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한국명시

오리의 탁란 - 강희안

시인 최주식 2012. 7. 19. 21:50

오리의 탁란 - 강희안

 

저 흉악한 오리는 대체

몇 개의 알이나 닭의 둥지에 숨겨놓은 걸까

까끌까끌한 보리 모개를 먹었는지

오리들이 꽤액 꽥 숨넘어가고 있다

둥근 주둥이를 벌리며 목청을 세우고 있다

가끔씩 닭의 문간에선

병아리의 부화가 시작되었는지

콕콕콕, 생명의 코크를 여는 소리, 소리...

게슴츠레 눈을 뜬 병아리들이

일제히 희디흰 부리를 치켜들고 있다

그놈들은 빛을 두려어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므로

누구도 애써 눈을 감지 않는 것이다

잠시 눈꺼풀에 걸려 있던 졸음이

세계를 한번 기우뚱거리게 했을 뿐이다

스스로 진공의 주검을 깨뜨린 자만이

온전한 몸을 얻을 수 있는 법

오리들이 구룩구룩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금단의 영역을 기웃대자

어미닭이 날카로운 부리로 go! gogogo!

저리 썩 물러나라고

잠시나마 서슬 붉은 눈을 부라렸던가

저리도 여린 발길질에

끄덕끄덕 당찬 계관마저 조아렸던가

어미닭이 두꺼운 오리알을 쪼아대는 사이

그들은 그간 열심히 부풀린 부리로

차디찬 어둠을 베어 물 것이다

어미를 잃은 기억은

다시금 누군가의 부재로 대체될 것이다

새로 물려받은 넓적한 부리조차

곧 제 몸을 불리는 데 익숙해질 것이다