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한국명시

숲의 노래/고은

시인 최주식 2012. 4. 2. 22:05

 

숲의 노래/고은

 

친구와 헤어졌다 멀어져가는 그의 잔기침 소리를 등져

나는 허구들을 두고 숲으로 갔다 11월이다

숲은 어떤 모독도 알지 못한다

누가 애타게 기다리지 않아도

마치 오래 기다림이 쌓여 있는 듯

몇달 뒤면 돋아날

새 눈엽들의 수런대는 꿈마저

다 받아들여

여기저기 가슴 두근거리고 있다

빈 숲의 행운 속에 나는 맥박치며 그렇게 살아 있다

 

나는 하고많은 미련이 좋았다

마을로 간 친구 쪽을

한두번 더 돌아다본 뒤

벌써 어둑어둑한 숲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런 명예도 없이

길은 누구의 길인지 몰랐다

 

이제 무엇이 두려우랴

오히려

숲은 뜻밖의 가난뱅이 손님 하나 때문에

빈 가지들 어둠속에서 눈떠

어리둥절하게 바람 인다

다른 곳에서는 내내 불던 바람 잘 때였다

 

명사보다 형용사가 훨씬 많은 나라에 태어나

나는 하나하나의 이름보다 먼저

하나하나의 슬픔으로 져버린

온갖 나무들의 낙엽에 덮인

말없는 흙에도 닿아 있고 싶었다

발 디딜 때마다

내 발바닥이 작은 꽃들이 핀 듯 찬란하였다

 

청동기의 때가 흘러갔다

바람의 끝자락이 남아 있고

나중에 올 다른 바람의 예감으로

빈 우듬지들의 수없는 떨림을

이제 나는 볼 수 없다

너무 처절하고자 하였고

너무 황홀하고자 하였다

세상은 가도 가도 오류가 판치더라

그동안 찾아다녔던 정답에의 허욕을

여기 와서 살포시 놓아주었다

 

빈 숲은 놀랍게도 순정의 전당이어서

늦게 돌아온 새들의 날개짓 소리가 났다

또한 숲은 가진 것들이라고는 다 주어버려

텅 비어서

누대의 짐승들이 다른 짐승으로 태어난 유적지임을

알려주었다

 

더 깊숙이 들어갈까 망설였다

밤은 한낮의 거짓들 스스로 물러난 진실의 시간이고

싶으리라

헤어진 친구는 아닐 터이고

여기 먼저 온 사람이

나말고 누구일까

모르겠다

모르겠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가 저쪽에서 들려오고 있다

어쩌면 내생(來生)의 내 노래인지 몰라 온몸 일어섰다

 

가지 마라

더 가지 마라라고

내가 나에게 속삭여 경계하였다

 

그러다가

허구를 사랑하라 복이 있나니라고

내가 나를 유인하고 말았다

더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