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노래/고은
친구와 헤어졌다 멀어져가는 그의 잔기침 소리를 등져
나는 허구들을 두고 숲으로 갔다 11월이다
숲은 어떤 모독도 알지 못한다
누가 애타게 기다리지 않아도
마치 오래 기다림이 쌓여 있는 듯
몇달 뒤면 돋아날
새 눈엽들의 수런대는 꿈마저
다 받아들여
여기저기 가슴 두근거리고 있다
빈 숲의 행운 속에 나는 맥박치며 그렇게 살아 있다
나는 하고많은 미련이 좋았다
마을로 간 친구 쪽을
한두번 더 돌아다본 뒤
벌써 어둑어둑한 숲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런 명예도 없이
길은 누구의 길인지 몰랐다
이제 무엇이 두려우랴
오히려
숲은 뜻밖의 가난뱅이 손님 하나 때문에
빈 가지들 어둠속에서 눈떠
어리둥절하게 바람 인다
다른 곳에서는 내내 불던 바람 잘 때였다
명사보다 형용사가 훨씬 많은 나라에 태어나
나는 하나하나의 이름보다 먼저
하나하나의 슬픔으로 져버린
온갖 나무들의 낙엽에 덮인
말없는 흙에도 닿아 있고 싶었다
발 디딜 때마다
내 발바닥이 작은 꽃들이 핀 듯 찬란하였다
청동기의 때가 흘러갔다
바람의 끝자락이 남아 있고
나중에 올 다른 바람의 예감으로
빈 우듬지들의 수없는 떨림을
이제 나는 볼 수 없다
너무 처절하고자 하였고
너무 황홀하고자 하였다
세상은 가도 가도 오류가 판치더라
그동안 찾아다녔던 정답에의 허욕을
여기 와서 살포시 놓아주었다
빈 숲은 놀랍게도 순정의 전당이어서
늦게 돌아온 새들의 날개짓 소리가 났다
또한 숲은 가진 것들이라고는 다 주어버려
텅 비어서
누대의 짐승들이 다른 짐승으로 태어난 유적지임을
알려주었다
더 깊숙이 들어갈까 망설였다
밤은 한낮의 거짓들 스스로 물러난 진실의 시간이고
싶으리라
헤어진 친구는 아닐 터이고
여기 먼저 온 사람이
나말고 누구일까
모르겠다
모르겠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가 저쪽에서 들려오고 있다
어쩌면 내생(來生)의 내 노래인지 몰라 온몸 일어섰다
가지 마라
더 가지 마라라고
내가 나에게 속삭여 경계하였다
그러다가
허구를 사랑하라 복이 있나니라고
내가 나를 유인하고 말았다
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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