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문칼럼)

[ESSAY] 九旬 넘은 어머니를 양로원에 모신 뒤…

시인 최주식 2012. 3. 23. 22:55

[ESSAY] 九旬 넘은 어머니를 양로원에 모신 뒤…

  • 박병준 캐나다 교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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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 어둡고 기력 떨어진 老母 혼자 있다가 큰 일 겪으면
    맏아들 불효자 만들까봐 양로원 가시겠다고 고집
    작년 말 거처 옮긴 어머니 '눈 조심하라'며 전화
    어머니 체취 남은 빈방을 오늘도 나는 서성인다

    박병준 캐나다 교포
    아직 밖이 어두워 잠자리에 있는데 전화가 '따르릉' 울린다. 이 시간에 전화하는 사람은 어머니다.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 담뿍 담긴 음성이 전선을 타고 건너온다. "눈이 많이 오고 있다. 꼼짝하지 말고 집에 있어라." "예"하고 대답하는 순간, 칠순(七旬) 넘은 아들은 초등학생이 된다. 어머니는 지금 양로원에 계신다.

    1975년에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 왔다. 자리를 잡자마자 부모님을 모셔왔고, 어렵사리 마련한 집에서 다시 모인 가족은 오순도순 행복했다. 우리 부부가 모두 직장에 나갔기 때문에 집안살림은 어머니 몫이었다. 부업으로 새를 키웠는데 그 일 역시 어머니가 맡았다. 어머니는 환갑에 홀로 된 뒤 노인아파트에 독립했다가, 심장에 탈이 나서 고생하신 후 다시 모여 살았다.

    어머니 방은 2층에 있었다. 기력이 좋을 때에는 괜찮았지만 기운이 떨어지면 계단을 하나씩 기어오르셨다. 그 모습을 뵈면 참 마음이 아팠다. 아래층에 방을 더 만들 형편도 안 돼 퍽 난감했다. 또 우리가 외출할 일이 생기면 문을 잠가야 할지 열어 두어야 할지 망설여졌다. 열어 두면 귀가 어두운 어머니는 누가 들어와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혹 도둑이 힘없는 노인네를 밀치고 물건을 다 들어내도 꼼짝없이 당할 판이다. 문을 잠그고 나가면 불의의 사고가 날 때 구조대가 문을 부수고 들어와야 할 판이었다.

    1997년 처음 한인 단체산행(山行)을 시작한 우리 부부는 매주 한두 번씩 집을 비웠고, 캐나다를 소개하는 잡지 취재로 여러 날 집을 떠날 때도 많았다. 멀리 외지에서 집으로 전화할 때 어머니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걱정하는 아들 내외가 안쓰러웠던지 어느 날부터 양로원으로 가시겠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친구 분들이 한국 음식을 제공하는 양로원에서 같이 지내자고 권한 게 계기가 됐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는 듯했다. 혼자 계시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거나 어지럼증으로 쓰러져 목숨을 잃게 되면 맏아들을 불효자(不孝子)로 만들고 만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일본에 유학한 신여성이었던 어머니는 두메산골 삼대독자인 아버지와 혼인하여 나를 낳았다. 일제의 압박에 신음하는 동포를 구하라는 의미로 아명(兒名)을 '모세'라고 부르며 나에게 온갖 기대를 걸고 한세상을 살아오신 어머니다.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한 세기의 삶이 막바지에 이르러 자신보다 아들의 안위(安危)를 더 걱정하신다. 양로원 얘기가 나왔을 때 가장 반대한 것은 아내였다. 아흔이 넘은 어머님의 여생이 얼마나 남았다고 낯선 곳에 보내느냐, 어머님이 떠나시는 날까지 모시겠다는 아내의 고집을 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하지만 옛날 같으면 그 자신 차려주는 밥상을 받고 아랫목에서 상노인 대접을 받을 칠십 넘은 아내가 구십 넘은 시어머님을 모시고 늘 웃는 얼굴로 살아온 지난 세월이 고맙고 안쓰러웠다. 또 어머니도 우리가 집을 비우는 동안 라면이나 찬밥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기 일쑤인데, 양로원에 가시면 하루 세 끼 따뜻한 식사를 드실 수 있을 것이다. 말벗이 있고 영양이 충분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에 보내드리는 게 효도 아니겠느냐고 설득했다. 동생과 조카들은 이해하고 동의했지만 아내는 결심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결국 어머니와 같이 양로원 답사를 하고 돌아온 후 아내는 고집을 꺾었다.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낸다고 생각하니 우리 세 식구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던 시간이 제일 아쉬웠다. 어머니가 이끌던 뒤뜰 농사는 어찌할까. 씨 뿌리는 시기를 정하고, 씨앗을 관리하는 일은 어머님 몫이었는데…. 작년 말 마침내 어머니는 양로원으로 옮겼다.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어 가까운 곳이고, 지금 어머니가 받는 연금으로 매달 생활비를 내고도 용돈이 조금 남기에 부담 없이 입주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양로원 생활이 즐거우신 모양이다. 차려주는 밥상에 앉아 식사하신 후 수저도 챙기지 않고 일어서기가 민망하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그리고 양로원의 어른으로 입주자 간 사소한 문제까지 앞장서 챙기시며 존경을 받는다고 했다. 집에 계실 때에는 자식에게 얹혀사는 노인이었는데 지금은 활달한 사회생활로 다시 돌아가신 듯하니 더없이 반갑다.

    어머니가 계시던 2층 방은 지금 비어 있다. 어머니의 다정한 체취가 남아 있고, 시원하게 낮잠을 주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해서 나도 모르게 들여다보게 된다. 오늘도 어머니가 안 계신 빈방에서 칠순 아들은 서성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