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예방주사/엄기원

시인 최주식 2012. 5. 31. 23:23

예방주사/엄기원

약 냄새가
코를 톡 쏜다.

낯선 아저씨가
주사기를 들고,

낯선 누나가
약솜을 들고 다가서면,

주사침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들,

서로 빠져
뒤에 가 선다.

―엄기원(1937~  )

이 동시를 읽으면서 '그래, 그때 그랬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지금은 그 친구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냥 예방주사가 아니라 삶의 예방주사를 호되게 맞고 학교 문을 나섰던 친구들은 더러는 예방주사의 효험도 없이 세상을 뜨기도 했겠지. 겁을 내고 뒤로 빠지던 겁 많은 친구들은 쓰나미처럼 무서운 세파(世波)에 휩쓸려가기도 했겠지. 심장을 한 번에 콕! 찔러 멈추게 할 것만 같았던 뾰족한 주사침, 코를 톡! 쏘던 약 냄새, 약솜처럼 하얀 얼굴의 낯선 젊은 여자와 무뚝뚝한 낯선 남자는 우리가 처음 대했던 무섭고 겁나던 낯선 세상의 풍경이었다.

예방주사 맞던 날, 마음 약한 여자아이들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팔소매를 걷어붙인 남자아이들은 매 맞을 때보다 더 두려움에 떨었다. 그래서 마치 쓰나미에 쫓기는 사람들처럼 서로 빠져 뒤에 가 서려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용케 뒤로 가서 선들 오히려 기다리는 두려움이 더 무서웠다. 세상에 나가면 그 주사침보다 더 무서운 것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친구들아, 그래도 그때 예방주사 맞던 때가 좋았지, 지금은 어디 있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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