰이던 놈. 바다가 펄펄 살아 민어, 돔, 넙치가 흔한 시절, 통구멩이 아귀 까치복 쏠뱅이, 못생긴 녀석들 생선 축에도 못 끼던 때, 주둥이 뾰죽, 몸통이 회갈색쥐 닮은 하, 바다의 쥐새끼쯤으로 치던 쥐치가 오징어 보다 비싸다. 그 흔한 것도 마구잡이로 씨가 말라 이제 베트남에서 수입해 온다니 몸값이란 더러 뛰기도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도 기다려 봐야겠다. 쓸모 있어 불러 줄 이 있으려나
겨울에게 - 마경덕
내가 앉았던 자리가 그대의 지친 등이었음을 이제 고백하리. 그대는 한 마리 우직한 소. 나는 무거운 짐이었네. 그대가 가진 네 개의 위장을 알지 못하고 그대를 잘 안다고 했네. 되새김 없이 저절로 움이 트고 꽃 지는 줄 알았네. 그대가 내뿜는 더운 김이 한 폭의 아름다운 설경(雪景)인 줄 알았네. 그저 책갈피에 끼워 둔 한 장의 묵은 추억으로 여겼네. 늦은 볕에 앉아 찬찬히 길마에 해진 목덜미를 들여다보니 내 많은 날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알겠네. 한 발 한 발 거친 숨 내딛는 그대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성자를 떠올리네. 퀭한 눈 속의 맑은 눈빛을 생각하네. 별이 식어 그대의 병이 깊네.
성북동 가는 길 - 마경덕
이 동네의 주인은 높은 담이다
세콤이나 캡스를 달고 낯선 방문자를 가려낸다. 드디어 담도 사람처럼 생각을 갖게 된 것. 생각이 늘어나자 불안이 담을 쌓고 문을 걸었다. 성(城)처럼 우뚝한, 담은 이제 벽이다. 벽은 길을 지우고 세상을 지우고 골목길 야채를 파는 리어카와 떨이를 외치던 생선장수를 밀어내고 제 키보다 높은 지붕을 끌어내렸다. 벽뿐인 동네는 벽끼리 논다. 벽끼리 금을 긋고 등을 지고 건너편 벽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컹컹, 개 짖는 소리만 벽을 타고 넘는다. 담 높은 집의 힘센 개들은 오줌을 갈기며 골목을 쏘다니는 똥개처럼 담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높아서 더 불안한, 거만한 벽은 끝까지 벽만 보여준다.
가을 전어 - 마경덕
방파제에 둘러앉아
전어회를 먹던 할매들
된장종지 앞에 놓고
숭덩숭덩 전어를 썰었다
해 지도록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아따 꼬숩네 꿀 배겼네
맛나면 뭘 혀 똥값인디
올해도 전어가 겁나게 새끼를 친 모양이여
암만, 저 너른 바다가 기름진 밭인디
오지게 씨를 까놨것제
오나가나
바다가 철철 넘쳐 못 살겠다
흐흐흐, 웃던
고향 할매들
노량진 수산시장 수족관 은빛 전어
제 철을 만난 가을 전어
만 원에 달랑 여섯 마리
손님과 가게 주인 실랑이를 벌인다
"손바닥만한 전어가 왜 이리 비싸요"
"낸들 어쩝니까 "
다들 바다가 가물다고 야단들이다
강화 고인돌 - 마경덕
먼 옛날, 강화도에 살았던 어느 족장은
돌 세 개를 지상에 세워두고 사라졌다
두 개의 굄돌 위에 수십 톤의 넓적돌로 지붕을 올린
시간의 집
우직한 석공이 단단한 구릉에 돌을 심어
수천 년,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린
오래된 돌집에서
그를 만난다
들개처럼 벌판을 쏘다닌 다리
완강한 근육이 불거져있다
작살을 움켜쥔 손가락, 물갈퀴가 돋아 있다
짐승털을 두른 여문 어깨에
어둠을 노려보는 짐승의 눈알이 박혀있다
토기와 석촉을 빚으며 돌이 된 손
벌판을 달리던
다급한 북소리, 뿔나팔 소리
개펄 위에 쓰러진 숱한 죽음도 헤아려본다
고분의 벽화 속에 살던
한 사내
수천 년을 건너 와
문짝이 떨어진 돌무덤에 누워있다
얼굴 - 마경덕
심벌이 불거진 근육질 남자, 브래지어 팬티 한 장 걸친 미끈한 여자,
버젓이 대로변에 서있는 목 잘린 속옷가게 마네킹들
죄짓고 싶었네 뻔뻔하고 싶었네 많은 사람에게 면목 없고 싶었네
저런, 쳐 죽일, 배터지게 욕먹고 싶었네
목 위에 얼굴만 달리지 않았다면
기왕이면 여러 개의 목을 갖고 싶었네 꽁꽁 머리통 숨겨두고
일회용 목으로 바꿔 달고 싶었네 재빠른 자라목이 되고 싶었네
왜 내 목은 하나 일까
건드리면 툭, 부러지는 한심한
목 위엔 얼굴이 있고 얼굴에는 마경덕이라는 이름이 있네
걸핏하면 짐승 발톱이 돋네 제발 나이값 좀 하라고 엄마는 말하네
나 아직, 사람이 되지 못했네
고래는 울지 않는다 - 마경덕
연기가 자욱한 돼지곱창집
삼오오 둘러앉은 사내들
지글지글 석쇠의 곱창처럼 달아올라
술잔을 부딪친다
앞니 빠진 김가, 고기 한 점 넣고 우물거리고
고물상 최가 안주 없이 연신 술잔을 기울인다
이 술집 저 술집 떠돌다가
청계천 하류에 떠밀려 온 술고래들
어느 포경선이 던진 작살에 맞았을까
쩍쩍 갈라진 등이 보인다
상처를 감추며 허풍을 떠는 제일부동산 강가
아무도 믿지 않는 얘기
허공으로 뻥뻥 쏘아 올린다
물가로 밀려난 고래들, 돌아갈 수 없는
푸른 바다를 끌어 와 무릎에 앉힌다
새벽이 오면 저 외로운 고래들
하나 둘, 불빛을 찾아 떠날 것이다
파도를 헤치고 무사히 섬에 닿을 수 있을지...
바다엔 안개가 자욱하다
스크류처럼 씽씽 곱창집 환풍기 돌아간다
흙, 벽 - 마경덕
산자락 토담집 한 채. 벽이 기울었다. 흙 한줌 덥석, 발등에 떨어진다. 뭉텅 살점이 나간 흙벽, 벽의 갈빗대가 드러났다. 벽 속에 갈대가 묻혀있다. 군데군데 바람을 메운 자국들. 덧씌운 투박한 손자국에 수심이 가득하다. 누군가 흙손으로 벽의 주름을 펴고 흙 한 덩이 떼어 척, 구멍을 메울 때 불도장처럼 마음이 찍혔으리. 저 벽 속에 살던 두꺼비손을 가진 사내, 갈대 한 짐 마당에 부려놓고 벽의 뼈대를 촘촘히 엮었으리. 황토를 져 나르고 실팍한 장딴지로 흙을 치대면 욕심 없는 맨발에 흙은 반죽처럼 순해져서 벽이 되었을 것. 벽 속으로 들어간 사내는 집의 중심이 되었을 것.
중심을 잃은 벽, 입술을 달싹이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징소리 - 마경덕
서울로 식모살이 간 곰보 금순이, 여수 병모가지* 사창가로 빠진 금자언니, 모두 바다의 젖을 빨며 자랐습니다. 개펄의 발자국이 크기도 전에 자매는 객지로 떠났습니다. 폐병쟁이 마누라 수발하며 평생 바다를 파먹던 그의 아비는 제 몸 하나 건사할 땅 한 평 없어 깊은 물 속에 누웠습니다. 눈빛 서늘한 원귀寃鬼가 되었습니다. 방파제에서 시끌벅적 진혼굿 벌어지고 소식 끊긴 딸년 대신 먼 친척 길동이 아지매만 제 설움에 웁니다. 신기神氣 오른 당골네 징소리, 산산이 찢긴 바다의 살점을 한 땀 한 땀 꿰매고 있습니다. 며칠 째 키를 넘던 파도를 잠 재우고 바다 건너 마을로 챙챙 날아갑니다. 머구리배*의 잠수부, 징소리 메고 다시 물 속으로 뛰어들 때 징헌 놈의 징울음, 잔잔한 수면으로 지잉- 지잉- 미끄러집니다.
*병모가지 : 사창가를 나타내는 은어. 한번 빠지면 나오기 힘들다는 병의 목이라는 뜻
*머구리배 : 멍게나 해삼 전복 등을 채취하는 잠수부들이 타는 작은 배. 물에 빠진 시신屍身을 인양하기도 한다
새싹 - 마경덕
수두를 앓는다
삽시간에 퍼져버린 열꽃에
득득, 온 몸을 긁어대는 나무들
봄은 퉁퉁 부어 오르고
얼었던 팔뚝에 진물이 흐른다
손톱 밑에 잔뜩
푸른 때가 끼어 있다
찔레와 능소화 - 마경덕
능소화 한 그루 담 밑에 심지요. 처연한, 주홍 꽃잎 그리며 찔레 곁에 심지요. 찔레는 정신없이 꽃을 게우느라 제 가랑이 사이로 봄이 드나드는 걸 모르지요. 발밑에 능소화가 온 줄도 모르지요. 꽃잎 털고 한가해진 그때나 곁에 선 낯선 친구를 알아볼 테지요. 꽂아 두면 눈이 트는 쇠심줄 찔레는 양반꽃 능소화에게 가시를 들이대며 시샘도 하겠지요. 아니요, 이건 미련한 사람 생각이지요. 붉은 꽃빛에 취해 능소화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어린 능소화를 들쳐 업고 저 담벼락 끝에 올라서서, 사람들이 사는 꼴을 다 보여줄지도 모르지요
씨옥수수 - 마경덕
처마 끝에 매달린 마른 옥수수
봄볕에 슬몃슬몃 눈을 뜬다
질끈 머리를 틀어 올리고
알몸으로 겨울을 버틴 씨옥수수
따순 바람에 발이 가렵다
알알이 쟁여둔 욕망들
웃자란 몸 속의 뿌리들
우르르 봄을 향해 발을 뻗는다
세상으로 뛰쳐나갈 신호를 기다린다
딱딱한 알갱이 속,
저 푸른 불씨들
들판에 확, 불이 붙겠다
문 - 마경덕
문을 밀고 성큼 바다가 들어섭니다
바다에게 붙잡혀
문에 꽁꽁 묶였습니다
목선 한 척 수평선을 끊어먹고 사라질 때까지
서해가 붉은 덩어리 하나를 삼킬 때까지
고요히 쪽문에 묶여
생각합니다
아득한 바다가, 어떻게
그 작은 문으로 들어 왔는지
그대가, 어떻게
나를 열고 들어 왔는지
우울이 무섭다 - 마경덕
당해 본 사람은 안다
우울이 얼마나 지독한지,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면도날로 팔목을 확, 그어버리고
이 깟 세상
홀랑 불 싸질러 버리자고
울컥, 울컥, 목을 치고 오른다
구차한 내가 덧없고 쓸쓸해서
질겅질겅 나를 씹고 있을 때
이 세상에게 엿 먹이고 싶을 때
달려오는 차에 나를 떠민다
순간 나는 허공으로 튕겨지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은주 윤심덕 김소월 장국영도
다 놈이 집어먹었다
얼마나 독한지 얼마나 죽을 맛인지
어디 한번
갈 데까지 가 보자
정녕 천적은 없는가
그래, 신은 우리에게
어머니를 주셨다
오래된 가구 - 마경덕
짧은 다리로 버티고 선 장롱
두 장정의 힘에 밀려
끙, 간신히 한 발을 떼어 놓는다
움푹 파인 발자국 네 개
한 자리를 지켜 온 이십 년의 체중이
비닐장판에 찍혀있다
잠시 땀을 식히며 들여다 본
허름한 가구의 판화
긁히고 멍든 자국이 드러난다
나무의 속살에 이렇듯 상처가 많았던가
언제부턴가 문짝이 틈 하나를 내주고
서서히 기울고 있었구나
머리맡에 서있는 네게 기대어
책을 읽고 아이를 낳고 TV를 보며
남편의 늦은 귀가를 기다렸다
열 자나 되는 몸통을 지붕 아래 세우고
방바닥에 뿌리를 내린
묵은 나무 한 그루
어깨를 안아보니
우듬지로 오르는 물소리 들린다
가구는 아직 숲을 기억하는지
발 아래 무성한 그늘을 늘어뜨리고
더미 가족 - 마경덕
차에 태우고 안전밸트를 매어 주네. 낯익은 사내 웃으면서 손수 시동을 걸어주네. 친절도 해라. 죽음이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다니! 순간 끔찍한 공포를 잊고 말았네. 다녀올게요. 나들이처럼 손을 흔들며 마주 웃어 주었네. 옆자리엔 임신 중인 아내와 뒷좌석엔 어린 아들놈이 타고 있었네. 문을 닫으며 사내가 또 웃었네. 별 일 아니야. 그 인자한 눈이 그렇게 말했네. 나는 널 낳은 아비야. 너에게 팔과 다리를 준 아비야. 자그마치 네 몸값이 얼만지 아니? 그래요.
억대가 넘는 몸값을 알아요. 나와 내 가족을 만드신 위대한 아버지. 내 가족의 갈비뼈는 아버지의 것과 비슷해요.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자동차 한 대를 만들기 위해 서슴없이 가족을 버리는 아버지. 이젠 당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요. 도무지 방어를 모르는 제 이름은 더미*거든요. 아, 아버지 아무 걱정 마세요......이제 악셀을 밟고 벽을 향해 달려가면 되나요?
*더미(dummy) : 센서가 달린 실험용 인형, 각종 자동차 충돌시험에서 운전자 대신 가상의 사고를 당한 뒤 예상 상해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함.
길 - 마경덕
혀가 있었다. 걷거나 달리거나 서있는
바퀴의 지문(指紋)을 끈질기게 핥아먹는
돌아보면 구불텅한 길 하나 졸졸 따라오고 끼익끼익 바퀴에 길이 감기는 소리. 바퀴 속 물컹한 바람이 무거운 세상을 밀고 있었다. 자전거와 수레바퀴들, 종일 휘감아 온 흙길을 뒤뜰이나 문간에 부려놓으며 흐린 지문(指紋)을 읽었다. 느린 구름이 떠다니는 가파른 고개에서 보이지 않는 혀가 바퀴를 핥는 소리. 쉽게 곁을 주는 흙길에서 시나브로 바퀴가 야위어 가고
바다 건너 허공에 길을 내고 세상 끝에 닿은, 완강하고 다급한 길. 집을 덮치고 들판의 배를 가르고 버럭버럭 고함을 치고 있었다. 아무 곳에나 바퀴를 털썩 주저앉혀 길이 마음을 열 때까지 서있는 바퀴. 앞만 보고 달리라고 꾸물대지 말라고 걷어차는 길. 친친 꼭대기로 기어올라 산을 넘어뜨리고 길바닥에 껌처럼 달라붙은 산짐승의 홀쭉한 위장, 그 흔적마저 꿀꺽 삼키고
쇠똥구리 - 마경덕
동네 공터
윗마을 구 씨네 소 한 마리 지나갔다
모락모락 김나는 소똥 한 무더기
파리보다 먼저 달려온 쇠똥구리
똥 먹고 자랐는데 힘이 장사다
긴 주둥이삽으로 척척
경단을 빚는다
눈덩이처럼 커지는 똥덩어리
제 몸의 수십 배인 무게를
어디론가 끌고 간다
일찍이 파브르가 눈독을 들이던 놈
누가 보든 말든 제 갈 길 바쁘다
곡예사가 두 발로 통을 굴리듯
물구나무로 밀고 간다
쇠똥구리야
소똥은 끌어다 뭣에 쓰니?
공터에 봄이 왔다
말뚝 밑에
쇠똥벌레 새끼들 고물거린다
목공소에서 - 마경덕
희고 매끄러운 널빤지에 나무가 걸어온 길이 보인다. 나무는 제 몸에 지도를 그려 넣고 손도장을 꾹꾹 찍어 두었다. 어떤 다짐을 속 깊이 새겨 넣은 것일까. 겹겹이 쟁여둔 지도에 옹이가 박혔다. 생전의 꿈을 탁본 해둔 나무, 빛을 향해 달려간 뿌리의 마음이 물처럼 흐른다.
퉤퉤 손바닥에 침을 뱉는 목공. 완강한 톱날에 잘려지는 등고선. 피에 젖은 지도 한 장 대팻날에 돌돌 말려 나온다. 죽은 나무의 몸이 향기롭다.
그 해 겨울 - 마경덕
흉년 든 그 해
탱자처럼 노랗게 황달을 앓던 아버지
눈 오는 아침, 재첩을 사러 간
엄마는 오지 않고
언니와 나는 쪽마루에 걸터앉아
반 뒷박 남은 호박씨를 까먹었다
종일 퍼붓는 눈
앞산의 눈썹이 지워지고
봉창 여닫는 소리, 잦은 기침 소리
뒤란 대밭 철퍼덕, 눈똥 누는 소리
쌀가루 같은 눈이 내려
가뭇없는 길
휘청, 발을 헛디딘 대숲은
한 무리 새떼를 날려보냈다
신발論 -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그 해 겨울 - 마경덕
흉년 든 그 해
탱자처럼 노랗게 황달을 앓던 아버지
눈 오는 아침, 재첩을 사러 간
엄마는 오지 않고
언니와 나는 쪽마루에 걸터앉아
반 됫박 남은 호박씨를 까먹었다
종일 퍼붓는 눈
앞산의 눈썹이 지워지고
봉창 여닫는 소리, 잦은 기침 소리
뒤란 대밭 철퍼덕, 눈똥 누는 소리
눈이 내려
가뭇없는 길
휘청, 발을 헛디딘 대숲은
한 무리 새떼를 날려보냈다
문 - 마경덕
봉창을 밀고 단숨에 들판이 들어섭니다 뒷산에 우거진 상수리, 툭툭
지붕으로 던지며 뒷간 환기창에 따가운 가을볕 쳐들어옵니다 문이
한나절 나를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언젠가 서해(西海)에 가서도 꽁꽁
묶인 적 있습니다 목선 한 척 수평선을 끊어먹고 사라질 때까지
서쪽으로 난 쪽문에 고요히 묶여 있었지요 아득한 지평선이, 너른
바다가 어떻게 그 작은 문으로 들어 왔는지 아직 모릅니다
슬픔을 버리다 - 마경덕
나는 중독자였다
끊을 수 있으면 끊어봐라, 사랑이 큰소리쳤다
네 이름에 걸려 번번이 넘어졌다
공인된 마약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문 앞을 서성이다 어두운 골목을 걸어나오면
목덜미로 빗물이 흘렀다
전봇대를 껴안고 소리치면
빗소리가 나를 지워버렸다
늘 있었고 어디에도 없는, 너를 만지다가
아득한 슬픔에 털썩, 무릎을 꿇기도 했다
밤새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데도 닿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너에게 감염된 그때, 스무 살이었고
한 묶음의 편지를 찢었고
버릴 데 없는 슬픔을
내 몸에 버리기도 하였다
우리는 사막을 건너간다 - 마경덕
일렬로 앉아 집으로 간다 땅굴 지나 다리 건너 붉은 십자가 밑 지나간다. 비석처럼 늘어선 도시의 십자가, 거대한 묘지를 떼 지어 지나간다. 종일 도시의 사막을 떠돌던 무리들, 신문을 덮고 귀마저 닫고 목하 기도 중. 손잡이에 매달렸던 전갈을 닮은 사내는 어느 사막으로 떠났을까. 지팡이 하나로 더듬더듬 세상을 헤매는 저 맹인, 캄캄한 사막에서 수없이 모세의 지팡이를 생각했으리. 뒤따라 온 아이는 때 절은 쪽지와 껌 한 통을 무릎마다 놓고 간다
우린 지금 눈을 감고 회개 중, 전철이라는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가며. 2006-01-19
소나무 - 마경덕
내원사 계곡. 백 년 묵은 소나무 한 그루 쓰러져 있다. 가지를 찢고 뿌리를 뽑아 올린 바람 간 곳 없고 솔이파리 누릇누릇 땡볕에 타고 있다. 소나무는 눈을 뜨고 서서히 죽어가는 제 몸을 바라본다. 물소리는 뿌리를 적시지 못한다. 저놈의 목에 밧줄을 걸고 기증기로 끌면 일어설 수 있을까.
병든 노모에게 속옷을 입힌다. 거웃이 사라져 밋밋한, 여섯번의 열매를 맺은 그 곳, 시든 꽃 잎 한 장 접혀 있다. 졸아든 볼기에 미끈덩 여섯 개의 보름달을 받아 안은 찰진 흔적 남아 있다. 노모가 눈으로 말한다. 내가 베어지면 그 등걸에 앉아 편히 쉬거라. 머리맡에 고요히 틀니가 놓여 있다. 앙상한 다리, 분홍 양말이 곱다. 기울어 가는 소나무 , 반 쯤 뽑힌 소나무에 링거를 꽂는다. 2006-01-19
덩굴은 고집이 세다 - 마경덕
허공에 쑥, 손가락을 집어넣는 호박덩굴
가늘고 푸른 손가락이 둘둘 허공을 감아쥐고
하늘을 팽팽히 끌어당긴다
스스로 길이 되는 덩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기댈 곳을 찾는 여린 호박순
당겨보면 벋지르며 살아온 힘이 있다
줄기가 둑뚝 잘려나가도
거머쥔 손을 풀지 않는다
구부리면 휘어지는 만만한 것들
어깨와 어깨를 엮어 스크럼을 짠다
그 여린 것들이,
담벼락에 올라
벽을 허물기 시작한다
꾸역꾸역 벽을 먹어 치운다
짐승들 이야기 - 마경덕
그 모피공장엔 짐승들이 우글거렸네 사람인 척 하는 짐승 같은 사람과 짐승처럼 묵묵히 일만 하는 사람들과 죽은 짐승들의 눈이 쌓인 모피창고가 있었네. 숨쉬기조차 힘들게 날아오르는 짐승의 털도 가난을 밀어내지 못하고 배고픈 짐승들, 배부른 짐승의 하룻밤 술값 정도에 금세 길들여졌네. 숱한 밤이 뜬 눈으로 들들들, 미싱에 박혀죽고 먼지 쌓인 바닥에서 죽은 짐승들의 물 먹인 껍데기는 고무줄처럼 팽팽히 당겨졌네. 여우 한 마리 팔딱, 재주 넘어 열 마리 여우로 둔갑했네. 수입산 백여우 뱃가죽을 칼로 찢으며 끈질기게 살아남은 짐승들, 늘어난 가죽에 빗질을 하며 눈부신 빛을 달고 살았네. 죽어서 더 빛이 나는 껍데기에 밤새 날개를 달았네. 그저 일밖에 모르는 미련한 짐승들, 백여우의 탐스러운 꼬리에 손 베이는 줄 몰랐네. 수없이 죽어간 짐승들의 슬픈 눈에 그해 여름, 펄펄 눈이 내리고 2006-01-19
토마토 - 마경덕
마당귀에 심은 토마토 한 그루
눈만 마주쳐도 덜컥 애가 선다
간짓대 같은 몸뚱이
쇠불알만한 새끼를 치렁치렁 달고
다시 입덧을 하는 토마토
누릇누릇 머리가 쇠고
허리가 휘었다
차마 놓을 수 없는 것들
버리지 못할 것들
안고 업고
작대기 하나로 버티는 토마토
또 만삭이다
저 무지렁이 촌부(村婦)
슬픔을 버리다 - 마경덕
나는 중독자였다
끊을 수 있으면 끊어봐라, 사랑이 큰소리쳤다
네 이름에 걸려 번번이 넘어졌다
공인된 마약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문 앞을 서성이다 어두운 골목을 걸어나오면
목덜미로 빗물이 흘렀다
전봇대를 껴안고 소리치면
빗소리가 나를 지워버렸다
늘 있었고 어디에도 없는, 너를 만지다가
아득한 슬픔에 털썩, 무릎을 꿇기도 했다
밤새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데도 닿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너에게 감염된 그때, 스무 살이었고
한 묶음의 편지를 찢었고
버릴 데 없는 슬픔을
내 몸에 버리기도 하였다
연장통 - 마경덕
장례를 치르고 둘러앉았다. 아버지의 유품遺品을 앞에 놓고 하품을 했
다. 사나흘 뜬뜬으로 보낸 독한 슬픔도 졸음을 이기진 못햇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나무상자는 관처럼 무거웠다. 어서 짐을 챙겨 떠
나고 싶었다. 차표를 끊어둔 막내는 자꾸 시계를 들여다봤다. 이걸 어쩐
당가, 마누라는 빌려줘도 연장은 안 빌려 준다고 해쌓더니.... 어머니는
낡은 상자를 연신 쓰다듬었다.
관뚜껑이 열리듯 연장통이 열리고 톱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술과 땀에
절은 아버지. 먹통, 끌,대패,망치를 둘러메고 늙은 사내가 비칠비칠 걸어
나왔다. 몽당연필을 귀에 꽂은 아버지, 대팻밥이 든 고무신에서 고린내가
풍겼다.
자식 농사만은 대풍을 거두셨다. 망치는 부산으로, 톱은 서울로, 줄자는
울산, 말라붙은 먹통은 분당으로, 아버지는 그렇게 아홉 번을 찢어지셨다.
가방을 뚫고 나온 이 바진 톱날이 악어처럼 사나왔다.
돼지와 보낸 나의 사춘기 - 마경덕
고1 때 직접 돼지를 키웠다. 세 명의 언니와 다섯 명의 동생들. 목수였던 아버지의 수입으로는 도저히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둘째 언니가 전부터 돼지를 치고 있었다.
내가 중학교때 아버지는 집앞 공터에 돼지우리를 짓고 어머니는 돼지새끼 몇 마리를 사왔다. 이쁘고 우등생이었던 큰언니는 집을 떠나 아르바이트로 학교를 다녔고 둘째(다섯 딸 중 아버지를 닮아 눈독들이던 남자들 많았다. 눈썹이 짙은 아버지 모습은 그레고리 팩과 많이 닮았음 )언니가 돼지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그 일을 물려받게 되었다. 두 언니는 간짓대처럼 가냘퍼서 돼지를 돌보는 것은 자연스럽게 내 몫으로 돌아왔다.
내가 누군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동네 덩치와 붙어 악명 높은 녀석을 늘씬하게 패주지 않았던가. 바다가 코앞이라 일찍이 수영으로 단련된 몸!
오기와 힘이 내 유일한 무기였다. 아들을 기대했던 부모님. 넷째 딸인 나에게 어릴 적 사내 옷을 입히고 사내처럼 길렀다. 그 덕(?)인지 딱지치기. 구슬치기. 팽이치기. 자치기. 제기차기 등 여자 애들이 쉽게 할 수 없는 일에 도가 텄던 나는 사춘기 여학생이 선뜻 할 수 없는 일에도 망설임 없이 돼지를 치겠다고 했다. 내 밑으로 남동생이 있었지만 얼마나 귀한 손인가? 그런 일은 흔한 계집애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돼지를 키우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사료가 없던 때라 가가호호 구정물통(음식찌꺼기를 모으는 통)을 하나씩 놓아두고 하루에 한번씩 그걸 수거하러 다녀야 했다.
양철 양동이를 이고 집집마다 들러 냄새나는 구정물을 걷어 와야 했다. 요즘 아이들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일. 하지만 당시 아이들은 모두 쓸만한 일꾼이었다. 나 역시 씩씩하게 그 일을 했다. 돼지가 커서 어미가 되고 새끼를 낳으면 그걸 팔아서 내 학비를 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먹보 돼지는 탈 없이 잘 자라주었다.
방앗간에 가서 보릿겨(죽재라고 불렀다)를 사다 한 바가지 씩 섞어주면 허천 난 듯 숨도 안 쉬고, (밥그릇에 두 개의 앞발을 담그고 코를 처박고) 단숨에 먹어 치웠다. 돼지의 식성을 누가 따르랴.
그러나 겨울이 오면 골치가 아팠다. 돼지밥통이 꽁꽁 얼어붙어 돌멩이로 쾅쾅 쳐서 간신히 구정물을 모아왔다.
겨울이 되면 돼지막이 추워서 검불을 넣어 보온을 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 집은 농사를 짓지 않아서 그 검불(지푸라기)을 구하러 집에서 한참 떨어진 서정시장 연등천 새끼 꼬는 집까지 가야 했다.
그 당시는 비닐끈이 없을 때라 새끼를 사용하거나 지푸라기를 이용해서 시금치단이나 배추단을 묶었다. 천변 새끼 꼬는 집에 가면 새끼 꼬고 남은 검부러기만 모아 팔곤 했는데 검불을 대충 뭉쳐서 팔았다.
운동회 때 굴렸던 공만큼 뭉쳐진 커다란 검불더미를 머리에 이어 주며.
"너 정말 집에 까지 갈 수 있어?"
하며 내심 불안해하던 새끼( 그때는 일본식 발음 사나꾸로 불렀다)공장 아저씨.
"걱정마세요. 잘 이고 갈 수 있어요. 더 무거운 것도 일 수 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얼마나 불안했던가? 몇 걸음 걷다보면 검불이 흐트러지고 그 지푸라기가 시야를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고개는 기울고 점점 머리가 파 묻혀서 발끝만 보고 걸었다. 만약 짐을 내려놓으면 길바닥에 흩어져서 난감한 꼴이 될 것은 뻔한 일. 나는 죽어라 땅만 보고 걸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어쨌든 그런 건 다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꿈 많은 사춘기 여고생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소녀였다.
윗집에 살던 남학생이 여러 통의 연애편지를 보내왔고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남학생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굳이 밉게 보이긴 싫었다. 그 남학생의 집에는 서너 명의 건달같은 친구들이 모여 있었고 내가 구정물을 걷으러 들어서면 눈이 빠져라 하고 쳐다보았다. 뜨겁고 칼날처럼 따가운 시선이 온몸에 꽂혔다. 그때의 그 창피함이라니! 볼이 확확 달아 올랐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속으로
"짜샤. 뭘 봐! 니들 보태준 거 있어?"
하고 자위를 했지만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녀석들은 내가 지나가면 수군수군 귓속말을 하거나 휘--익 휘파람을 불어제꼈다. 아마 쟤는 누가 좋아하는 애라느니. 지 아버지가 목수라느니 했을 것이었다. 내 친구들 중 남학생을 사귀는 애들도 많았는데 나는 이성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엄마가 무척 엄했기 때문에 그런 일은 꿈도 못 꿀 일이었고 내키지도 않았다. 돼지만 잘 키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구멍난 러닝셔츠에 연장통을 메고 길에서 마주친 아버지가 창피하고 속상했다. 내 사춘기는 그렇게 쓸쓸하고 허무하게 무너졌다.
뭐 돼지가 미련하다고? - 마경덕
그럭저럭 돼지를 키운 지 2년. 돼지가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또 새끼를 낳아서 돼지 키우는 일에 꽤 익숙해 있었다. 발정기가 되면 암퇘지의 생식기가 부풀어올랐는데 종돈에게 끌고 가 접을 붙여왔다. 그 일은 아버지가 맡아서 하셨다. 구루마나 리어카에 네 발을 묶어 실려 갔는데 그때마다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 아따, 그놈 목청 한 번 씨원타,"
지나가는 이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평소에 순한 돼지가 그럴 때면 사나워 진다. 죽으러 가는 길인 줄 알고 두려움에 소리 소리 지르는 것이다. 겁에 질려 리어카에 질퍽질퍽 생똥을 싸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악스런 비명에 돼지 멱딴다는 말이 나왔나보다. 흘레를 붙여 온 돼지는 지쳐서 돌아왔는데 물을 먹이지 않았다. 근거없는 이야기지만 물을 먹이면 임신이 안된다고 하였다. 가끔 새끼가 안들어서서 헛다리 짚는 일도 더러 있었다. 차츰 젖꼭지가 불거지면 성공이었다. 그때의 그 기쁨은 뭐라 말 할수 없다.
임신은 곧 돈과 직결되는 것이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돼지의 몸뚱이가 천근만근 늘어지고 부풀어 새끼를 낳는 저녁이면 엄마는 돼지막에 호롱불을 켜두고 밤을 새웠다. 부정타지 말라고 개다리소반에 소금과 정한수를 떠놓고 두 손으로 싹싹 빌었다.
아마 식칼 한 자루도 놓여 있었던 것 같다. 식칼은 악귀를 물리치거나 부정을 막는 상징이었다. 엄마는 굽신굽신 머리를 조아리며 무사히 순산하게 해줍시사 삼신할미에게 빌고 빌었다.
돼지는 미련해 보이지만 예민한 편이다. 일단 출산 기미가 있으면 일체 돼지막은 출입금지 였다. 어미가 불안하면 출산이 순조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아버지가 상가에 다녀와서 무심코 변소(변소가 그곳에 있었다)에 들어가 볼 일을 보고 계셨는데 마침 돼지 두 마리가 출산 중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미돼지 두 마리가 흥분을 해서 스무 마리가 넘는 돼지를 깔아 뭉개버렸다. 돼지는 보통 열 마리 이상을 낳는다. (암퇘지는 가격이 더 나간다.)
그 어린 돼지들은 어미의 체중에 압사를 당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혀를 빼물고 죽은 새끼돼지를 다라이에 주워 담았다. 뒷산에 묻어 주고 내려오며 엄마는 아버지에게 조심하지 그랬느냐, 돼지가 영물인 걸 몰랐느냐고 야단이셨다. 가끔 그런 사고가 있었다. 특히 겨울철엔 검부러기 속에 새끼가 들앉은 줄 모르고 육중한 어미가 드러눕다가 새끼가 깔리기도 해서 마음을 졸였다.
집 앞에 조선소가 있었는데 배를 건조해서 처음 배를 물에 띄울 때 고사를 지냈다. 그때도 돼지가 팔려 나갔다. 고사용 돼지는 잡티가 없는 순종이어야 했다. 흰 터럭이 한 올이라도 섞이면 그것은 잡종으로 치고 제물이 되지 못했다.
이래저래 돼지 판 돈으로 쌀 사고 옷 사고 신발도 샀다. 사실 돼지 판 돈은 엄마 몫이었다. 엄마가 날 제일 예뻐했는데 그것은 고분고분 했기 때문이다. 납부금을 못내 집으로 여러 차례 쫓겨왔지만 엄마에게 말을 못하고 그냥 돌아가서 선생님에게 쥐어박히고 야단 맞았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엄마기 돈 때문에 애태우는 게 너무 가슴 아팠다. 셋째 언니는 우리 집에서 1등으로 납부금을 갖다 냈는데 돈을 줄 때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러면 엄마는 이웃집에 가서 급전을 빌려 와야 했다.
속을 알리 없는 선생님은 '네 언니는 잘 내는데 넌 왜 그러느냐'고 더 야단을 치셨다. 아무튼 어린 맘에도 엄마가 돈 때문에 우는 게 싫었는데 선생님은 야속하게 벌을 세우고 다그쳤다.
그러는 언니는 날 보고
"넌, 무능 해. 미련해서 한심해."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럴만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개보다 똑똑한 돼지 - 마경덕
개보다 똑똑한 돼지. 돼지의 지능은 개의 지능보다 높다. 개가 30이면 돼지의 지능은 50. 말 귀 다 알아듣고 쥔 다 알아본다. 막대기로 등을 긁어주면 가만히 있다. 허연 등비듬이 일어나도록 긁어주면 너무 좋아 코를 벌름거린다.
돼지가 지저분하다고?
천만에. 돼지는 마른 데만 골라 눕는다. 돼지똥만 잘 치워주면 돼지는 깨끗하다. 그런 생각들은 고정관념이다.
지금이야 토종돼지(흑돼지)가 귀하지만 예전엔 다 토종돼지만 길렀다. 사료 안 먹이고 돼지답게 길렀다. 가장 돼지다운 것은 음식 찌꺼기로 돼지를 키우는 것. 잔칫날 돼지 한 마리 잡아보면 그 맛이 기가 막혔다.
요즘 돼지고기? 그거 진짜 돼지맛 아니다. 돼지는 버릴 게 없다. 오줌통에 바람 넣으면 동네 아이들 축구공이 되고, 내장은 곱창으로 구워 먹는다. 그렇게 돼지는 찌꺼기만 먹고 살다 몸보시를 하고 간다. 설사 누가 비위를 거슬린다고 돼지 같은 놈이라고 욕하지 마라. 그건 욕이 아니다.
돼지보다 못한 놈이라고 해야 욕이지.
'♣ 詩그리고詩 > 한국명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라이벌 / 천양희 (0) | 2011.01.25 |
---|---|
화분 / 최승호 (0) | 2011.01.25 |
산정묘지 1/조정권 (0) | 2011.01.16 |
소금 창고 - 이문재 (0) | 2011.01.16 |
노래/강정 (0) | 2011.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