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한국명시

돼지국밥 한그릇/ 정이랑

시인 최주식 2012. 7. 19. 21:59

돼지국밥 한그릇/ 정이랑

 

 

태어나서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말아드리지 못했다

올해 칠순의 늙은 아버지와 마주 앉아 먹는 국밥

눈동자 한번 들여다보지 못하고 살았는데 할 말이 없다

"고기가 많네요, 아버지."

아직도 김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릇으로 고기 건네고

"이것만 해도 많다, 너나 많이 먹어."

갔던 고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여전히 김은 모락모락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목구멍으로 울컥 올라왔다

서른이 넘어 자식 낳고 살면서 그 흔한 '고맙다'는

말 한 마디 '감사하다'는 마음 표현하지 못했다

덜컹덜컹 유리문 밖으로는 바람만 불고

비라도 오려는지 플라타너스 잎들이 손바닥 펴들고 있다

넘어가지 않는 국밥 꾸역꾸역 밀어 넣기만 하는데

푹 파인 이마의 주름살 사이로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이제 구슬구슬 빗방울도 파도타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국밥 한 그릇 뚝딱 비우시고

집으로 돌아가셔야 한다며 527번 버스를 타셨다

그저 버스의 꼬리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이렇게 따뜻한 국밥 한 그릇 언제 다시 대접할 수 있을까

시간의 기둥을 잡고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

비는 그치지 않고 발가락 사이로 침범하며 걸어가고 있다

오늘 하루 어둠이 내릴 때까지 나도 우산 없이 걸어가 봐야겠다

 

 

- <시평> 2010.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